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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문명의 발견 (5)
* * *
랄프와 체스크. 그리고 이니스코와 같은 채팅방에 접속되어 있는 뮤엘은, 무척이나 마음이 불편했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들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이안 일행을 사지로 몰아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랄프 : 게이트 넘어 세 번째 동굴이었나?
-이니스코 : 맞아, 형.
-랄프 : 그 골렘 같이 생긴 녀석이 구슬 지키고 있었지?
-체스크 : 맞아. 그 녀석만 최대한 빨리 제거하고 구슬 가져다가 마지막 게이트 열면 돼.
-랄프 : 좋아, 좋았어.
-체스크 : 그럼 마지막 여섯 번째 동굴에 이안 일행 보내놓고, 우린 구슬 들고 뛰면 되는 거지?
-이니스코 : 그렇지.
-체스크 : 확실히 랄프가 잔머리는 잘 돌아간다니까. 이렇게 하면 우리가 그 괴물 놈을 만날 일은 없겠어.
사실 뮤엘이라고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간계의 새로운 콘텐츠들을 처음 선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 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콘텐츠라 할지라도, 소수의 인원이 독식할 때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만약 이안 일행이 경쟁 길드였더라면, 평소에 적대관계에 있는 길드원이었더라면, 큰 거리낌 없이 이들의 계획에 동참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안 일행은 아니다.
‘저들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건…….’
뮤엘은 지금 이안 일행을, 한 300레벨 후반 정도.
랭킹으로 치면 500~1000등 정도 되는 수준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즉, 사제 클래스 10위권인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 딱히 경쟁 상대도 아닌 것이다.
게다가 순수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이안 일행을 함정에 빠뜨릴 생각을 하니, 죄책감도 생겨났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뮤엘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길드의 이해관계 때문에 다른 일행을 배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안 일행에게 피해는 가지 않도록 해 볼 생각이었다.
‘내가 조금 손해 보면 되지 뭐.’
그리고 뮤엘이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드디어 첫 번째 어비스 게이트가 눈앞에 나타났다.
“자, 여기부터가 진짜다. 다들 준비됐지?”
랄프의 말에 모두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고, 이안을 필두로 한 일행은 게이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마치 신기루처럼 이안 일행은 시커먼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게이트에 입장하자마자, 이안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띠링-!
-어비스 게이트를 통과하였습니다.
-지금부터 모든 어비스의 힘이 더욱 강력하게 증폭됩니다.
-지금부터 모든 시온의 힘이 더욱 강력하게 증폭됩니다.
그리고 랄프가 미리 언질했던 것처럼, 새로운 퀘스트가 하나 발동되었다.
-바람이 더욱 거세집니다.
-‘돌풍의 협곡’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돌풍 속으로’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돌풍 속으로 (에픽)(히든)’
과거 심연의 계곡은, 심연의 정령들이 지내던 아늑하고 안전한 공간이었다.
정령계에서도 그 어느 곳보다 아늑하고 순도 높은 정령력을 느낄 수 있는 심연의 계곡은, 심연의 정령뿐 아니라 수많은 정령들의 안식처였던 것이다.
하지만 기계문명의 침략 이후, 심연의 계곡은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
계곡에 머물던 대부분의 정령들은 오염되었으며, 아늑한 공간이었던 계곡은 적들을 막아 내기 위해 요새화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결국에는 이 심연의 계곡마저도 전부 기계문명에 잠식당해 버렸으니, 이제 이곳에는 오염된 정령들뿐이 남지 않았다.
자, 용감한 당신들은, 오염된 정령들을 물리치고 어비스 게이트를 찾아내었다.
이제 이 돌풍의 협곡 어딘가에 있는 심연의 보주를 찾아 북쪽에 있는 제단에 가져간다면, 오염된 심연의 계곡을 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계곡이 정화되면, 막혀있던 북쪽의 길이 열릴 것이다.
보주를 찾아 계곡을 정화한 뒤, 북쪽의 길을 따라 정령의 성소로 가자.
정령의 성소에 있는 수호자 ‘샬론’을 찾아간다면, 그가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할 것이다.
퀘스트 난이도 : C+
퀘스트 조건 : 어비스 게이트를 발견한 유저.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 ‘심연의 파수꾼’ 칭호 획득, ???
*퀘스트 진행시간이 1분 지날 때마다 몬스터 리젠 속도가 10퍼센트 만큼씩 빨라집니다.
*거절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퀘스트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스토리 자체는 제법 길었지만, 요지는 딱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심연의 보주를 찾아서 저기 보이는 제단에 가져가면 된다는 거네.’
이안의 시선이 전면에 멀찍이 보이는 높다란 제단을 향했다.
보랏빛의 아지랑이가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신비한 분위기의 웅장한 제단.
제단의 중심부에는 둥그런 홈이 움푹 파여 있었고, 누가 봐도 그곳은 구슬을 올려놓으라고 만들어 둔 자리였다.
이어서 이안의 시선이 맵 전체를 빠르게 훑었다.
‘제단의 주변으로, 동굴 같은 게 여섯 개 정도 보이는 것 같고…….’
북쪽에 높게 솟아있는 심연의 제단.
그리고 그 제단의 양옆, 높다란 절벽에 뚫려 있는 여섯 개의 동굴.
