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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임과의 재회 (4)
* * *
‘이안 대공’이라는 단어.
이안에게 이 단어는, 이제는 벌써 들은 지 제법 오래된 호칭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서, 무척이나 반가운 호칭이기도 했다.
‘헬라임……?’
이안은 반가운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살짝 아쉬운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헬라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쉬움도 잠시, 곧 이안의 표정은 밝아졌다.
“대공을 뵙습니다!”
“충! 대공을 뵙나이다!”
뇌옥에 갇혀 있던 수많은 황실기사단이, 양옆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들 중 헬라임은 없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정도 전력이면 충분히 힘이 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와, 시간이 지나서 그런가? 황실기사단 레벨들이 왜 이래?’
이안은 적잖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새로 나타난 열다섯 명 정도의 황실기사들 레벨이, 전부 450에 육박했기 때문이었다.
황실기사단의 레벨이 450이라는 말은, 헬라임은 500레벨에 근접했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안은 새로 등장한 황실기사들을 통제하여 진영을 다시 구축하였다.
“로페른, 좌측으로 움직여! 레가스, 넌 거기 있고!”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개는 오직 이안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무리 명성이 높다고 하여도 다른 랭커였다면, 황실기사단을 통제하는 게 불가능했을 터였다.
황실기사단의 자존심은 무척이나 강했고, 쉽게 누군가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이안이라면 다르다.
이미 일전에 제국 전쟁때부터, 이안의 명령을 듣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안은, 과거 루스펠 제국에서 황제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진 귀족이었다.
헬라임이 없는 지금, 이들이 이안의 명령을 듣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2차 몬스터 웨이브가 밀려들기 전 완벽하게 진형을 갖춘 이안의 파티.
그런데 그때, 언데드 진영의 뒤쪽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소로운 녀석들, 모조리 나의 노예로 만들어 주마!”
“……!”
고막이 찢어질 듯 울려 퍼지는 커다란 소리에, 이안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려 475레벨이나 되는 어두운 그림자들이 나타나 있었다.
“저게 뭐지?”
레벨 말고는 모든 정보가 물음표로 표시되어 있는, 의문의 네임드 몬스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한 이안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황실기사 하나가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치 메이지들입니다, 대공.”
“리치 메이지……들……이라고?”
“그렇습니다. 저들이 라카메르의 측근들입니다.”
“헐…….”
애초에 ‘리치’라는 존재는, 언데드 중에서도 최상위 티어에 속하는 존재라 할 수 있었다.
몬스터로 치면 ‘드래곤’과 같은 선상에 있는 수준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무려 셋이나 등장했다.
아무리 ‘황실기사단’이라는 든든한 지원군들이 돕는다 하여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게 분명했다.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건 한 방 싸움이다. 최대한 각을 정확히 재고 한 번에 우세를 점해야 돼.’
적들이 전부 언데드인 지금, 이안에게는 아주 강력한 패가 두 개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카카의 광역 스킬이다.
‘꿈꾸는 악마’스킬을 사용한다면, 이 스킬이 유지되는 시간 동안만큼은 압도적인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것이다.
꿈꾸는 악마가 발동되면, 모든 어둠 피해를 절반으로 줄여주는 ‘어둠 지배’효과 범위 내 모든 적들에게 적용된다.
그리고 어둠 지배가 지속되는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최대한 공격적으로 파티를 운용하여 리치들을 우선으로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번째 패인 ‘드라고닉 베리어’.
이안은 엘카릭스의 고유 능력인 드라고닉 베리어와 카카의 고유 능력인 꿈꾸는 악마를 조합하여 활용할 생각이었다.
‘어둠 지배 지속 시간 엘이의 드라고닉 베리어를 켜면, 그동안은 거의 무적이라고 봐도 되겠지.’
드라고닉 베리어의 방어력 계수는 어마어마하다.
때문에 따로 피해 감소가 중첩되지 않더라도, 베리어의 내구도를 전부 깎아 내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데 여기에 어둠 피해 50퍼센트 감소까지 가미된다면, 그 동안은 무적 실드나 다름없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밀려드는 어둠의 군단을 응시하며, 이안이 엘카릭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잘 부탁한다, 엘.”
