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3화 전설의 시작 (4) >
* * *
광산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낮고 묵직한 진동음이 전해져 올라온다.
쿠릉- 쿠르릉-!
그리고 이 진동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이안을 향해 다가오던 악령들의 움직임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크륵- 크르륵!
키리릭!
무척이나 불안한 표정이 되어 기괴한 소리를 흘려 대며 주변을 살피는 악령들.
물론 긴장한 것은 악령들 뿐만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스템 메시지를 발견한 이안 또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아이언 스웜이라고? 대체 뭐지?’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광산 전체에 진동음이 울렸다.
그리고 그 말인 즉, 아이언 스웜 이라는 에픽 몬스터의 등장이 광산 전체에 진동을 줄 만큼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이 커다란 광산이 흔들리려면 못해도 토르의 대여섯 배는 되는 크기여야 할 텐데……!’
한차례 진동이 있은 후 무섭도록 적막해진 광산의 내부.
하지만 그것은 폭풍전야 였을 뿐.
멈춘 듯했던 진동이 다시 발밑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구르릉- 쿠릉-! 콰콰쾅-!
미약한 떨림에서 시작되어 점차 거대해진 진동음은 곧 광산 전체를 집어삼킬 듯 폭발하였고…….
“제길!”
이안을 둘러싸고 있던 악령들은 어디론가 빠르게 도망가기 시작했다.
키에엑-! 키아아오!
그리고 그것을 본 이안은 발밑이 갈라지는 지금 이 순간도 갈등하고 있었다.
‘에픽 몬스터의 난이도가 얼마나 될는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히는데…….’
카일란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맵에서는 낮은 확률로 에픽 몬스터가 등장한다.
에픽 몬스터는 에픽Epic이라는 그 이름답게 맵에 얽혀 있는 스토리와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희귀한 만큼 매력적인 보상을 드롭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때문에 이 난이도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이안은 선뜻 도망을 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후, 그래. 어쨌든 이 맵은 초월 10레벨 유저들만 입장이 가능한 맵이니, 난이도가 아무리 높더라도 납득 가능한 수준 안에서 구성되어 있겠지.’
그럴싸한 분석의 탈을 쓴 자기합리화(?)를 시전한 이안은, 더욱 긴장의 끈을 조이며 상황을 주시하였다.
‘아이언 스웜’이라는 처음 보는 에픽 몬스터를 한번 잡아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진원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바닥 아래쪽에서 뭔가 튀어나오려는 건가?”
이안의 중얼거림처럼 광산은 점점 더 큰 폭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잔떨림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두 다리로 서 있기조차 쉽지 않을 만큼 크게 진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앙-!
마치 다이너마이트라도 터진 듯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 퍼지며, 이안이 서 있던 뒤쪽의 거대한 바위가 펑 하고 터져 나갔다.
“흐아앗!”
그리고 이쯤 되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이안조차도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콰쾅- 콰콰콰-!
폭발력으로 인해 바닥을 구른 이안은, 재빨리 중심을 잡고 일어서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어서 아이언 스웜의 정체를 확인한 이안의 두 눈은 놀란 토끼 눈처럼 커다랗게 확대되어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이안의 눈앞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지네 형상의 괴생물체.
-마력의 아이언스웜/Lv. ???
광산 전체를 집어삼킬 수도 있을 듯한 거대한 몸집을 가진 아이언 스웜을 보며 이안은 자신이 했던 추측을 다시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토르 다섯은 무슨……! 토르 수십 마리 합쳐 놔도 저거보단 작겠어.’
바닥에서 솟아오른 아이언 스웜은 허공을 향해 커다랗게 포효하기 시작하였다.
키아아오오! 크아악!
그러자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시퍼런 액체덩이가 여기저기 튀어나가 비산했다.
치익- 치이익-!
그리고 그 액체가 내려앉은 자리는 마치 불로 지지기라도 한 듯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저건, 맞으면 그대로 사망이겠군.”
정면으로 날아든 액체를 가까스로 피해 낸 이안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녀석이 등장한 것 같았지만,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는 법.
