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2화 깽판의 정석 (1) >
전장은 넓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전투중인 인원의 숫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NPC들까지 전부 포함하면 도합 천이 훌쩍 넘을 정도였으니, 그 전장의 곳곳을 속속들이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특히 그 상황이 정신없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난전 중인 상황이라면 전장에서 정신없이 전투중인 유저들은, 근처에서 어떤 전투가 벌어지는지조차 눈치채기 쉽지 않았다.
빠각-!
“이, 이게 무슨…….”
퍽- 푸슉-!
“커헉!”
퍼퍼펑-
“천군이 대체 왜 여기에…….”
너도 한 방, 너도 또 한 방.
죽창 메타(?)의 정신을 아주 착실히 실천 중인 이안은 점점 더 신명나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수많은 적들로 둘러싸인 적진 한복판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아직까지 여유가 넘쳐 보였다.
‘후후, 아직까지 날 눈치챈 녀석이 별로 없어 보이잖아?’
그리고 이안이 여유로운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여럿의 적에게 타깃팅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들 자신의 앞에 있는 적을 상대하기에 바쁜 것인지, 주변의 동료가 하나 둘 죽어감에도 이안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
게다가 지금 이안은, 너무도 평범(?)하게 전투하고 있었다.
스킬 같은 것은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검만을 휘두르고 있었으니, 비슷한 색상의 갑주를 두른 밀랍병사들 사이에서 크게 티가 나지 않은 것이다.
정신없이 전투중인 근처의 마군들은 그저 좀 강해 보이는 중립 차원병사가 근처에 있나 보다 생각할 뿐.
하지만 이안이 그렇게 본의 아닌 은폐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아주 길지는 않았다.
“뭐, 뭐야? 저기 왜 천군이 있어?!”
“중립 병력 사이에 천군이 끼어 있다!”
“놈을 먼저 처치하자!”
뭔가 서늘함과 함께 이질감을 느낀 마군 유저 하나가, 몽둥이로 마군 병사 NPC들을 후드려 패고 있는 이안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당황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것이, 이안이 원했던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멍청한 놈들, 이제 발견하다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이안은, 자세를 가다듬고 살짝 뒤로 포션을 움직였다.
여기서 ‘뒤’란, 중립 진영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것.
중립 진영의 병력들은 이안이건 마군이건 공평하게 적대하고 있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중립 진영 쪽으로 들어갈수록 이안은 더 안전(?)해지는 것이다.
여하튼 이안을 발견한 마군의 유저들은 이안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어쨌든 간에 천군 진영의 적을 처치해 킬 포인트를 올릴 수 있었고, 킬 포인트는 곧 공헌도와 직결되는 것이었으니.
이렇게 홀로 나타난 이안의 존재는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군 유저들은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푸욱-!
“커허억!”
가장 먼저 이안을 향해 달려든 전사 클래스 랭커 하나가 돌연 까맣게 변하며 아웃되었기 때문이다.
“뭐야? 한 방?”
“저 멍청이는 피 관리도 안하고 무작정 뛰어든 거야?”
“아오, 어느 나라 놈인지 마족 유저 망신 다 시키네.”
“보아하니 움직임도 굼떠 보이는데, 저런 느려터진 검에 정타를 내주다니.”
유저 하나가 단칼에 사망하자, 무작정 달려들던 마군 유저들은 살짝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겁을 먹거나 심각해진 것은 아니었다.
사망한 유저의 시스템 메시지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이안의 무식한 몽둥이가 얼마나 아픈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잠시 후.
마군 유저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었다.
스륵- 콰드득-!
퍽- 퍼퍽-!
공헌도에 눈이 멀어 곧바로 뛰어든 다른 유저 둘 역시.
정확히 두 번의 칼질에 까만 사체로 변해 버렸으니까.
그리고 그 광경을 목격한 마군 유저들은 벙찐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저, 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퓰란이 죽어 버렸어!”