‘저 동굴을 뒤져서 구슬을 찾아야 하는 거겠지.’
퀘스트를 전부 이해한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퀘스트의 내용만 봐서는 일반적인 던전에 있는 인스턴트 퀘스트들과 큰 차별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특별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몬스터의 리젠 속도가 빨라진다는 부분이었다.
‘사실상 이게 시간 제한이나 다름없지 뭐.’
아무리 이안이라 하여도, 무한대로 솟아나는 몬스터의 향연은 버텨 내기 힘들다.
이 퀘스트는 결국 최대한 빨리 클리어하는 게 관건인 것이다.
그리고 이안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퀘스트는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돌풍 속으로 (에픽)(히든)’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경과 시간 : 00:00:01
이안은 게이트에 들어서기 전, 랄프가 했던 이야기들을 한번 떠올려 보았다.
* * *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잘 들어야 돼.”
“얘기해 봐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린 이미 여기 와 본 적이 있어. 서리동굴 쪽으로 가기 전, 여길 먼저 트라이했었으니까.”
“네, 그랬다고 했었죠.”
“이 게이트 안에 들어가면 총 여섯 개의 동굴이 있는데, 그중 한 곳에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는 열쇠가 있어.”
“네.”
“그리고 우린, 그 중 왼쪽에 있는 두 곳에 들어가 봤지.”
“거기서 구슬을 못 찾았나 보죠?”
“빙고.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친구라 이해가 빠르군.”
“계속해 봐요.”
“예상했겠지만,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우린 세 번째 동굴부터 뒤지기 시작할 거야.”
“당연히 그래야겠죠.”
“그래. 그런데 팀을 둘로 나눌 생각이야. 우리 넷이 한 팀, 너희 셋이 한 팀을 꾸려서, 우린 세 번째 동굴부터 들어가고 너흰 마지막 동굴부터 들어가는 거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요.”
“좋아, 그럼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너희 셋은 왼쪽으로 달리면 돼.”
“그러도록 하죠 뭐.”
처음부터 이안은, 랄프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랄프가 나쁜 놈처럼 보여서가 아니라, 콘텐츠 선점을 위한 배신은 일반 유저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안은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후후, 쉽게 당해 줄 생각은 없다고.’
랄프가 이안에게 했던 오더는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던전의 클리어 타임을 단축시키기 위해, 두 팀으로 나눠서 구슬을 찾으러 간다는 발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오더에서 이안은, 어떤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일단 팀 구성부터가 잘못되었어.’
현재의 파티 일곱 명을 가장 효율적으로 나누기 위해선, 랄프 일행과 이안 일행이 섞여서 나뉘어야 한다.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겉으로는 랄프 일행의 랭킹이 훨씬 높다는 전제가 깔린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파워 밸런스가 안 맞기 때문이었다.
‘섞이진 않더라도, 최소 우리 쪽이 네 명으로 구성되어야 밸런스가 맞지.’
겉으로 드러낸 전력만으로 봤을 때는, 이안과 쌍둥이 자매의 전력은 랄프 일행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수준이다.
이안은 물론, 두 쌍둥이자매도 본 실력을 드러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의심스러운 것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만약 랄프가 진짜로 효율적인 오더를 내리려 했다면, 구슬을 찾은 이후의 지침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 줬어야 했어.’
만약 랄프가 아닌 이안이 오더를 내렸더라면, 보주를 먼저 찾은 팀과 찾지 못한 팀의 행동 방향까지도 상세히 말해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랄프는 보주를 찾은 뒤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마치 ‘그 뒤의 상황이 어찌 되든 본인은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수상해. 아주 수상해.’
랄프가 말했던 여섯 번째 동굴로 향하던 이안은 슬쩍 시선을 뒤로 돌렸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통틀어 유추했을 때, 한 가지 결론이 떠오른 것이다.
‘어쩌면 저놈들은, 우릴 여기 버려 놓고 자기들끼리 퀘스트를 깨려는 것일 수도 있겠어.’
거의 확신에 가까운 의심이었지만, 어쨌든 짐작만을 가지고 랄프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의심되는 상황에서 오더를 착실히 따라 주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것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랄프 일행을 떠보는 것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퀘스트를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적아를 확실히 구분해 내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이안은 일부러 움직임을 살짝 늦추며, 랄프 일행을 주시했다.
“이안, 왜 그래.”
“갑자기 왜 멈춰?”
“쉿!”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제스처를 취한 이안은, 슬슬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저들이 세 번째 동굴로 들어가고 나면, 뒤를 몰래 밟아 볼 생각으로 말이다.
차후 랄프가 추궁한다면, 셋만으로 동굴을 뚫는 게 불가능했다 해명하면 된다.
그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안은 계획했던 부분을 완전히 접어야 했다.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
당연히 랄프의 파티와 함께 세 번째 던전으로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던 뮤엘이 이안 일행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안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지? 랄프가 우릴 버리려 했던 게 아닌가?’
뮤엘이 이안의 일행에 합류한다면 이안이 세웠던 가정은 전부 무너져 버린다.
그래서 이안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내 판단이 틀렸다고?’
그리고 이안이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뮤엘은 빠르게 이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세 분이서 진행하기엔 벅차 보여서요. 제가 좀 껴도 괜찮겠죠?”
얼떨떨한 표정이 된 이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