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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카치오 왕성의 전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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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할 수 있는 보름에 걸친 여정에, 드디어 마침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험난한 과정을 무사히 지나서, 에피소드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는 ‘죽은 자들의 왕’ 샬리언만을 남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 여정은 원정대에 참여한 유저들만의 여정이 아니었다.
이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수많은 카일란의 유저들이 동고동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많은 이들이 거의 모든 방송을 빠짐없이 챙겨 보았으며, 진심으로 원정대의 랭커들을 응원하였다.
시청자들은 원정대가 위험에 빠졌을 때는 함께 긴장하였으며, 극적으로 위기를 극복할 때에는 마치 본인들의 일처럼 기뻐하였다.
실제 카일란에서는 초보 유저일지라도 방송을 보는 동안 만큼은 마치 원정대의 일원이 된 것 같았으니까.
때문에 에피소드의 진행이 다이내믹할수록 시청자들은 더욱 행복하였다.
그런데 사실, 시청자들보다 더욱 행복에 겨운 이들은 따로 있었다.
“캬, 김 대리, 오늘도 회식 어때? 길 건너에 지난달에 생긴 한우 집, 맛이 아주 기가 막히던데 말이야. 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는 게……!”
“콜입니다, 팀장님! 제작국이랑 보도국에도 연락 한번 넣어 볼까요?”
“그거 좋지! 보도국 애들, 야근 때문에 지난번 회식 때 끼지도 못했었는데, 연락하면 아주 좋아하겠네.”
“결제는 법카……. 맞죠?”
“이 사람이 그걸 말이라고! 시청률이 이만큼 터졌는데, 법카 일이백 긁는다고 국장님께서 뭐라 하실 리 없잖나.”
“으흐흐, 좋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번 에피소드를 거의 독점적으로 방송한 YTBC의 직원들이었다.
이번 이안의 원정대 방송이 게임 방송 역사상 전무후무한 시청률 기록들을 세웠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청률 지표들 중 ‘순간 최고 시청률’이라는 하나의 지표 빼고는 전부 갈아치워 버린 것.
게다가 아직까지 리치 킹과의 전투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YTBC에서는 순간 최고 시청률 기록까지도 경신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 방송과 관련된 YTBC의 모든 직원들은 보너스를 두둑이 받았고, 사내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했다.
그리고 이 YTBC의 직원들 중에도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인물이 있었으니…….
YTBC의 경영국, 광고사업부 1팀의 팀장인 유재웅이었다.
“그나저나 팀장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차장으로 승진하실 예정이라는 말 들었습니다.”
“후후, 고맙네.”
“그런데 대체 이안갓을 무슨 수로 섭외하신 겁니까? 게임 내 메신저는 전부 차단되어 있고, 길드 통해서 연락 넣어 봐도 항상 퀘스트 때문에 바쁘다는 회신만 오던데요. 저도 비법 좀 알려 주시죠.”
“하하, 그냥 운이야 운. 운이 좋았을 뿐이지.”
“에이, 너무하십니다, 팀장님. 후배한테도 길을 좀 알려 주셔야죠.”
유재웅은 마치 겸손을 떨 듯, 부하 직원의 물음에 대답 않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는 그의 말은 결코 겸손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사실이었으니까.
이안과 커넥팅해서 방송을 따온 것이 그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가 먼저 이안을 찾아간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단지 이안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 우연히 그 전화를 받은 것이 그였을 뿐이었다.
‘휴, 그때 마침 팀 사무실에 나밖에 없었던 게 행운이었지.’
음흉한 미소를 지은 유재웅의 시선이 사무실을 한번 훑고 지나갔다.
팀의 부하 직원들은 회식이라는 말에 신이 나서 가방을 싸고 있었으며, 사무실 내 커다란 스크린에는 지금도 원정대의 방송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사무실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원정대 방송이 송출되고 있는 화면에 고정되었다.