앞서 달려든 세 유저가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죽어 버리자 막타를 쳐 볼 생각으로 이안을 향해 뛰어들던 다른 유저들은 그 자리에서 굳고 만 것.
그리고 이안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할리, 소환!”
커허엉-!
반사적으로 할리를 소환해 탑승한 뒤, 역으로 마군 유저들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그리고 역동작이 걸려있는 마군 유저들이 곧바로 방향을 돌려 이안을 피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촤락- 촤아악-!
마치 철갑으로 무장한 말을 타고 무력한 보병들을 학살하는 장수처럼 순식간에 마군 유저들 사이로 뛰어들어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르는 이안!
-마군 진영의 정예병 유저 ‘폭스’에게 강력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폭스’의 생명력이 23,980만큼 감소합니다!
-마군 진영의 정예병 유저 ‘폭스’를 처치하였습니다!
-현재 킬 포인트 : 17
-마군 진영의 정예병 유저 ‘메이시스’에게 강력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메이시스’의 생명력이 27,766만큼 감소합니다!
-마군 진영의 정예병 유저 ‘메이시스’를 처치하였습니다!
-현재 킬 포인트 : 18
-마군 진영의……
……후략……
그리고 이안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킬 포인트를 다섯 개나 추가로 올렸다.
띠링-!
-짧은 시간 내에 연속해서 10킬을 달성하였습니다!
-획득 공헌도가 50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획득 영웅 점수가 1,00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공헌도를 0만큼 획득하였습니다!
-영웅 점수를 500만큼 획득합니다!
공헌도가 5배나 뻥튀기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떠오른 0이라는 숫자는 뭔가 씁쓸했지만, 그와 별개로 이안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짜릿해……! 늘 새로워! 역시 깽판이 최고야!’
평소 이안이 해 왔던 전투는 다대일의 PVE전투가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방금 보여 준 것처럼 순식간에 여럿을 처치하는 것은 이안의 게임 역사에 흔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소 몬스터들을 상대로 광역기로 쓸어 버리던 상황과 지금은 어떤 면에서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AI에 불과한 적들을 처치할 때와 달리, 지금 이안의 검에 녹아내린 것은 ‘유저’들이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어쭙잖은 유저들도 아닌 세계 각국에서 모인 최상위권의 랭커들.
때문에 같은 킬을 올렸다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카타르시스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오로지 평타로만 후드려 패는 그 손맛은 나름의 묘미가 또 있었다.
“크하하핫!”
그리고 상황이 이쯤 되자, 마군 진영의 유저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전장에 날파리가 한 놈 끼어든 것 같다!”
“녀석을 먼저 처치하자!”
느닷없이 등장한 이안 때문에 더욱 분주해지기 시작한 마군 진영의 유저들.
그런 그들을 보며, 이안은 속으로 장대한 목표를 세웠다.
‘으흐흐, 죽기 전에 딱 100킬만 올려 보자. 상황 보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나름 정체를 숨기기 위해(?) 쓴 회백색의 철갑투구 안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는 이안.
하지만 이안이 소환한 할리 때문인지 이제 이안을 알아본 해외서버의 마족 유저들도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안이야! 이안이 분명해!”
“할리칸 소환수로 부리는 소환술사가 한두 명도 아니고, 그것만으로 저 사람이 이안이라고?”
“할리칸을 쓰는 소환술사는 많지만, 그걸 타고 저렇게 날뛰는 소환술사는 별로 본 적이 없거든.”
“하지만 지난번에 본 이안은 분명 활을 쏘고 있었는데…….”
“원래는 창 썼어. 그 전엔 대검 쓰는 것도 봤고.”
“…….”
“어쨌든 이안이 확실해.”
“그거야 조금 더 지나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리고 이 상황을 시발점으로 중립군과 마군의 전장이었던 ‘N’거점의 전장이, 조금씩 이안 중심으로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 * *
수백이 넘는 마군진영의 대군을 상대로 혼자서 100킬이라는 장대한 목표를 세운 이안.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안은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아무리 한계까지 컨트롤을 한다고 해도, 포위되면 결국 죽어야 돼.’
