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4화 깽판의 정석 (3) >
* * *
하아…….
병사 혼자서 거점 하나를 점령하는 게 가능하냐고?
나도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지.
장군도 아니고 일개 병사가 홀로 메인 거점에 깃발을 꽂는 그림은…….
정말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니 말이야.
그런데 그거 알아?
깃발을 꽂고 사라진 줄 알았던 그 ‘미친 놈’이, 알고 보니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탑의 구석에 숨어 있었더라고.
왜 숨어 있었겠어?
당연히 한 번 더 깃발을 꽂으려고 숨어 있었겠지.
그때까지도 녀석에게는 깃발 버프가 남아 있었으니 말이야.
휴우…….
이안이라고 했던가?
그놈은 정말 타고난 악마야.
어지간한 마왕님은 명함도 내밀기 힘들 만큼 악랄하다고.
어쨌든 그 때문에 우리 마군 진영은 그날 정말 지옥을 맛봤어.
그리고 난, 다시는 놈을 만나고 싶지 않아.
-마계 장군 ‘켈타’의 회고록 中 발췌
* * *
마군 진영이 점령 중이던 메인 거점을 낼름 하고 낚아채 버린 이안.
하지만 이안의 계획은 단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안은 좀 더 고차원적인 방법으로 마군 진영을 괴롭혀 줄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마군 놈들이 생각이 있다면 깃발 설치하는 5분 동안 다음 거점으로 진격하겠지. 벌어진 스코어를 조금이라도 따라잡기 위해서는 5분이라는 시간도 아까울 테니 말이야.’
거점에 깃발을 꽂는 데 필요한 인원은 결국 한 명이다.
사실상 한 명만 남아서 깃발을 꽂고 나머지는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고 효율적인 방향인 것이다.
때문에 이안은 그 허점을 노리기로 하였다.
주력 부대가 다음 거점을 공략하기 위해 N거점을 완전히 빠져나가고 나면 깃발을 설치하기 위해 남은 병사들을 암습하여, 전부 처치해 버리려는 것이다.
그리고 마군 진영의 장군 켈타는 정확히 이안이 생각한 대로 움직여 주기 시작하였다.
“폴라츠.”
“예, 장군님.”
“자네가 책임지고 깃발 설치를 완수해 주시게.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본대는 조금이라도 빨리 다음 거점으로 출발해야 할 것 같으니 말이야.”
“염려 마십시오, 장군. 얼른 임무를 완수하고 뒤를 따르겠나이다.”
켈타의 친위대원 중 하나이자 십인장의 직책을 가진 폴라츠는 자신의 수하 열을 데리고 N거점에 깃발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첨탑의 구석에 있는 어둠 속에서 작고 은밀한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말이다.
손바닥만 한 귀여운 두 개의 날개를 파닥거리며 어둠 속에 숨어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카카.
카카의 손에는 작은 수정구가 들려 있었고 그것은 곧 이안의 눈과 다름이 없었다.
“얼마나 남았나, 코릭스.”
“이제 곧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폴라츠 님.”
“좋아. 어서 깃발 설치를 끝내고, 장군님을 따라 다음 거점으로 이동하자고.”
“알겠습니다.”
깃발 설치를 맡게 된 마군 진영의 유저 코릭스는, 이안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안이 깃발 포인트를 훔쳐간 덕에, 운 좋게 자신에게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으흐흐, 이게 왠 떡이냐. 이안 덕에 중립 거점도 아니고 천군 거점에 깃발을 꽂아 보게 생겼네.’
그러나 코릭스의 이안에 대한 고마움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잠시 후 그의 시스템 창에 ‘이안’이라는 이름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현재 진척도 : 89.12퍼센트
-현재 진척도 : 93.43퍼센트
……중략……
-천군 진영의 용사 ‘이안’으로부터, 강력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허용하였습니다!
-20퍼센트만큼의 추가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31,818만큼 감소합니다!
-생명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앞으로 5분 동안 전장에서 이탈합니다.
“커, 커헉!”
그리고 깃발을 설치하던 코릭스가 사망하자, 그제서야 이안을 발견한 마군의 병사 NPC들이 일제히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기 숨어있었구나!”
“이번에야말로 네놈을 잡아 죽여 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섞여 있던 유저 하나는 재빨리 코릭스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갔다.
그가 설치하던 깃발을 이어서 설치하려는 것이다.
코릭스가 사망하면서 진척도가 10퍼센트만큼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도가 80퍼센트를 훌쩍 넘는 깃발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
이안은 그를 먼저 저지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버프는 아직 남아 있었고 깃발 포인트를 다시 빼앗아 오면 되니 말이다.
지금 깃발보다 이안이 관심 있는 것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예닐곱 정도의 마군 병사들과의 전투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킬 포인트’에 대한 욕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 여기서 100킬 한번 찍어 보자!’
이안에게 지금의 ‘용맹의 깃발’ 전장은 이런저런 컨트롤을 시험해 볼 수 있는 훈련장이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놀이터’였다.
리스크가 없으니 더 과감해질 수 있었고, 걱정할 게 없으니 더 신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군 진영의 정예병 유저 ‘로로칸’을 처치하였습니다!
-현재 킬 포인트 : 99
-마군 진영의 정예병 유저 ‘킨츠’를 처치하였습니다!
-현재 킬 포인트 : 100
-믿을 수 없는 공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용맹의 깃발’ 전장에서 획득한 공헌도가 150퍼센트만큼 추가됩니다!
