< (6). 도약을 위한 준비 -2 >
* * *
드르륵-!
커다란 회의실.
U자로 길게 뻗어있는 회의실 탁자에, 둘러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파트장님 들어오십니다.”
검정색 정장을 멋들어지게 차려 입은 중년 남성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고, 상석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마흔 쯤 되었을까?
중년이라기엔 젊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눈가에 진 주름의 골은 제법 깊어 보이는 남자.
그는 바로 카일란의 기획 전체를 총괄하는 기획파트의 파트장이자, 게임업계의 거인으로 알려져 있는 ‘남태훈’ 이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게임 시장에 뛰어들었으며, 서른 후반에 LB사 창립멤버가 되어 카일란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이제 사십 줄이 되었음에도 게임 기획에 대한 감각은 뛰어나서, 대부분의 사원들이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탁-!
그가 들고 온 서류를 탁자에 올려놓으며 자리에 앉자, 기립해 있던 인원들도 다시 앉았다.
회의실에 내려앉은, 제법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
게임회사 치고 분위기가 무거운 이유는, 오늘의 회의가 무척이나 중요한 회의이기 때문이었다.
총 일곱 개의 기획팀을 각각 맡고 있는 일곱 명의 과장, 차장급팀장들과, 그 위에 있는 세 명의 부장들.
게다가 마케팅 팀부터 시작해서 타 팀의 실무진들까지 여럿 참석한 이 회의는, 일 년에 두 번 있는 중요한 회의였다.
오늘의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들이, 카일란의 하반기 기획 방향성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좌중을 한번 둘러본 남태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얘기해야 할 건은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일단 가장 시급한 사안부터 먼저 시작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커다란 회의실 벽면을 전부 차지하는 거대한 스크린이 핑- 하는 전자음을 내며 켜졌다.
스크린에는, 보기 좋게 정리된 열 장 정도의 이미지가 떠올라 있었다.
남태훈의 시선이, 우측 가장 끝에 앉아있는 남자를 향해 움직였다.
“의환이. 자네가 시작해 봐.”
“예, 알겠습니다 파트장님!”
그는 바로, 기획3팀의 팀장이자 현재 기획파트의 팀장들 중 가장 막내인 김의환.
힘있게 대답한 의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손을 뻗자, 스크린에 떠올라 있던 이미지들 중 하나가 크게 확대되어 켜진다.
그리고 확대된 이미지는, 영상으로 바로 재생되었다.
“현재 양국 길드들의 판도입니다. 스크린 오른쪽을 확인하시면 아실 수 있겠지만, 연초에 파트장님께서 예측하셨던 바와 거의 흡사합니다.”
영상으로 재생되는 내용은, 크게 세 개로 구분되는 카일란의 대륙들.
그리고 대륙에 있는 수많은 길드들의 영토가, 한 눈에 보이도록 그려진 3d 영상 이미지였다.
남태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기 붉은 색으로 표기된 영토가 타이탄의 영토일 테고, 푸른 색으로 표기된 영토가 로터스의 영토이겠군.”
김의환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파트장님. 적절한 선에서 밸런스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흐음…. 역시 공국 단계에서 길드가 소유할 수 있는 영지 개수의 상한선을 설정해 놓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어.”
“맞습니다. 만약 리미트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거의 모든 점령 가능한 거점이 로터스와 타이탄길드 소유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이미 길드 밸런스가 완전히 붕괴되어버리고 말았겠죠.”
지금 스크린에 띄워져 있는 지도를 보면, 타이탄과 로터스의 영토가 압도적으로 거대한 것은 아니었다.
20~30여개 정도의 길드들이 비슷한 크기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것.
물론 알짜배기 영지들은 전부 로터스와 타이탄 길드의 영지들이었지만, 두 길드의 막강한 힘에 비하자면 이러한 세력지도는 의아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구도는, 완벽히 기획팀에서 의도한 것이었다.
길드 생태계가 파괴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손을 써 놓았던 것이다.
왕국을 선포하지 않는 이상, 더 이상 영토를 늘릴 수 없도록 시스템 상에서 설정해 버린 것.
그렇다면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는 두 길드가, 바로 왕국을 선포해 버리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국 까지는 제국의 울타리 안에 있기 때문에 상관이 없지만, 왕국이 되는 순간 제국의 품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카이몬과 루스펠 중 그 어느 곳으로부터 공격받을 지 알 수 없었고, 아무리 로터스와 타이탄 길드의 세력이 강력하다 한들 제국에 비할 바는 아닌 것이다.
그야말로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
너무 압도적으로 성장하는 두 길드의 발목을 잠깐 잡아두고, 뒤쳐진 길드들이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기획의도인 것이다.
이러한 개발사의 개입이 로터스와 타이탄 길드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적당히 길드의 생태계가 유지되어야, 최상위 길드로서의 존재가치도 더욱 올라가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카일란은 가상현실 게임이다.
리얼함을 최대한 추구하는 가상현실 게임.
