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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길 (1)
“마스터, 보고드립니다.”
“말해 봐, 에밀리.”
“방금 세일론으로부터 레프론 왕성 점령에 성공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렇군. 이로서 첫 번째 정복 전쟁은 마무리된 건가?”
“그렇습니다. 왕성 뒤쪽에 남작령급 영지가 두어군데 남아 있기는 하나, 앞으로 이틀이면 정리될 겁니다.”
“그렇겠지.”
로터스 왕국이 콜로나르 대륙 동부의 패자라면, 서부에는 그에 필적할 만한 힘을 갖춘 타이탄 왕국이 있다.
길드 랭킹 또한 로터스와 1,2위를 엎치락뒤치락 할 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타이탄 길드.
사실 2~3개월 전만 하더라도, 타이탄 길드는 로터스에 제법 뒤쳐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성장세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더니, 길드 포인트가 로터스를 앞질러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타이탄 길드는,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로터스 길드를 어떻게 따라잡은 것일까?
그것에 대한 답은 바로, 주변 환경에 있었다.
타이탄 길드가 왕국을 세운 위치의 입지가, 로터스에 비해 많이 유리했던 것이다.
‘서남부에 자리를 잡은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어.’
현재 콜로나르대륙의 북동부에는, 샬리언의 영향으로 인해 강성한 세력을 갖춘 왕국들이 즐비했다.
현재 로터스 왕국이 전면전을 펼치고 있는 엘리카 왕국부터 시작해서, 그 동쪽과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카룬과 라마리스왕국까지.
그 왕국 하나하나가 로터스나 타이탄에 필적할 만큼 강력한 세력을 가진 왕국들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리치킹의 퀘스트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서남부에는, 비교적 약소국들이 포진되어 있다.
덕분에 타이탄 길드는 신나게 정복 전쟁을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길드 포인트를 가장 많이 올릴 수 있는 콘텐츠가 바로 정복 전쟁이었다.
영지의 숫자가 하나 늘어나는 것만큼, 길드점수가 많이 올라가는 것은 없었으니 말이다.
샤크란이 에밀리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밀리, 현재 로터스의 정복 전쟁 상황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됐지?”
샤크란의 물음에 에밀리가 곧바로 대답하였다.
로터스왕국과 관련된 정보는 언제나 일 순위였기에, 길드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관리하는 그녀로서는 기계처럼 대답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산술적인 비율로 계산하자면 절반 정도 진행이 됐어요.”
“산술적? 그게 무슨 의미지?”
“그러니까, 엘리카 왕국을 구성하는 총 서른여덟 곳의 영지 중, 로터스에서 정확히 열아홉 곳을 수복하였다는 이야기죠.”
“그냥 절반이라고 하면 되지 굳이 ‘산술적’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를 묻는 거야.”
“그것은…….”
잠시 뜸을 들인 에밀리가 지도의 한쪽을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과 이곳. 라타펠 영지와 엘리카 왕성 등 뚫기가 무척이나 난해한 요새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음?”
“특히 라타펠 영지는…… 어지간한 공작령 이상의 방어력을 갖추고 있죠.”
“그러니까 남아 있는 영지들의 방어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실질적인 진척 상황은 절반 이하라는 이야기군.”
“그렇습니다, 마스터. 절반은커녕 전 3할 정도라고 보고 있어요.”
“흐음, 이것 참 희소식이로군.”
로터스의 성장이 정체되어 있다는 것은, 타이탄 길드의 입장에서 그 무엇보다도 반가울 수밖에 없는 호재였다.
로터스 말고는 딱히 타이탄 길드에 견줄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로터스가 정체되어 있는 동안 최대한 빨리 세력을 확장시켜 ‘제국’선포의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지금의 타이탄 길드에게는 급선무라 할 수 있었다.
‘제국 콘텐츠만 선점한다면, 다시 로터스와 차이를 벌릴 수 있겠지.’
인벤토리를 열어 옥새를 꺼낸 샤크란이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왕국 콘텐츠를 선점한 것은 로터스가 먼저였지만, 제국 선포를 가장 먼저 하는 길드는 타이탄이 될 것이었다.
모든 정황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 * *
로터스 왕성의 꼭대기에 자리한, 화려한 왕의 집무실.
그리고 그 왕좌에는 한 사내가 앉은 채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남자의 이름은 이안이었다.
-‘왕좌의 권능’ 효과가 발동합니다.
-피로도가 0.5만큼 회복됩니다.
-포만감이 0.2만큼 회복됩니다.
(중략)
-‘왕좌의 권능’ 효과가 발동합니다.
-피로도가…….
이안의 시야 한쪽 구석에 일정 간격으로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들.
왕좌의 권능은 일국의 ‘왕’에게만 주어지는 소소한 특권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안은 이것을 종종 애용했다.
‘졸릴 때 앉아서 피로도나 회복시키면 꿀이라니까.’
카일란에서 피로도는 컨트롤 ‘감도’에 영향을 준다.
즉, 캐릭터가 유저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반응 속도와 같은 개념인 것이다.
‘피로도’는 그 존재조차 아예 느끼지 못하는 유저가 있을 정도로 게임 플레이에 미미한 영향을 주는 콘텐츠였으나, 이안과 같은 랭커들에게는 달랐다.
약간의 반응 속도 차이가 크게는 생사를 좌우하기도 하고 작게는 사냥속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해서 랭커들은, 제법 가격이 나가는 소모품들임에도 불구하고 피로도를 회복시켜 주는 음식이나 포션을 항상 구비해서 다녔다.
때문에 10분 정도면 피로도와 포만감을 전부 회복시켜 주는 이 왕좌의 권능 효과는, 은근히 쏠쏠한 이득을 주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안이 이 왕좌에 앉아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하아암.”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한 이안이,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그는 지금 이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은데…….”
