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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전투 (1)
신의 말판 전장에 입장한, 총 마흔여덟 명의 랭커들.
이들은 분명, 카일란 전 세계 서버에서 모인 최상위권의 유저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마흔여덟 명이 정확히 1등부터 48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용사의 길을 통과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협곡에 입장하기 위한 조건들.
그리고 특별한 히든피스들까지.
여러 가지 변수가 있기 때문에, 꼭 가장 뛰어난 순서대로 용사의 협곡 공헌도 순위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안처럼 생각지 못했던 이유로 밀려난 랭커들도 있었으며, 왕차이처럼 운 좋게 48인 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유저도 있었던 것.
그리고 그 말인 즉, ‘대장군’직책을 가졌다고 해서 꼭 가장 뛰어난 유저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현재 마군 진영의 대장군인 ‘카이’와, 천군 진영의 대장군인 ‘페드릭’의 차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페드릭 또한 카이와 마찬가지로 전사 클래스였기 때문에 비교가 수월했고, 하여 이안은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이안이 보기에 카이는 지금까지 봐온 어떤 랭커들과 비교해도 모자람 없는 실력의 소유자였지만, 페드릭은 좀 애매했다.
‘페드릭의 실력은, 샤크란 아재는 물론이고 유신과 비교해도 딱히 나아 보이지 않아.’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이안은 페드릭을 전략에서 배제해 버렸다.
어쭙잖게 페드릭을 공격에 활용하다가 실수라도 하게 되면, 그대로 게임에서 패배하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카이의 실력은, 이안을 긴장하게 만들 정도였다.
‘카이……. 어쩌면 샤크란 아재보다 더 뛰어날지도…….’
때문에 이안은,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패배를 가져다줄 수도 있는, 살얼음판 같은 전투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우웅-!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여기저기서 공명음이 울려 퍼졌고, 그와 동시에 전장 여기저기서 소환수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캬아아오-!
크륵- 크르륵.
“마계의 환영들이여, 일어나라!”
스하아아!
그리고 소환수들이 전부 소환되자, 전장은 더욱 북적였다.
이안의 소환수들도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훈이와 류첸의 소환수들이 더욱 많은 숫자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류첸이 소환한 마계의 그림자들은, 붉은 물결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류첸……. 분명 저 녀석은, 카이를 보조하며 움직일 거야.’
지금 이 전장에서 천군이 유리한 것은 단 하나였다.
전투에 참여한 인원 중에, ‘대장군’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
무척이나 아이러니해 보이기도 하는 말이었으나, 이것은 사실이었다.
대장군은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과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여 류첸과 모쿠바는 분명 카이를 중심으로 움직일 것이었다.
두 사람에게 최우선은 대장군 카이의 안위였으니까.
‘그렇다면…… 페이크를 살짝 걸어 볼까?’
“흣차……!”
전방으로 튀어나간 이안이, 빡빡이의 거대한 등껍질을 밟으며 힘껏 도약했다.
타탓-!
그러자 어느새 날아온 핀이, 허공으로 뛰어오른 이안을 등에 싣고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안의 화염장궁이 연신 불을 뿜기 시작했다.
핑- 피피핑-!
그야말로 순식간에 만들어진, 마치 묘기와도 같은 장면.
화르륵!
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화살들이 카이를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마치 한 줄로 이어진 것처럼 날아드는 이안의 화살들.
그것은 그야말로 극한의 속사능력이라 할 만 한 진풍경이었다.
쐐애애액-!
하지만 그것을 발견한 류첸의 반응 속도도, 놀라울 정도로 재빨랐다.
어느새 류첸의 완드에서는 마법이 캐스팅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치우의 방호!”
류첸의 입에서 짧은 시동어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카이의 바로 앞에, 반투명한 칠각형의 붉은 막이 빠르게 형성되었다.
화려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는, 한눈에 보아도 뛰어난 실드 계열의 마법.
이어서 그 위로, 다섯 발의 화살이 연달아 틀어박혔다.
쩌정- 쩌저정-.
류첸의 결계는,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다섯 발의 화살 중, 결계를 통과한 화살이 단 한 발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공격을 잘 막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류첸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뭐, 이런 대미지가……!’
고작 다섯 발의 화살에, 결계에 금이 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류첸의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이안을 태운 한 마리 그리핀이 그대로 방호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뭐지? 몸통박치기라도 해서 깨려는 건가?’
이안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는 류첸.
그런데 그 순간. 류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이안의 손에 들려 있던 장궁이 어느새 기다란 장창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무기를 스왑한 것.
‘어디서 잔머리를……!’
류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핀의 가속력과 창의 강력한 공격력이라면, 분명 금이 간 결계는 뚫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계가 뚫리고 나면, 그 다음은 당연히 카이의 차례다.
물론 카이가 쉽게 당해 줄 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안의 뜻대로 되게 가만 둘 수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류첸은, 카이에게 눈짓으로 신호하며 손을 들어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류첸과 카이는 이미 ‘차원의 거울’ 전장 때부터 손발을 맞춰봤고.
때문에 잠깐의 눈빛 교환만으로 서로의 의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령의 결계!”
위이잉-!
류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림과 동시에, 카이의 바로 앞에 또 다른 붉은 결계가 소환되었다.
기존에 소환되었던 칠각형의 결계에 겹쳐서, 또 하나의 결계가 만들어진 것.
의도했던 정확한 좌표에 결계가 만들어지자, 류첸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얼핏 보면 두 개의 결계인지조차 인지하기 힘든, 그야말로 절묘한 위치.
‘이건 못 피할걸.’
그리고 그 순간, 지금껏 돌부처처럼 가만히 서 있던 카이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르릉-!