이안의 손길을 느낀 엘카릭스가 휙 고개를 돌려 이안을 응시했다.
그리고 한쪽 눈을 찡긋 했다.
“물론이죠, 아빠. 이 엘이만 믿으시라구요.”
* * *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세미는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등에는 노트북이 들어 있는 묵직한 가방도 메어져 있었으며, 스마트폰으로는 계속 뭔가를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등교하는 대학생의 모습.
연신 스마트폰을 두들기는 세미는,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듯했다.
-다들 어디쯤 왔어?
-난 지금 과실 도착.
-난 3분 남았음!
-나도 3분!
-난 아까부터 와 있었다고.
세미가 메시지를 보낸 곳은, 과 친구들끼리 만들어 놓은 단체 메신저 룸.
연이어 올라오는 학우들의 메시지를 본 세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팀플할 때도 이렇게 빨리 좀 모이지……. 이럴 때만 시간 약속 칼같이 지킨단 말이야.”
또각또각.
학교로 향하는 세미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가상현실과 건물의 후문에 도착한 세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잠시 멈춰 서 두리번거렸다.
“언니는 어디쯤 왔으려나…….”
기다리는 ‘언니’라는 사람에게 전화하기 위함인지 세미는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기다렸던 목소리가 세미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세미, 오랜만이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세미는,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소진 언니, 오랜만이에요!”
* * *
오늘 세미와 친구들이 학교에 모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들은 로터스 길드의 영상 편집 담당인, 업로더 ‘소진’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이다.
“고마워, 세미야. 주말에 날 위해서 학교까지 나와 주고.”
“아니에요, 언니. 이안느님의 신상 영상을 미리 볼 수 있다는데, 이 정도야 수고도 아니죠.”
지난 밤, 소진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다행히 사무실은 비어 있어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장비가 홀라당 다 타 버린 것이다.
컴퓨터에 들어 있는 자료들도 전부 웹상에 업로드가 되어 있었기에 문제는 없었지만, 당장에 작업해야 할 공간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동네에 있는 PC방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PC방에서 작업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영상미를 최대한 살려 내려면 최고의 퀄리티로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고사양의 pc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여 소진이 생각해 낸 것이, 가상현실과에 있는 컴퓨터실이었다.
한국대학교의 명성에 걸맞게, 고사양의 컴퓨터들이 설치되어 있는 가상현실과의 컴퓨터실이라면, 아쉬운 대로 작업이 가능할 것 같았던 것이다.
소진은 유현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요청했고, 전쟁을 치르느라 바쁜 유현 대신에 과대인 세미가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다.
세미가 과 사무실에 허락을 받고, 일요일 하루 컴퓨터실을 개방하기로 한 것이다.
소진은 유현과 진성을 만나기 위해 가상현실과에 자주 들락거렸고, 때문에 과의 다른 학생들과도 안면이 있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이것이 주말에 세미가 등교한 사건(?)의 전말이었다.
위이잉-!
컴퓨터들을 켜 작업물들을 세팅하며, 소진이 빙긋 웃었다.
“얘들아, 고마워. 있다가 이 언니가 맛있는 거 쏠게.”
“오우, 신난다!”
“언니, 난 피자가 좋아요.”
“아냐, 난 치킨.”
소진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치킨 피자 둘 다 시키지 뭐.”
“크, 역시! 소진 누나 클라스!”
신이 나서 시끌벅적 떠들던 가상현실과의 학생들은, 곧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조용히 스크린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세팅이 전부 끝나자, 스크린에서 이안의 영상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화면을 본 소진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으, 벌써 전투가 많이 진행됐네. 부지런들도 하군.”
프로그램 세팅을 마친 소진은, pc를 이용해 카일란에 접속을 시도하였다.
이안의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수정구’에 접속하는 것이다.
단순히 영상 촬영을 위해 수정구에 접속하는 것은, 캡슐이 없어도 가능했다.
“오, 황실기사단이다!”