이안은 이대로 꼬리를 말고 줄행랑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덩치가 꼭 전투력에 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샌드웜의 시야를 피해 그 뒤편으로 움직인 이안은, 재빨리 마그비를 소환하였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 보스의 스펙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화염시 만한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중급 불의 정령, ‘마그비’가 소환되었습니다.
시뻘건 불길과 함께 마그비가 소환되었고, 그와 거의 동시에 이안의 손에 화염의 장궁이 생성되었다.
화르륵-!
그리고 이안은,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일단 딜이 어느 정도 박히는지부터 확인해 봐야 전투를 어떻게 풀어갈지 윤곽이 나오니 말이다.
핑- 피핑-!
하지만 다음 순간.
이안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이안의 눈앞에, 정말 믿기 힘든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으니 말이다.
-에픽 몬스터 ‘마력의 아이언스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마력의 아이언스웜’의 생명력이 1만큼 감소합니다!
-에픽 몬스터 ‘마력의 아이언스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마력의 아이언스웜’의 생명력이 1만큼 감소합니다!
-‘마력의 아이언스웜’의 생명력이 1만큼 감소합니다!
두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시스템 메시지 상에 표기되어 있는 숫자는 분명한 1.
이안은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대체 뭘 어쩌라는 몬스터지? 저 덩치면 생명력도 수십만은 그냥 넘을 텐데…….’
순간 버그 몬스터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이안.
하지만 이안의 화살에 맞은 아이언 스웜이 그를 그대로 가만 둘 리 없었다.
캬아아악-!
거대한 입을 쩍 벌린 아이언스웜이 광산을 휘저으며 이안을 향해 맹렬히 쇄도했다.
그러자 또다시 지진이라도 난 듯 광산 전체가 흔들리더니, 이윽고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흐읍!”
한차례 크게 심호흡을 한 이안은 있는 힘껏 허공을 향해 도약하였다.
그리고 추진력이 힘을 잃은 순간, 재빨리 까망이를 소환하여 그 위에 올라탔다.
“까망아, 튀어!”
푸르릉-!
이안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까망이의 등 뒤로 시커먼 어둠의 날개가 솟아올랐다.
이어서 까만 어둠 속으로 녹아든 까망이는 무너져 내리는 바윗덩이들을 피해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어둠의 날개는 물론 광역 공격 스킬이었으나, 이렇게 도주할 때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쐐애애액-!
커다란 파공성을 일으키며, 하늘 높이 수직 상승한 까망이와 이안.
가까스로 아이언스웜의 시야에서 벗어난 이안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분명히 뭔가 공략법이 있으니까 만들어 놓은 몬스터일 텐데…….’
지금 이안의 무기는 이 용사의 협곡 안에 있는 모든 랭커들 중에 가장 뛰어나다.
심지어 특수 스텟까지 최대치로 수련한 지금, 이안이 쏘아내는 불화살 한 방 한 방은 그야말로 핵탄두급 공격력을 지녔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미지가 1이 박혔다라…….’
만약 이안의 불화살이 샌드웜에게 두세 자릿수 정도의 대미지를 박았더라면, 오히려 이안은 깔끔히 포기하고 다른 광맥을 찾아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어찌해 볼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라는 걸, 곧바로 인지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안의 화살이 샌드웜에게 입힌 대미지는, 2도, 3도 아닌 정확히 1.
여기에 분명 어떤 기획 의도가 담겨 있음을, 이안은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이 거대한 괴물은 평범한 방법으로 때려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녀석이 아닌 것이다.
‘이대로 포기하긴 뭔가 아쉬워. 조금 비비다 보면, 어딘가 분명 숨겨져 있는 놈의 약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늘 높이 솟아오른 이안은 샌드웜의 거대한 몸집을 내려다보며 관찰을 시작하였다.
다행히 거대한 덩치답게 무척이나 둔한 녀석은 이안의 움직임을 놓치고는 광산 바닥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어떤 포인트가 있을 텐데…….’
아이언스웜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이안.
그런데 그때, 이안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아이언스웜의 행동 패턴이 일변하기 시작하였다.
키아아악!
이안을 찾는 대신 도망치는 차원의 악령을 쫓아가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
그리고 악령을 한 마리 집어삼킬 때마다, 거대한 스웜의 몸집을 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빛이 휘감겨 들어갔다.