화면에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불쌍한 녀석, 내가 다음에 너한텐 밥 한번 거하게 사마.’
유재웅의 시선에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하인스.
지금 사내에서 가장 고생하고 있는 직원이 바로 하인스일 것이었다.
화면 안에서 목이 터져라 해설하는 하인스가 어쩐지 안타까운 재웅이었다.
* * *
수많은 언데드 군단을 몰살시킨 이안의 원정대는, 그 뒤에도 많은 난관을 거쳐야 했다.
강력한 어둠의 결계로 만들어진 함정들도 통과해야 했으며, 샬리언의 직속 수하인 듯 보이는 초 고레벨의 네임드 보스들도 처치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지나왔던 난관들의 난이도가 얼마나 높았으면 그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쉬워 보일 지경이었다.
결과적으로 원정대는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원정대원의 희생만으로 팔카치오 왕성 내부까지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팔카치오 왕성 안에 들어선 원정대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띠링-!
-강렬한 죽은 자들의 기운이 엄습합니다.
-어둠 속성 저항력이 10만큼 감소합니다.
-마법 방어력이 5%만큼 감소합니다.
-‘공포’상태 이상 저항력이 20만큼 감소합니다.
-‘어둠 제국의 황성’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던전을 최초로 발견하셨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획득하는 모든 경험치가 2배로 적용됩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모든 종류의 아이템과 골드 드롭률이 두 배로 상승합니다.
-명성이 30만만큼 증가합니다.
(중략)
-에피소드의 최종 보스 리치 킹 샬리언과 조우하였습니다.
잠깐 사이에 시야를 가득 메우는 수많은 시스템 메시지들.
원정대의 유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긴장된 표정이 되었다.
길고 길었던 에피소드의 끝자락을 드디어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들의 눈앞에는 리치 킹 샬리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의 권역에 발을 들였다는 건, 망자亡者가 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겠지.”
음습하고 사이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던전의 내부에 울려 퍼졌다.
이어서 원정대 유저들의 시야에 시커먼 망토를 휘날리며 허공에 떠 있는 샬리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야말로 좌중을 압도하는, ‘죽은 자들의 왕’ 리치 킹의 위용.
유저들은 잔뜩 긴장한 채, 서둘러 본인들의 상태를 점검하였다.
리치 킹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지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어떤 보스 몬스터보다도, 샬리언이 강력할 것이라는 것.
원정대의 선두에 서 있던 이안이 천천히 샬리언을 향해 걸어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안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행동이었다.
에피소드의 달성율과 공헌도가 가장 높은 유저가 바로 이안이었고, 때문에 이안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었으니 말이다.
던전 내의 모든 유저들은 AI에 의해 통제받기 시작하였고, 에피소드의 마지막 스토리가 진행되었다.
고오오오-!
커다란 공명음과 함께 샬리언의 주변으로 새카만 어둠의 기운이 퍼져나갔다.
이어서 이안의 앞으로 샬리언의 신형이 떨어져 내렸다.
일반적인 사람보다 족히 세 배는 커다란 몸집을 가진 리치 킹 샬리언.
그의 거구가 땅에 떨어지자 묵직한 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쿠웅-!
그리고 이안과 샬리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샬리언의 입에서 칼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후후, 겁도 없이 나의 권능에 도전한 인간이 바로 네놈이었군.”
이어서 이안의 입이 천천히 떨어졌다.
“죽은 자들의 왕이여, 나를 기억하는가?”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이 된 샬리언은 허리를 숙여 이안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물론이다. 나는 이미 한계를 초월한 존재. 죽은 자들의 왕이 된 이후, 나는 망각하는 방법을 잊었으니까.”
“그것 참 안타까운 이야기로군. 망각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선물인데 말이야……. 아니, 그대는 ‘망각’뿐 아니라 수많은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들을 잃어버렸겠지.”
“축복이라…….”
