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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타펠 영지 (1)
라타펠 영지의 삼면을 빽빽하게 둘러싼 거대한 산줄기.
‘라타펠 산맥’의 중턱까지 오른 이안은 모든 소환수들을 전부 소환 해제하였다.
이제부터는 영지 내부로 잠입해야 하기 때문에, 소환수들은 오히려 짐이 될 뿐이었다.
그리고 이안은, 마을에서 구입해 온 ‘투명 망토’를 뒤집어썼다.
-‘투명 망토’ 아이템을 착용하셨습니다.
-타인의 시야에서 캐릭터가 사라집니다.
-적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혹은 공격받을 경우, 투명 효과가 사라지며 캐릭터가 노출됩니다.
-투명 효과가 사라진 뒤, 1분 동안은 공격력이 50퍼센트만큼 감소합니다.
투명 망토는 무척이나 희귀한 아이템이었다.
카일란의 어떤 몬스터를 잡아도 드롭되는 아이템이었으나, 드롭률이 극악에 가까운 아이템.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 카일란을 오래 플레이한 이안조차 딱 한 번 획득해 본 게 전부인 이 아이템은, 경매장에서 무려 5천만 골드 정도의 시세를 형성하고 있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여러 가지 페널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무척이나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생존 아이템이기 때문이었다.
투명 망토는 대부분의 랭커들이 한 벌씩은 장만하여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투명망토를 착용한 이안은, 더욱 과감하게 움직여 금세 산을 타고 올라갔다.
그렇게 삼십분 정도를 이동했을까?
드디어 이안의 눈앞에 라타펠 영지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줄기를 따라 웅장한 성벽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잠시 멈춰서 성벽을 한차례 쭉 훑어 본 이안이, 천천히 다시 걸음을 떼었다.
‘일단 디텍팅 타워 위치부터 확인해 볼까?’
성벽의 위쪽에는, 일정 간격으로 디텍팅 타워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암살자 클래스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방어 시설이 디텍팅 타워이기 때문.
지난 파이로 영지전에서 로터스 길드가 당했던 것처럼 능력 좋은 암살자가 침입을 시도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인 것이다.
때문에 그야말로 필수라 할 수 있는 디텍팅 타워는, 라타펠 영지의 외성에도 여지없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이안에게는, 디텍팅 타워의 시야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 할 수 있었다.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라타펠 영지가 후작령이라고 했으니까……. 디텍팅 타워는 최대 4레벨까지 지어져 있겠군.’
카일란에서는 ‘거점’이 촌락의 단계를 벗어나 영지의 단계로 성장하면, 그 안에서 크게 다섯 가지의 등급으로 다시 나뉘게 된다.
하위 등급이랄 수 있는 남작령과 자작령.
그리고 본격적으로 영지 컨텐츠가 오픈되기 시작하는 백작령과 후작령.
마지막으로 공국이 되기 직전의 단계인 공작령까지.
그리고 모든 영지의 시설물들은 등급이 하나 상승할 때마다 성장시킬 수 있는 레벨의 상한선이 하나씩 올라가게 된다.
‘남작령’일 때에는 시설 등급을 1레벨에서 더 이상 올릴 수 없었다면, ‘후작령’까지 성장한 뒤에는 최대 4레벨의 시설물까지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본 시설물이건 고급 시설물이건, 어떤 경우에도 이 레벨 상한선은 동일했다.
때문에 후작령인 라타펠 영지의 경우, 방어 타워부터 시작해서 모든 건물이 최대 4레벨까지 성장되어 있을 것이다.
‘4레벨 디텍팅 타워의 디텍팅 범위가 280미터였지?’
이안은 빈틈을 찾아내기 위해, 라타펠 영지의 외성에 세워져 있는 디텍팅 타워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4레벨의 타워이기는 하지만, 어딘가 분명히 업그레이드가 덜 된 녀석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3레벨 이하의 타워를 하나라도 찾아낸다면, 타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여 사각지대를 찾아 잠입할 생각이었다.