하지만 ‘게임’이기 때문에 그 현실성에 제약을 걸어야 할 필요도 분명히 있었다.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게임에 투자하며 재능도 탁월한 최상위 랭커들과 길드들에게 그에 따른 보상을 주어야 함은 당연했으나, 후발주자들이나 중하위권 유저들의 가능성도 항상 열어둬야만 했다.
이 사이에서 형평성과 밸런스를 지키는 것이 바로 기획팀의 사명.
잠시 동안 김의환의 브리핑을 듣던 남태훈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확실히 밸런스는 맞아 들어가는 것 같군. 하지만 이대로 더 뒀다간 거대길드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겠지?”
“그렇습니다. 이제 로터스와 타이탄 길드의 경우는, ‘공국’ 상태에서 성장할 수 있는 거의 최대치까지 길드가 성장해 버렸습니다. 만약 왕국건설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길드 컨텐츠 부족으로 불만이 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남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다음 주에 바로, 뉴 에피소드를 오픈하도록 하지.”
“…!”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메모중이던 타 기획팀의 팀장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남태훈의 말이 제법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 주 말입니까?”
“그건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아직도 로터스와 타이탄 길드의 세력이 압도적으로 강한데…. 다른 길드들이 성장할 시간을 좀 더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태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 정도면 충분히 다른 길드들도 따라 왔어. 저기 스크린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20위권의 길드들까지 공국을 선포한 마당에, 시간을 더 끄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아.”
팀장들 중 가장 연차와 직급이 높은, 기획1팀의 팀장 우민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국의 억제력이 풀리는 순간… 로터스와 타이탄이 순식간에 다시 격차를 벌릴 겁니다.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합니다.”
그에 남태훈이, 피식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팀장의 말이 맞아. 그에 대한 대안은 확실히 필요하지.”
남태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김의환에게 손짓했고, 의환은 얼른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직접 스크린 앞으로 간 남태훈이, 스크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두 번째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태훈이 씨익 웃으며 다시 말했다.
“여기, 확실한 대안이 있다네.”
* * *
딩동-!
벨소리가 울린다.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워 티비를 시청하던 진성이, 벌떡 일어났다.
“누구세요?”
반사적인 물음과 함께 진성의 시선이 현관 옆 스크린으로 향한다.
거기에는 몇 명의 반가운 얼굴들이 떠올라 있었다.
[누구긴 누구야 인마! 빨리 열어! 더워 죽겠으니까.]
과장 섞인 유현의 말에, 진성이 피식 웃으며 얼른 나가서 대문을 열었다.
끼이익-!
그리고 그 앞에는, 유현을 비롯한 몇 명의 과 동기들이, 이것저것 잔뜩 싸들고 와서 서있었다.
“야, 박진성! 집 아주 근사한 곳으로 이사했네?”
“그러니까 말이에요. 누구는 가난뱅이 대학생인데, 누구는 게임 하나 잘해서 집도 사고 말이야.”
“크으, 갓진성. 근데 난 솔직히 얘가 아직 이정도밖에 못 번게 이해가 안 되기도 해.”
“이정도 밖에… 라니?! 이 아파트 못해도 십억은 할 걸? 십억이 뉘 집 애 이름이냐?”
시끌벅적한 동기들을 보며 피식 웃은 진성이, 안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얼른 들어와 이것들아. 형도 빨리 들어오세요.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놨는데 문 열어놓으면 전기세 아깝다구요.”
그들 중 유일하게 한 살이 많은 세원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후, 짠돌이 자식. 들어간다, 들어가.”
며칠 전.
진성은 살고 있던 투룸을 나와 근방의 30평대 고급 아파트로 이사했다.
십억이 넘는 고가의 아파트였지만, 그동안 벌어들인 돈으로 여유 있게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몇 안 되는(?) 친한 과 동기들을 불러 집들이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와, 그나저나 이 냄새 뭐야?”
“뭐긴 뭐겠어. 하린이 와서 요리하고 있나보지.”
소파에 앉은 민아가 킁킁거리자, 세원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그리고 마침 부엌에서 나온 하린이, 혀를 쏙 빼어 물며 말했다.
“딩동댕! 여러분, 진성과 하린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세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하린에게 묻는다.
“뭐? 여기가 왜 진성과 하린의 집이야. 진성의 집이지.”
하린이 새초롬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왜긴요. 오늘부터 저도 여기서 같이 사니까 그렇죠.”
“…!”
유현과 민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한 표정으로 동시에 입을 연다.
“에엑? 도, 동거?!”
“뭐어? 같이 산다고?”
하린이 한 마디 더 한다.
“응응. 게다가 이 집에, 내 지분도 좀 있다구!”
옆에서 채널을 돌리던 진성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거들었다.
“그러기로 했어. 하린이 사촌 집에 얹혀 사는 것도 불편하다 하고, 넓은 집으로 이사 온 김에….”