“오오, 정말이네! 저거 루스펠 제국 문양 아니야?”
“맞아. 뇌옥에서 구출했나 봐!”
신이 나서 떠드는 가상현실과의 학생들.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의 주변에 세 개의 수정구가 두둥실 떠올랐다.
* * *
“빡빡이, 귀룡의 포효!”
캬아오오오-!
이안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빡빡이의 입이 쩍 벌어지며 커다란 포효가 뿜어져 나왔다.
‘도발’과 ‘둔화’효과가 있는 빡빡이의 광역 cc기가 발동한 것이다.
쿵- 쿵-!
그러자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물량의 투사체들이 빡빡이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을 본 훈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안에게 물었다.
“형, 빡빡이 무적 스킬 쿨 아직 안 돌아오지 않았어?”
“걱정 말고 캐스팅이나 계속해.”
“아, 알겠어.”
전부가 400레벨이 넘는 수많은 언데드 몬스터들의 집중 공격.
아무리 생명력이 수백만인 빡빡이라 하더라도, 이 모든 공격이 집중된다면 순식간에 생명력이 바닥날 수밖에 없다.
-소환수 ‘빡빡이’의 생명력이 279,809만큼 감소합니다.
-소환수 ‘빡빡이’의 생명력이 498,109만큼 감소합니다.
물론 레비아가 집중적으로 힐을 넣어 주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빡빡이의 생명력 게이지는 순식간에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차올랐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며 큰 폭으로 출렁이는 빡빡이의 생명력 게이지.
그리고 빡빡이의 생명력이 3분의 1까지 떨어졌을 때, 이안이 유신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유신, 준비됐지?”
“오케이!”
이안의 말을 듣자마자 양팔을 교차시킨 유신이 빡빡이를 향해 힘차게 뻗었다.
“전사의 투혼!”
이어서 빡빡이의 머리 위에, 황금빛의 방패 모양이 번쩍이며 떠올랐다.
후우웅-!
-파티원 ‘유신’이 소환수 ‘빡빡이’에게 ‘전사의 투혼’ 스킬을 사용하였습니다.
-소환수 ‘빡빡이’에게 1분 동안 누적된 피해의 30퍼센트만큼을 일시에 회복합니다.
-소환수 ‘빡빡이’로부터 강력한 전사의 힘이 뿜어져 나옵니다.
-주변의 모든 적들에게, 소환수 ‘빡빡이’가 회복한 생명력만큼의 피해(3,679,809)를 돌려줍니다.
콰쾅- 콰콰쾅-!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빡빡이를 중심으로 강력한 황금빛의 파동이 퍼져 나갔다.
콰콰콰-!
유신이 가진 무도가 클래스의 스킬 중, 최고 티어의 스킬인 ‘전사의 투혼’.
깔끔한 타이밍에 전사의 투혼이 발동되었고, 금방이라도 사망할 것만 같았던 빡빡이의 생명력은 다시 100퍼센트까지 차올랐다.
300만에 육박하는 광역 피해량은 덤이었다.
“크아악!”
“뒤로 물러서!”
물론 300만이라는 피해가 고스란히 들어가지는 않는다.
공격받는 대상의 방어력에 따라, 제각각 다른 피해가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방어력이 약한 스켈레톤 아처들의 경우에는 버텨 낼 수 없는 대미지였다.
-‘스켈레톤 워리어’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스켈레톤 아처’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생각지 못했던 광역피해에 당황했는지, 언데드들은 한 발 뒤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깎여 나갔던 언데드들의 생명력은, 금방 다시 회복되었다.
리치 메이지들의 회복 스킬들이 워낙에 탁월한 계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완벽한 타이밍에 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피해를 입히지 못한 전사의 투혼.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안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좋아, 제대로 걸렸어……!’
이안의 두 눈이 반짝인다.
그 시선이 머문 곳에는, 언데드들의 뒷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뒤쪽에는, 언제 움직였는지 카카가 허공에 떠 있었다.
포롱포롱 날갯짓하며 언데드들을 내려다보는 카카.
카카와 눈이 마주친 이안이 손을 번쩍 하고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