‘오호, 역시 3레벨짜리가 중간에 하나 끼워져 있군.’
예상대로 구멍을 한 곳 발견한 이안이, 득의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3레벨 타워를 찾았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제 타워 간 거리를 계산한 뒤, 사각지대가 나올 수 있는 지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진짜 문제였다.
아무리 이안이라 하여도 눈대중으로 정확한 거리까지 계산해 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안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견고한 목궁’ 아이템을 착용하였습니다.
사정거리가 200미터인 화살을 쏘아서 그 비거리를 가늠해 거리를 측정하려는 것이었다.
화살을 시위에 걸기 전.
이안은 여러 번 주변을 확인하였다.
‘누가 맞기라도 하면 큰일 나니까 ’
화살에 지나가는 몬스터라도 맞는 순간 이안의 은신이 풀려 버릴 테니, 최대한 조심해만 한다.
적당한 자리를 잡은 뒤 심호흡을 한 이안이, 목궁을 수평으로 들어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를 그대로 놓았다.
그러자 경쾌한 파공성과 함께, 이안이 쏘아 낸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나아갔다.
피이잉-!
그리고 잠시 후, 힘을 다한 화살이 디텍팅 타워가 세워져 있는 성벽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졌다.
툭.
화살이 떨어져 내린 위치를 보니, 아직까지 디텍팅 사정권에 도달하기까지는 여유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안의 활 질은 끝나지 않았다.
피잉- 피피핑-!
자리와 방향을 바꾸며, 여기저기 화살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다섯 개 정도의 화살을 날려 본 이안은, 한 지점에 서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갑자기 공책을 꺼내어 들었다.
‘이 지점에서 a타워까지의 거리는 300미터 정도, b타워까지의 거리는 400미터 정도인 것 같군…….’
이안은 펜을 꺼내 들고는 거침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본인의 위치와 두 디텍팅 타워의 위치를 공책에 표시하고는, 세 점을 이어 삼각형을 만든 것이다.
이안이 위치한 꼭짓점이 직각인, 직각삼각형이었다.
‘흐음, 그러니까……. 저 두 타워 사이의 거리가 대충 500미터 쯤 된단 얘기네.’
그는 무려 본인이 알고 있는 수학 지식까지 총동원하여 타워의 사정거리를 계산해 내고 있었다.
타워 사이의 거리를 안전하게 알아내기 위해, 피타고라스의 정리까지 사용한 것이다.
‘a타워가 4레벨이고 b타워가 3레벨이니까. 10미터 정도의 사각지대가 나오긴 하겠네.’
4레벨 타워의 사정거리는 280미터이고 3레벨 타워의 사정거리는 210미터였다.
그러니 두 타워 사이의 거리가 500미터라면 중간에 10미터 정도의 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이안은 마지막으로 화살을 세 발 더 꺼내어 들었다.
10미터의 사각지대의 위치를 찾기 위한, 마지막 화살들이었다.
피이잉-!
‘성벽까지 최단거리로 움직이면, b타워에서 180미터 떨어진 지점일 테니……. 좀 더 왼쪽으로 진입하면 사각지대로 들어설 수 있겠어.’
계산이 완벽히 마무리되었다.
이안의 공책에는, 180, 320, 240 따위의 숫자가 어지럽게 쓰여 져 있었다.
세 발의 화살로 필요한 거리를 전부 알아낸 이안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안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확신에 차 있었다.
성벽 앞까지 무사히 도착한 이안은 여유롭게 성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안이 성벽을 넘어가는 동안 성벽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이안의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 * *
-홍채 인식 완료. ‘레미르’님 카일란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익숙한 메시지와 함께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홍염의 마도사. 아니, 이제는 홍염의 군주라는 별명을 갖게 된 한국 서버 최강의 마법사 유저인 레미르.
그녀는 오늘도 레벨 업을 위해 눈 뜨자마자 카일란에 접속하고 있었다.
“흐음, 오늘은 오랜만에 파티플을 한번 해 볼까? 솔플도 이제 좀 질리는데…….”