민첩성과 기동성 위주의 전투를 하던 과거라고 할지라도 마족 랭커들에게 둘러싸이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데, 공격력에 모든 스텟을 올인한 지금은 말할 것도 없는 것.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서 이안이 최상의 전투를 펼치려면, 컨트롤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위치 선정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이걸 극대화시키면 좀비처럼 버텨 볼 수 있을 거야.’
이안이 이용할 수 있는 두 가지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첫 번째는 바로, 한바탕 깽판 친 이안이 지금 숨어들어 있는 중립 진영.
물론 이들이 이안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안의 어그로는 차순위였다.
옆에 이안과 마군 유저가 동시에 보인다면, 중립 몬스터들은 마군을 먼저 공격하도록 어그로가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것을 잘 이용하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중립 진영 깊숙이 들어가서도 안 되겠지. 주변에 너무 마군 유저가 없으면, 결국 날 향해 공격을 퍼부을 테니까.’
그리고 이안이 이용할 수 있는 두 번째 요소는 다름 아닌 이 ‘깃발 전장’의 속성이었다.
깃발 전장의 속성이란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대열’을 벗어난 순간 공헌도를 획득할 수 없다는, 이 ‘용맹의 깃발’ 전장만의 룰을 말하는 것이었다.
‘미리 유저들의 위치를 확인해 두고 거리 계산만 잘하면, 치고 빠지는 게 훨씬 수월할 테니까.’
현재 이 ‘대열’이라는 족쇄에서 자유로운 것은, 이 전장 안에 오직 이안뿐이었다.
전장 안에 있는 모든 유저들 중에서, 공헌도가 필요 없는 유저는 이안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적당히 마군 유저들을 상대하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곧바로 벗어날 수 있도록 애초에 전장 자체를 마군 유저들이 이동할 수 있는 반경의 한계선에서 형성시킬 수 있다면, 치고 빠지는 것이 배 이상은 쉬워질 게 분명했다.
‘대열에서 벗어나는 판정이 정확히 몇 미터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인 거리감은 미리 파악해 두었으니까.’
중립진영 병사들의 사이에 교묘히 숨어든 이안은, 또다시 마군 진영을 갉아먹기 위해 빈틈을 노리기 시작하였다.
한 번씩 중립 진영의 어그로가 튈 때도 있었지만, 그때는 대응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얼른 몸을 피하며 움직였다.
중립 병사가 공격한다고 해서 괜히 맞상대 했다가는 원치 않는 어그로가 몰려들 수 있으니 말이다.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최근 들어 가장 활기 넘쳐 보이는 이안이었다.
“크흐흐, 이건 몰랐겠지!”
그리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날뛰어 대는 이안의 깽판에, 마군 진영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하였다.
푸욱-!
촤라락-!
-마군 진영의 정예병 유저 ‘윅스’를 처치하였습니다!
-현재 킬 포인트 : 23
-마군 진영의 정예병 유저 ‘뮤라인’을 처치하였습니다!
-현재 킬 포인트 : 24
-마군 진영의…….
마치 초식동물 무리를 노리며 어둠 속에 숨어 있는 한 마리의 맹수처럼, 절묘한 순간마다 마군 진영에 나타나 한 번에 너댓 명 이상의 마군 유저들을 학살하고 유유히 사라지는 이안.
“젠자앙! 저놈 좀 어떻게 해 봐!”
“다들 왜 쫓아가다 말고 멈추는 거야?”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마군 진영의 유저들은 점점 패닉 상태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지금 공헌도가 중요해?! 일단 따라가서 저놈부터 좀 잡아 보라고!”
그리고 그렇게 10여 분 정도가 지났을까?
-‘천군’ 진영이 두 번째 거점을 점령하였습니다.
-현재 스코어 – 천군 2 : 마군 1
이안 때문에 주춤하는 사이, 다시 천군 진영에 리드를 내어주고 만 마군 진영의 유저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악몽의 ‘전초전’에 불과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