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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역전극 (1)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제는 이안의 한마디가 어떤 의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마군 본진 한복판에 혼자 뛰어 들어온 이안을,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보고 있어야만 하는 상황.
유저들은 이 상황을 만들어 낸 이안에게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아직까지도 마군 진영이 유리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이안의 기세를 꺾지 못하면 뒤집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이안이 방금 보여 준 폭풍 같은 장면은, 세계적인 랭커들마저 압도당할 만큼 어마어마한 수준의 것이었다.
이안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그 분위기와 기세에 압도당한 것이랄까.
이안과 대장군의 눈이 마주친 채,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이 긴장감 넘치는 적막 속에서, 묵직한 하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당연히, 마군진영 대장군의 목소리였다.
미국 서버의 전사클래스 랭킹 1위이자, 마군 진영의 대장군인 카이.
그의 입이 천천히 떨어졌다.
“제법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친구로군.”
카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 안에는, 숨길 수 없는 감탄이 스며 있었다.
이안이 보여 준 한 수는, 그가 보기에도 정말 절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감탄한 이유는 이안의 수 싸움에 한정되는 것일 뿐, 이안의 전투 능력에 감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안의 진정한 실력을 목격한 카이는, 호승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카이가 이안을 얕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의 게임 플레이 성향과 관련 있는 것이었다.
“잔머리라……. 그렇게 표현하면 섭섭하지. 이런 건 잔머리가 아니라 ‘전략’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거라고, 친구.”
씨익 웃으며 받아치는 이안을 보며, 카이 또한 마주 웃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네 녀석과 싸워 보고 싶지만…….”
카이의 시선이 슬쩍 전장의 뒤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는, 천군 진영의 돌격대장 뮈셀이 있었다.
카이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랬다간 저 친구가 가만두지 않을 것 같군.”
“후후.”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 이안.
이안으로서는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마치 이 전장을 통제하는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전장의 이름이 신의 말판이라면, 이안은 지금 그 말들을 움직이는 신이었다.
말판의 모든 말들이, 그가 짜 놓은 판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카이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예상치 못했던 카이의 말에, 이안의 얼굴에 흥미로움이 떠올랐다.
“왜지?”
카이는 씨익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널 공격해서 이겨 봐야, 별로 의미가 없으니까.”
“……?”
“그건 대장군 카이가 기마대 이안을 이긴 것일 뿐……. 내가 널 이긴 건 아니니까 말이지.”
* * *
사실 대장군 카이는, 미국 서버 유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유저였다.
압도적인 전사 클래스 랭킹 1위이기도 하거니와, 자타공인 PVP 최고의 실력자이기 때문이었다.
PVP를 너무 좋아해서, 싸움개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
때문에 미국 서버 유저들은 카이의 이 말들이 진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타 서버 유저들이야 허세처럼 느낄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안 또한, 그의 눈빛에서 진심을 느끼고 있었다.
‘별, 특이한 놈을 다 보겠군.’
카이의 말을 다시 정리해 보자면, 유리한 버프를 받은 상황에서는 싸워 이기는 것이 의미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은, 이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임 내의 직책과 버프, 그리고 발까지도 이안은 그 유저가 가진 실력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특별히 버그를 쓰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안은 ‘이긴 놈이 이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카이라는 인물에 대해 흥미가 동하기는 했다.
어쨌든 한 진영의 대장군이 되었다는 건 분명 그만한 실력이 있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졌을지 기대되는데?’
때문에 이안은, 카이가 원하는 상황을 그대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완벽히 동일한 버프 상태에서의 정면대결.
어차피 카이가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을 만들어낼 예정이었고 말이다.
‘대장군의 버프가 100퍼센트이고, 장군의 버프가 70퍼센트니까…….’
어차피 진급의 한계는 장군이다.
장군 상태에서는 아무리 킬을 많이 먹어도 대장군이 될 수 없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전장에는, ‘선공 버프’라는 추가적인 버프 개념이 있었다.
‘내가 장군 달고 선공 버프까지 먹으면, 얼추 비슷한 스텟 버프로 싸울 수 있겠지.’
이안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전장의 움직임을 다시 주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군 쪽에 유리해 보였던 전장이 이제는 균형을 맞춰 가고 있었고, 때문에 전장은 점점 더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전투가 종료되었습니다.
-천군 진영의 기마대장, ‘이안’유저의 턴입니다.
또다시 이안의 턴이 돌아왔고, 그는 다시 망설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번 턴에는, 적진의 끝까지 직진하여 본진으로 워프 하는 수 외에는 둘 수 있는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전방으로 한 칸 이동하였습니다.
-‘기마대의 질주’ 효과가 적용되어, 공격력이 2퍼센트만큼 상승합니다.
-전방으로 한 칸 이동하였습니다.
-‘기마대의 질주’ 효과가…….
거침없이 의무대장의 옆을 지나, 적진의 마지막 타일을 밟는 이안.
그런데 그 순간…….