익숙하게 친구 목록을 오픈한 레미르는, 곧 혀를 끌끌 찼다.
분명히 접속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인물이 친구 목록 맨 위에 파란 불빛과 함께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인물은 물론, 이안이었다.
“얘는 진짜 새벽부터 지치지도 않나? 어디 보자……. 흠, 그래도 오늘은 플레이 타임이 인간적이네. 아직 접속한 지 3시간 밖에 안 됐군.”
가끔 친구 목록을 확인하다가 이안의 플레이타임을 볼 때면, 레미르는 기겁을 하곤 했었다.
10시간, 20시간은 기본이었고, 많을 땐 40시간대의 플레이타임을 본 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현 시각은 새벽 다섯 시.
친구 목록에 접속해 있는 인물은 이안 하나 뿐이었기에, 레미르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 보기로 했다.
“그래, 오랜만에 스파르타식 사냥 한번 뛰어 보는 것도 괜찮겠지.”
파티를 맺는 것도 아니고 ‘파티 제의’를 하는 것뿐임에도, 이안이라는 이름은 레미르로 하여금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이내 큰 결심을 한 레미르는 이안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아니, 날리려 했다.
“어?”
메시지를 보내려던 그녀가 벙 찐 표정이 된 것이다.
그녀가 메시지를 보내기 직전에, 이안의 메시지가 먼저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이안 : 레미르 누나, 오랜만에 파티플 콜?
그에 소름이 돋은 레미르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양팔을 문질렀다.
“얘, 혹시 귀신은 아니겠지?”
왠지 이안과의 파티플레이가 더욱 두려워지는 레미르였다.
* * *
라타펠 영지 외곽의 작은 공터.
위이잉-!
작은 공명음과 함께 포털이 열리더니, 네다섯 명 정도의 인물들이 그 안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면면은 단지 ‘네다섯 명의 유저’ 정도로 평가하기에는 너무도 화려했다.
홍염의 군주 레미르부터 시작해서 흑마법사 랭킹 1위인 훈이.
더해서 전사 랭킹 5위권에 드는 유신에 사제 랭킹 1위인 레비아까지, 최상위권의 랭커들만 모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안까지 포털에서 나오자 문이 완전히 닫혀 사라졌다.
“읏차.”
그리고 공터에 모인 파티원들을 한 번씩 둘러본 이안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새벽부터 모이느라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흐흐.”
이어서 레미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난 이 사람들이 이 시간에 다 모인 게 진짜 신기하네. 지금 나 말고는 이안이가 불러서 다들 접속하신 거죠?”
레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죠? 저는 지금 자다가 이안 님 전화 받고 깨서 접속한 거예요.”
유신이 동조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훈이는 우울한 표정이었다.
“더 자고 싶었는데, 힝…….”
레미르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갑자기 접속을 종료한 이안이, 신속하게 세 사람을 깨워서 파티에 가입시킨 것이었다.
게다가 뜬금없이 로터스 왕성 앞으로 모이라고 하더니, 차원 포털을 열어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려왔다.
새벽부터 전화해서 게임에 접속하라는 인물이나, 그렇다고 또 접속해서 파티에 가입하는 인물들이나.
확실히 정상들은 아닌 게 분명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레비아가 의문스런 표정으로 이안을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이안님. 여긴 어딘가요?”
“라타펠 영지 내부입니다.”
“라타펠 영지라면…….”
“엘리카 왕국 안에 있는 후작령이죠.”
“……?”
엘리카 왕국이 리치킹의 권속이라는 것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말인 즉, 이곳이 어둠의 세력의 한복판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이안의 파티원들은 자신들을 이곳으로 왜 데려왔는지가 궁금하기 이전에, 어떻게 여기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가 더 미스터리했다.
“아니, 여긴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레미르의 질문에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노코멘트 하겠어. 설명하자면 기니까.”
“쳇…….”
이번에는 가만히 있던 유신이 물었다.
“그럼 여긴 왜 온 건데?”
“그야 당연히…….”
이안이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한바탕 신나게 놀아 보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