등에 사선으로 매여 있던 거대한 대검을 뽑아 든 뒤,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하늘 높이 검극을 치켜 든 것이다.
이어서 카이의 검 끝으로, 찬란한 광휘가 줄기줄기 빨려 들어갔다.
고오오오-!
장엄한 공명음과 함께, 황금빛과 붉은빛이 어우러지며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관중들 중 하나가,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적뢰강림……!”
카이가 가진 최강의 고유 능력 중 하나인 ‘적뢰강림’.
이것은 사실, 카이를 아는 미국 서버의 유저들에게는 너무도 유명한 기술이었다.
미국 서버의 랭커들이 연달아 샬리언에게 패퇴할 때, 이 적뢰강림이 샬리언을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PVP에서 이 기술이 등장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어마어마한 공격계수를 자랑하지만, 2초나 되는 제법 긴 차징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게다가 이 기술을 발동시키고 난 뒤에는 시전자가 0.5초 동안 그로기 상태에 빠진다.
만약 기술을 맞추지 못한다면, 반격당할 리스크까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카이가 이 기술을 꺼내 들었다는 건, 이안에게 적뢰를 적중시킬 자신이 있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뒈져라……!”
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하늘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 * *
류첸이 두 번째로 소환한 결계인 ‘마령의 결계’는 사실 실드류 마법이 아니었다.
뭔가를 막아 내거나 하는 데 사용되는 마법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다만 이 결계의 역할은, 공간을 뒤틀어 버리는 것.
시전자가 결계를 소환한 직후 좌표를 하나 더 찍으면 결계를 통과하는 대상은 해당 위치로 워프되게 된다.
때문에 이 결계는, 보통 류첸의 도주기로 많이 활용되었다.
물론 이번만큼은, 아주 훌륭한 반격기로 활용될 예정이었지만 말이다.
‘갑작스레 시간 차가 생기면, 아무리 대단한 반사 신경이라도 반응할 수 없겠지.’
류첸과 카이는, 이 결계를 사용해 시간 차 공격을 할 생각이었다.
이안은 분명 결계를 뚫기 위해 돌진해 들어올 것이고, 그 순간 이안의 위치는 카이의 바로 앞까지 워프될 것이다.
류첸이 카이의 바로 앞에, 좌표를 찍어 놨으니 말이다.
이어서 그 타이밍에 맞춰, 카이의 적뢰가 떨어져 내리면.
이안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잿더미가 되고 말리라.
아무리 이안의 반응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워프와 동시에 내리꽂히는 낙뢰를 피할 방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콰콰쾅-! 콰쾅-!
낙뢰가 떨어져 내린 자리에 이안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
대신 마령의 결계 앞에, 심드렁한 표정의 대두 거북이 한 마리가 앉아 있을 뿐이었다.
“여기가 어디냐뿍”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당황한 류첸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이안을 찾았다.
그리고 그가 이안의 그림자를 발견한 곳은…….
“크허억!”
어느새 만신창이가 된, 보좌관 ‘모쿠바’의 뒤편이었다.
* * *
“역시 이안입니다! 시작부터 허를 찌르는 공격을 보여 주는군요!”
“와아, 감탄사가 절로 나오네요. 거의 풀피였던 모쿠바가 그 한 방에 빈사 상태가 되어 버렸어요. 심지어 모쿠바는 기사 클래스 아닌가요, 하인스 님?”
“맞습니다. 모쿠바는 기사 클래스죠. 모르긴 몰라도, 아마 상당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저런 딜이 나올 수 있었던 걸까요?”
“핀을 타고 날던 가속력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관성이 되어 창극에 힘을 실어 줬기 때문이겠죠.”
“아하, 그렇군요. 킬을 못 딴 게 아쉽긴 하지만, 정말 위력적인 공격이었어요.”
“맞습니다. 만약 모쿠바가 조금만 더 늦게 반응했다면, 정신 차리기도 전에 사망하고 말았겠지요.”
전장을 중계하는 하인스와 루시아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이안이 방금 보여 준 컨트롤이 대단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이 상황 자체가 흥분될 수밖에 없는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 최고의 랭커들만이 모인, ‘신의 말판’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전장.
그리고 이 전장, 최후의 전투를 주도하고 있는 두 명의 한국인 랭커들.
한국 서버의 카일란 팬이라면, 설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마군 진영의 유저들도 확실히 대단하군요.”
“그렇습니다. 이안의 기습에 반응한 모쿠바도 대단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서포팅에 들어가는 루첸과 카이도 엄청나군요.”
“정말인지, 저 같은 일반 유저들에게는 엄두도 나지 않는 플레이들입니다. 정말 별들의 전쟁이라 할 만하네요.”
“별들의 전쟁이라……. 정말 알맞은 표현입니다.”
“저는 저 별들 속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한 사람이 우리 이안갓, 그리고 훈이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어야지요. 아니,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루시아와 하인스는 상기된 목소리로 주거니 받거니 목청을 높였다.
지금껏 수많은 카일란 방송을 중계해 왔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흥분한 적은 단연코 처음일 것이었다.
“아, 카이가 무척이나 집요합니다! 어떻게든 훈이를 아웃시키려는 의지가 대단해요.”
“조금 더 버텨 줘야 돼요! 훈이가 조금만 더 버텨 주면, 이안갓이 분명 모쿠바를 처치하고 나올 겁니다!”
전장의 국면은 정신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해설자들이 조금만 방심해도, 곧바로 그 흐름을 놓쳐 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한 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접전의 연속!
그런데 그 순간. 전장을 둘러싸고 있는 관중석에서, 동시에 커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 오오오!”
“미친, 저게 뭐야?”
이안의 주변으로, 동시에 세 개의 검이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