* * *
모두가 잠에 들었을,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 3시의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빌딩의 중간층에, 홀로 불이 켜져 있는 사무실이 하나 있었다.
심지어 그 사무실의 안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뭔가를 하고 있었다.
“태철 씨, 그쪽 CG 작업은 아직 안 끝났어?”
“거의 끝나갑니다, 대표님! 앞으로 1시간이면 마무리 가능해요!”
“어휴, 앞으로 1시간? 자기 지금 시간이 몇 시인 줄은 알고 있는 거지?”
“하하, 뭐 밤샘 작업 한두 번인가요? 이쪽은 걱정 마시고 다 끝나셨으면 퇴근하세요, 대표님.”
들려오는 내용으로 보아, 분명히 야근 중인 대표와 부하직원들의 대화.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의 대화가 무척이나 화기애애하다는 것이었다.
“석류 씨, 힘들지 않아? 너무 피곤하면 일단 퇴근하고, 내일 출근해서 마무리해도 돼.”
“아니에요, 대표님. 이거 다 하고 가야 내일 해외 발주 가능해요.”
심지어는 퇴근을 권장하는 대표와, 야근을 더 하겠다는 사원의 대화까지도 들려오는,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의 특이한 사무실.
이 사무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영상 디자이너 ‘소진’의 사무실이었다.
“휘유, 직원들이 퇴근을 안 하는데 내가 먼저 갈 수도 없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은 소진은, 다시 본인의 자리에 앉아 의자에 몸을 푹 기대었다.
직원들이 굳이 퇴근하지 않고 일을 마무리하겠다니, 그녀 또한 1시간 정도만 더 남아 영상 작업을 끄적여 볼 생각이었다.
‘흐흐, 평소에는 퇴근 시간만 되면 번개같이 사라지던 녀석들이 이 시간까지 남아서 자발적으로 일하다니. 역시 돈이 좋기는 좋구나.’
요즘 소진의 디자인 사무실은, 눈 코 뜰 새 없이 일이 밀려들어왔다.
심지어 일의 건수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하게 굵직한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돈을 쓸어 담는 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준 건 정말 신의 한수였어.’
이안을 비롯한 로터스 길드원들의 플레이 영상을 전담하여 편집하는 소진의 영상디자인 사무실.
최근 소진의 사무실에 부쩍 일이 많아진 것은 당연히 이안 때문이었다.
세계 무대가 열리자마자 입성한 이안이 시작부터 거대한 폭탄을 터뜨리는 바람에, 이제는 글로벌한 스케일로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영상 수익의 가장 큰 비중이 저작권자인 이안에게 돌아가기는 하지만, 워낙 액수가 크다 보니 소진의 사무실에 떨어지는 돈도 천문학적인 수준이 되어 버린 것.
각 프로젝트를 맡은 직원에게 떨어지는 인센티브만 해도 한 달에 수백 단위가 넘어가다 보니, 소진의 사무실에는 밤낮 없이 불이 켜지게 된 것이다.
“흐음, 그러고 보니 오늘자 이안갓 플레이 영상은 아직 뜯어 보지도 않았는데……. 작업은 내일 하더라도 퇴근하기 전에 구경이나 한번 해 볼까?”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콧소리까지 흥얼거린 소진은 저녁에 다운받아 두었던 이안의 개인영 상을 오픈하였다.
이안이 보내 온 새로운 영상을 여는 이 순간은, 여러모로 설레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이안의 영상 자체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기도 했지만, 팬으로서 그의 개인플레이 영상을 본다는 사실 자체가 순수하게 설레기도 하는 것이다.
심지어 이안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영상을 확인하는 사람이 그녀였으니, 이것은 소진만이 가진 소소한 특권이라 할 수 있었다.
“자, 어디 보자……. 오늘 차원의 거인 레이드가 열렸다고 하던데, 우리 이안갓도 레이드 퀘스트에 참여했으려나?”
연신 중얼거리며 모니터를 풀 세팅한 소진은 경건한 마음으로 영상의 플레이 버튼을 클릭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소진은 마치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듯 점점 더 영상에 심취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