적어도 카일란 안에서만큼은 시간 약속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안이었다.
그리고 이안의 중얼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헉, 헉. 다행히 늦지는 않았군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내.
염색이라도 한 것인지 샛노란 머리를 한 남자를 보며, 이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늦지 않았다니. 늦었거든?”
“에? 약속은 2시 정각 아니었습니까?”
“정확히 25초 늦었어.”
“…….”
따끔하게 핀잔을 준 이안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의 중앙에 있는 테이블 앞으로, 남자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앉아. 다음부턴 늦지 말고.”
“예? 예…….”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자리에 앉는 남자는 다름아닌, 로터스 전속의 BJ인 라오렌이었다.
‘후우, 그렇게 갑자기 불러 놓고 25초 늦었다고 핀잔이라니…….’
라오렌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감히(?) 이안에게 그 속내를 내 보일 용기는 없었다.
물론 반발한다고 해서 이안이 해코지를 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돈줄이 끊어질 뿐.
이안과 로터스의 전속 BJ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 정도의 핀잔쯤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불만 따위는 1초 만에 잊어버린 라오렌이 두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형님, 오늘은 또 어쩐 일이신지요.”
이안이 이렇게 개인적으로 부를 때면, 백이면 백 좋은 일이 있기 마련이었다.
가령 채널 구독자 숫자가 1.5배 증가한다던가 하는, 그런 좋은 일 말이다.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딜 하나 하자, 오렌아.”
“딜…… 말입니까?”
라오렌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되었다.
이안은 어지간한 콘텐츠를 들고 오지 않는 이상, ‘딜’이라는 단어를 쉽게 꺼내지 않는다.
이안이 이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딜’이라는 말을 꺼냈다는 것은, 생각보다 거물급 콘텐츠를 물어 왔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래, 딜이다.”
“……!”
말을 마친 이안이, 인벤토리에서 두 장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카일란의 계약서’ 아이템을 오픈합니다.
LB사가 공증해 주는, 법적 효력이 있는 계약서.
두 장의 계약서를 라오렌에게 넘긴 이안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A, B. 둘 중 하나 골라서 도장 찍어.”
“……!”
그리고 잠시 후, 이안으로부터 계약서를 받아 든 라오렌의 동공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계약서의 내용은 무척이나 간단했기 때문에, 읽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라오렌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거 0하나 잘못 붙이신 거 아니죠, 행님?”
“그럴 리가. 형 계산 철저한 거 모르냐.”
“알죠.”
“정확히 5천만 골드. 뒤에 붙어 있는 0은 총 일곱 개다.”
“……!”
라오렌은 손에 들린 두 장의 계약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A : 계약금 50,000,000골드/수익 배분 0:100
-B : 계약금 0골드/수익 배분 30:70
글자 자체는 간단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간단하지 않은 두 장의 계약서.
라오렌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5천만 골드면, 대체 얼마야? 지금 골드 시세가 일만 골드 당 1만2천 원 정도니까…….’
당장 A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무려 현금으로 6천만 원이 앉은 자리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안과의 계약에서 벌었던 돈이 최대 1천5백만 원 정도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분명 엄청난 딜이었다.
반면에 B계약서의 경우, 오히려 지금까지의 계약 조건보다 더 나쁜 조건이었다.
라오렌이 이의를 제기했다.
“형 B계약서는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평소보다 비율이 15%나 낮잖아요.”
“그렇지.”
“A계약서에 비해 조건이 너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내가 가져온 콘텐츠가 평소보다 훨씬 좋으니까, 당연히 비율이 조정되는 거지.”
“음……!”
이안의 말이 억지라고 반론하기에는, 본인이 직접 내건 A계약서의 조건이 너무도 좋았다.
이안이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콘텐츠의 내용이 좋지 않은데 수익금을 전부 가져가겠다고 ‘5천만 골드’ 라는 거금을 내걸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라오렌의 머릿속에서는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거 안전하게 A로 가는 게 맞는 건가……. 아니면 도박 한번 걸어 봐?’
라오렌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수지타산을 열심히 계산했다.
이안은 눈을 감은 채 그의 결정을 기다렸고, 라오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 혹시 힌트라도 좀 주시면 안 됩니까?”
“무슨 힌트?”
“가령 이번 방송에 타이틀로 띄울 만한 ‘가제목’이라든가…….”
하지만 이안은 감은 눈을 뜨지도 않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놉. 그러면 재미없지.”
“……!”
“네가 계약서 도장 찍는 순간, 곧바로 콘텐츠 오픈한다.”
그리고 잠시 후, 라오렌은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채 A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후, 그래 쓸데없이 도박하지 말자 라오렌. 지난번에도 저 형한테 한번 속았잖아.’
사실 라오렌은 두 장의 계약서를 받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다만 이 정도의 극단적인 계약서가 처음이었을 뿐.
나름의 도박(?)도 몇 번 해 봤지만 항상 실패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안전하게 5천만 골드를 택한 것이다.
‘그래, 이번에는 저 형 꼬임에 넘어가지 않겠어! 5천만 골드만 해도 충분히 대박이잖아?’
떨리는 손으로 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집어든 라오렌이 그것을 이안에게 건네었다.
이어서 그것을 받아 든 이안이, 계약서의 상단에 콘텐츠의 타이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슥- 스슥.
일필휘지로 계약서의 상단을 채우는 이안의 손길.
그런데 마른침을 삼키며 그것을 지켜보던 라오렌의 두 눈이, 점점 확대되었다.
-켠 김에 엘리카 왕성까지./영지 19개 점령 24시간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