나름 보수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는 유현이, 멍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허얼… 동거라니…! 하긴, 진성이나 하린이나, 부모님 멀리 계시니까 큰 문제는 없으려나…?”
민아가 남자친구인 유현을 슬쩍 응시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뭐, 어떤 면에서는 좀 부럽기도 하고….”
시끌벅적한 진성의 집.
동거라는 생각지 못했던 이슈에 잠시 소란스러웠지만, 하린이 음식들을 내오자 금세 조용해진다.
그리고 맛있는 요리들을 먹으며, 진성이 TV 채널을 고정시켰다.
커다란 벽걸이 TV에 떠올라 있는 화면을 보며, 세원이 피식 웃었다.
“집들이 날짜를 오늘로 잡은 이유가 있었고만.”
“내가 말했잖아요, 형. 오늘 카일란 서버 점검하는 날이라서 쟤가 사람들 부른 거라니까요?”
진성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뭐, 겸사겸사, 좋잖아요? 다들 카일란 유저이기도 하고.”
진성이 틀어놓은 채널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게임 방송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오랜만에 대규모 업데이트가 있는 날이자, LB사에서 주요 업데이트 소식들을 공개한다고 공표한 날이기도 했다.
몇몇 메이저 게임방송 채널을 통해, 올해 하반기 업데이트 내용을 발표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업데이트 내용을, 단순하게 뉴스처럼 발표하는 것도 아니었다.
카일란 공식홈페이지에 발표된 일정에 따르면, 마치 영화 같이 제작된 고 퀄리티의 영상이 무려 여섯 시간이 넘게 방영된다고 한다.
쉽게 말해 유저들이 여섯 시간이 넘는 영화를 시청하면서, 그 영상을 통해 신규 업데이트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는 얘기였다.
오직 LB사만이 가능한, 상식의 틀을 깨는 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대규모 업데이트를 위한 서버점검시간마저, 기다리는 유저들을 위해 이렇게 커다란 즐거움을 선사하는 LB소프트.
유저들의 개발사 찬양은 끝없이 이어졌고, 전 세계가 카일란의 게임 클래스에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이벤트였다.
“어, 시작한다!”
진성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거실에 둘러앉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TV를 향했다.
진성을 게임폐인이라 놀리기는 했지만, 다들 어쩔 수 없는 카일란 유저들이었다.
* * *
루스펠 제국의 수도인 뮤란.
뮤란의 중심에 있는, 화려하고 웅장하기로 유명한 루스펠 제국의 황성이 영상에 떠오른다.
그리고 화면은 곧, 황성 내부를 비췄다.
용상에 앉아있는 루스펠 제국의 황제의 모습을 시작으로, 양쪽에 쭉 도열해 있는 수십 명의 대소신료들.
그리고 그 앞에는, 황실의 근위기사인 헬라임이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셀리어스와 마주하고 있었다.
루스펠 제국의 황제인 셀리어스가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래, 헬라임. 자세히 알아봤는가?”
“그렇습니다, 폐하.”
“고해보라.”
척-!
절도 있는 동작으로 오른 손을 굽혀 예를 취한 셀리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이몬 제국의 황제, 후안 루카르프. 그가 사망한 것이 맞다 합니다.”
“…!”
심연과도 같이 깊은 황제의 금빛 눈동자가, 진하게 빛난다.
그리고 도열해 있던 수많은 신료들도, 비장한 표정이 되었다.
셀리어스가 입을 열었다.
“이것은… 기회로군.”
“그렇습니다, 폐하. 전쟁의 신 마레스님께서 불가침의 신탁을 거두어 가신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돌아왔나이다.”
중부대륙이 오픈됨과 동시에 치러졌던 두 제국간의 전쟁.
그때 크게 손해를 본 루스펠 제국은, 사실상 카이몬 제국에 비해 군사적으로 약세가 된 것이 사실이었다.
전쟁이 지속되었더라면 루스펠의 입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을 상황.
하지만 운이 좋은 것인지 때마침 마계의 침공이 있었고, 때문에 전쟁의 신 마레스가 양국에 불가침 신탁을 내렸었다.
그리고 그 불가침 신탁은, 지금까지 남아서 전쟁을 막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불가침 신탁이 거두어졌고, 상대적으로 전력이 부족한 루스펠 제국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일어날까 노심초사 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카이몬에 많은 부분을 내어줘야 할 게 분명했으니까.
한데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카이몬 제국의 황제 루카르프가 사망하며, 루스펠 제국에게 오히려 기회가 온 것이다.
“근위대장은 듣거라…!”
“하명하십시오, 폐하.”
황제가 용상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황금빛 검을, 힘 있게 뽑아들며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앞으로 일주일 뒤.”
잠시 뜸을 들인 셀리어스가, 좌중을 한 번 둘러봤다.
그리고 그의 황금안(黃金眼)이, 샛노란 빛으로 물들었다.
“짐이 직접 출병할 것이다!”
그것은, 전쟁의 서막이었다.
* * *
< (6). 도약을 위한 준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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