“……!”
이안의 두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메시지가, 그의 눈에 떠올랐으니 말이다.
-마군 진영의 마지막 타일을 밟았습니다.
-적진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기마대’의 숨겨진 고유 능력, ‘금의환향’ 효과가 발동됩니다.
-천군 진영의 최후방으로 워프됩니다.
-소모된 모든 생명력이 회복됩니다.
-소모된 모든 스태미너가 회복됩니다.
신의 말판에서 스태미너 수치는, 다른 말로 ‘이동 가능 거리’이다.
다시 말해 ‘금의환향’효과가 발동되면서, 이안의 턴이 또 한 번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속으로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크으, 일이 풀리려니까 이렇게도 풀리네?’
위이잉-!
낮은 공명음과 함께, 이안의 주변으로 황금빛 물결이 솟아올랐고.
척-!
그와 동시에.
이안의 신형은 다시, 천군 진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전방 세 칸 앞에, 아주 익숙한 얼굴이 이안의 눈에 들어왔다.
“여, 오랜만이야.”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하지만 이안과 눈이 마주친 남자의 표정은, 이안과 달리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 네놈과는 확실히 악연인 게 분명하군.”
마군의 기마대이자, 한국 서버 마계 최상위 랭커인 남자.
‘이라한’의 얼굴이, 마치 똥 씹은 듯 일그러지고 말았다.
* * *
이라한은 애초에, 이안에게 한 수 이상 밀리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버프 차이로 스텟까지 밀리게 되니, 이안의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직책이야 같은 기마대였지만, 이안의 경우 선공버프에 ‘기마대의 질주’ 버프까지 둘둘 두른 것이다.
심지어 기마대의 버프는, ‘금의환향’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한계를 초월한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다섯 칸을 직진하는 게 질주 버프의 한계였지만, 스태미너가 초기화되면서 무려 여덟 칸을 직진했으니 말이다.
‘기마대의 질주’ 버프로 인해 상승한 공격력만 해도, 무려 31퍼센트라는 무지막지한 상황.
이라한은 정말 이안의 옷깃 한번 건드려 보지 못한 채, 순식간에 전사하고 말았다.
이안이 쏘아 낸 불화살 세례에,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버프를 둘둘 만 이안의 화살은, 한 발 한 발이 정말 핵폭탄급이었다.
-마군 기마대, ‘이라한’유저의 생명력이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천군 기마대, ‘이안’유저가 승리하였습니다.
-‘이라한’유저가 전장 바깥으로 소환됩니다.
그리고 이안의 활약이 지속되자, 천군 진영의 사기 또한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와아!”
“미쳤다, 대박이다!”
가장 낮은 직책인 병사로 시작해서, 무려 세 턴 만에 6킬이라는 말도 안 되는 성적을 만들어 낸 이안.
심지어 이제는, 해외 서버의 유저들조차도 이안갓을 외치기 시작했다.
-지저스! 이안갓!
-맙소사. 이안갓이 또 해냈어!
한국 서버의 누군가가 이안갓을 외치자마자 천군진영을 응원하던 세계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이안갓’이라는 단어가 불길처럼 번져 나간 것이다.
‘신의 말판’ 중계를 시청하는 세계의 거의 모든 채널에서, 예외 없이 도배되고 있는 ‘이안갓’이라는 단어.
-이안갓은 대체 어느 나라 유저인 거야?
-몰라, 한국 서버 유저라는 거 같던데?
-크으, 역시 카일란 종주국이라는 건가!
-젠장! 난 오늘부터 유캐스트만 파야겠어. 이안갓 전투영상 전부 모아 놓고 다 볼 때까지 정주행할 거야!
그리고 잠시 후.
그 열기는 일시적으로 사그라졌다.
아니, 사그라졌다기보다는 잠깐 숨을 죽였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었다.
이안이 다시 세 번째 킬을 올렸으니, 또 한 번 진급할 차례가 되었다는 걸 시청하던 모든 유저들이 깨달았으니 말이다.
신의 말판 전장 한복판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목소리의 시스템 메시지.
띠링-!
-천군의 기마대, ‘이안’ 유저가, 신의 말판 전장에서 3킬 이상을 추가로 올렸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이안’유저의 직책이, ‘장군’등급으로 상승합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고, 전장의 모든 유저들은 그의 선택을 숨 죽여 지켜보았다.
하지만 장교로의 진급 때와 달리.
이번에는 대부분의 유저들이 이안이 선택할 직책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이안의 전투 성향이 거의 드러나기도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장 캐리력 있는 직책이 무엇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장군’ 계급으로 승격하셨습니다.
-직책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선택 가능한 직책 : 수비대장/돌격대장
-어떤 직책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또다시 전장에 울려 퍼지는 시스템 메시지.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의 선택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 전장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말이다.
-천군 진영의 기마대 유저 ‘이안’이 돌격대장 직책을 얻었습니다.
-‘이안’유저의 전투 능력치가 재설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