-지금까지 ‘용맹의 깃발’ 전장에서 획득한 영웅 점수가 200퍼센트만큼 추가됩니다!
-공헌도를 0만큼 추가로 획득하였습니다.
-영웅 점수를 7,352만큼 획득하였습니다.
결국 노 데스로 100킬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고 만 이안.
그 덕에 영문도 모르고 어부지리를 얻는 것은 천군 진영의 유저들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스코어가 왜 자꾸 올라가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지?”
“우리가 모르는 천군 진영의 다른 병력이라도 있는 거야?”
이기고 있는 천군 진영의 유저들조차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기형적인 스코어.
그리고 그 기형적인 점수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 * *
N거점에서 마군 진영을 괴롭히던 이안은 결국 1포인트의 데스 포인트를 허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앞뒤로 마군 진영의 메인 거점 사이에 갇혀 버린 형국이었으니, 결국에는 꼬리를 잡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이안이 쉽게 죽어 준 것은 아니었다.
이안을 잡는 과정에서 마군 진영은 또다시 수십 이상의 병력을 잃고 말았으니 말이다.
일개 병사 하나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피해라기엔 너무도 커다란 출혈.
덕분에 마군 진영의 병력은 무척이나 약화되고 말았다.
병력을 잃은 것도 잃은 것이지만, 이안을 잡으러 다니느라 진영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안의 활약에 힘입은 천군 진영의 유저들은 파죽지세처럼 거점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마군 진영이 이안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동안 순식간에 서브 거점까지 야금야금 먹어치운 것이다.
“좋았어! 여기도 점령 완료!”
“방어 타워만 빠르게 올려 놓고, 다음 거점으로 이동하자고!”
그리고 상황이 이쯤 되자, 처음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던 천군 진영의 수뇌부 또한 마군 진영이 와해되었음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일이 이안의 작품일 줄이야 상상도 못 했지만 적어도 대략적인 상황은 파악한 것이다.
하여 천군 진영을 통솔하는 장군 세이카림은 병력을 쪼개어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마군 진영에 여력이 없음을 확인하였으니 그 사이 최대한 많은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마군 진영과 가까운 거점을 먼저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전군, 진격하라! 마군이 더 이상 거점을 점령할 수 없도록, 최대한 동쪽에 있는 거점부터 점령하라!”
원래대로였다면 서쪽부터 차근차근 거점을 늘려 나갔겠지만, 마군의 진영이 와해된 것을 확인하고는 초강수를 두기 시작한 것.
그리고 그렇게,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추가로 흘렀을까?
“크으, 이제 중립 거점은 다 먹은 거지?”
“그런 거 같은데.”
“캬, 이거 이러다가 콜드 게임이라도 나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는걸?”
천군과 마군 진영의 스코어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벌어져 버리고 말았다.
-‘천군’ 진영이 열여덟 번째 거점을 점령하였습니다.
-현재 스코어 – 천군 18 : 마군 5
점령 스코어 18포인트에, 총 스무 개의 거점 중 열여섯 곳을 점령해 버린 것이다.
스코어와 실제 점령 거점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한 거점을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었다.
“자, 마군 놈들 얼른 쓸어 버리고 콜드게임 만들자고.”
“좋았어. 이대로 콜드게임 가면 공헌도 최소 500부터 시작이닷!”
“난 잘하면 1천도 찍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헐, 1천이라니……. 부럽네요, 님.”
하나하나 킬 포인트가 누적될 때마다 스노우 볼이 굴러가는 ‘차원의 거울’ 전장처럼, 용맹의 깃발 전장 또한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한 눈덩이를 멈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전투에서 사망해도 부활하기는 하지만, 5분이라는 부활 대기 시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거의 피해가 없는 천군 진영과 달리 피해가 누적된 마군 진영은, 부활을 기다리고 전장에 복귀하는 유저들로 인해 천군 진영에 비해 거의 절반 수준의 병력으로 싸움을 이어 가야 했으니 말이다.
갈수록 심화되는 전력 차이로 인해 계속해서 마군 유저들만 사망하게 되니, 이것은 악순환의 반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띠링-!
-‘천군’ 진영이 스물두 번째 거점을 점령하였습니다.
-현재 스코어 – 천군 22 : 마군 5
-‘천군’ 진영이 모든 거점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마군’ 진영 유저들의 부활 가능한 거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사망한 모든 마군 유저들은 전장 밖으로 소환됩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천군’ 진영이 승리하였습니다.
-‘콜드게임’으로 승리하였으므로, 모든 보상이 두 배로 적용됩니다.
결국 누군가 우려(?)했던 대로 용맹의 깃발 전장에 유래 없던 ‘콜드 게임’이라는 결과가 만들어지고 말았고, 승리한 천군 유저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겼다!”
“콜드게임이라니!”
“크, 님들 수고했습니다! 다들 너무 잘해 주셨어요!”
“으하하핫! 메인 퀘 버리고 여기 온 게 신의 한 수 였어!”
“역시, 이 라이첸 님이 있었는데 패배할 리가 없지!”
그런데 전장이 종료되기 바로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들이 잘해서 이겼다고 생각했던 몇몇 천군 진영의 유저들은 벙찐 표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들로 인해, 이 압도적인 승리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합 킬 랭킹
-1위 – 천군 진영/이안 : 395킬 2데스
-2위 – 천군 진영/미크로 : 41킬 13데스
-3위 – 천군 진영/바네사 : 29킬 7데스
-4위 – 마군 진영/류은 : 35킬 16데스
-5위 – 천군 진영/사라 : 31킬 11데스
……후략……
그리고 그것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