“행복, 사랑, 즐거움. 네게는 이러한 감정들이 남아 있는가?”
이안의 반문에, 샬리언의 한쪽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웃음 지은 듯한 샬리언의 표정이었지만, 그 안에는 강렬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나는 생전에도 그러한 감정들을 ‘축복’이라 느껴 본 일이 없다.”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후후,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것이 ‘영생’보다 가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이를 악물며 묻는 샬리언과 이안의 시선이 다시 한 번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이어지는 잠깐 동안의 정적 후 이안은 다시 묵묵히 입을 열었다.
“행복할 수 없다면, 사랑할 수 없다면…….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째서 그렇지?”
“지금 여기 있는 내가 그리고 나의 뒤에 있는 우리 모두 중 그 누구도……!”
“……?”
“그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노옴!”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샬리언이, 오른손에 쥔 거대한 묵빛의 지팡이를 있는 힘껏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아앙-!
이어서 샬리언의 지팡이로부터 강렬한 어둠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콰콰콰콰!
그리고 그 기운에 휩쓸린 원정대의 유저들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며, 각각 반 보步 이상 뒤로 밀려나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바로 앞에 있었던 이안이 가장 큰 대미지를 받았다.
“크윽!”
단 한 번의 공격에, 절반도 넘는 양이 뭉텅이로 잘려 나간 이안의 생명력 게이지.
하지만 자신의 캐릭터를 관조하는 중인 이안은,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샬리언이 뿜어낸 방금의 기운은, 이안이 아니라 그 누가 맞았더라도 같은 비율만큼의 생명력이 소모되었을 테니 말이다.
‘아마 60퍼센트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것 같은데…….’
카일란에서는 결코 AI가 유저를 통제하는 중에 입는 대미지 때문에 유저가 사망에 이르게 만들지 않는다.
때문에 지금처럼 AI의 통제 하에 스토리가 진행될 때는,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안은 샬리언의 공격에 놀라는 대신 진행되는 스토리의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또, 그와 동시에 던전 내부의 구조를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샬리언과의 대화가 진행되는 지금이 안전하게 던전 내부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 말이다.
‘전체가 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구조로군. 돔 치고는 뾰족하게 높은 것 같기도 하고……. 던전의 중심부는 조심해야겠어. 함정이 있기 딱 좋은 모양새야.’
그리고 이안의 머릿속이 분주하게 회전하는 사이, 이안의 AI와 리치 킹의 대화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역시, 그때 네놈을 살려 두는 것이 아니었다. 마계에서 네 녀석을 죽였어야만 했어.”
“마치 살려 ‘준’ 것처럼 말하는군. 살려 준 것이 아니라, 죽이지 ‘못한’ 것이 아니던가.”
“클클, 자만하지 말라 인간. 나는 당시 네놈을 죽이려면 얼마든 죽일 수 있었다. 다만, 나의 봉인을 풀어 준 대가로 끝까지 쫓지 않았던 것일 뿐.”
“그렇다면 우린 서로, 한 번씩 실수를 한 셈이 되었군. 나는 실수로 봉인되어 있던 네놈을 풀어 주었고, 네놈은 실수로 나를 살려 두었으니 말이야.”
“크하하핫, 잘도 가져다 붙이는군.”
“사실을 말했을 뿐.”
둘 사이에 또 다시,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이어서 샬리언의 전신에서 강렬한 어둠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좋다, 인간. 그렇다면 그 실수, 지금 이 자리에서 만회해 보도록 하지.”
샬리언에 이어 이안 또한 허리에 꼽혀 있던 붉은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쥐 죽은 듯 고요한 던전의 한복판에, 날카롭고 예리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림롱으로부터 노획한 명검 블러디 리벤지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샬리언. 마왕에게 속아 네놈의 봉인을 풀어 주었던 그날의 실수, 이 자리에서 만회하도록 하마.”
샬리언은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으며, 이안은 다시 원정대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에피소드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