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5화 거신들의 땅, ‘엘라시움’(2) >
* * *
뻔뻔하게 경비병을 향해 인사한 이안은, 성큼 성큼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지금 이안은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이안이 인사한 순간 입구에 있던 두 경비병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움직였고, 눈이 마주친 순간 그들의 초월 레벨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쟈크람 마을 경비병 우라쿤 / 레벨 : 92(초월)
-쟈크람 마을 경비대장 카르간 / 레벨 : 97(초월)
‘아니, 경비병들 상태가 대체 왜 이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안은 가던 걸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쾌활하게(?) 인사까지 한 마당에 쫄아서 되돌아 도망친다면 저 무시무시한 경비병들이 이안을 그대로 보내 줄 리 만무한 것이다.
아마 저 근육들을 불끈거리며, 미친 듯 쫓아올 게 분명했다.
이미, 기호지세의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저벅- 저벅- 척-!
경비대장 카르간과 경비병 우라쿤.
이안에게 다가온 두 NPC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흐음, 못 보던 얼굴인데, 마을엔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온 것이지?
-기분 나쁜 냄새와 기분 좋은 냄새가 공존하는 녀석이군.
그리고 그들의 말을 들은 이안은,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아직 통과된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이안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공격한 것도 아니었으니 용맹의 펜던트를 보여 주며 잘 얘기한다면, 충분히 무사 입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안은 너스레를 떨며 말을 잇기 시작하였다.
“아하핫, 엘라시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새내기 용사입니다. 이곳 붉은 바위산에 용맹한 용사들의 마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습죠.”
이안은 아직 쟈크람 마을이 뭘 하는 곳인지도 정확히 모른다.
다만 가지고 있는 재화인 지저금화를 소모할 창구가 필요했는데, 거신족의 마을이 아니면 사용할 곳이 없었으니 일단 거신족들의 진영에 있는 마을이면서 들어갈 수 있는 단서를 찾은 이곳에 다짜고짜 찾아온 것이었다.
해서 이안이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오직 펜던트에 쓰여있던 정보들뿐.
하지만 얼굴에 능숙하게 철판을 깐 이안은, 제법 그럴듯한 이유를 대는 데 성공하였다.
-용맹한 용사들의 마을이라……. 후후, 뭐, 틀린 말은 아니군. 이곳 쟈크람 마을을 지키는 영령英靈들은 용맹과 명예를 갖춘 용사들이었으니 말이야.
-대장님, 똘똘한 친구 같은데, 들여보내 줄까요?
-흠, 그렇기는 하지만, 확인할 건 확인해야지.
잠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던 경비병 둘은 다시 이안을 향해 시선을 옮겼고, 둘 중 경비대장 카르간이 입을 열었다.
-자네, 새내기 용사라 했지?
그의 물음에, 이안은 재빨리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용맹의 증표를 분명 가지고 있을 터. 그것을 보여 준다면 마을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겠네.
“……!”
순간 ‘증표’라는 말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안은 그것이 용맹의 펜던트를 의미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이어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펜던트를 카르간을 향해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경비대장님. 이걸 말씀하시는 게 맞죠?”
이안으로부터 펜던트를 받아 든 카르간은 그것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맞다. 이 펜던트라면 충분히 증표가 될 수 있지.
“하핫.”
-딱히 장난질 친 흔적은 보이지 않는군. 좋아, 안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마.
“감사합니다!”
경비대장이 내민 펜던트를 다시 받아 든 이안은, 혹시 그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 새라 종종걸음으로 마을의 안쪽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흐흣, 무사 입성 성공했고!’
이어서 이안이 마을의 경계선을 넘는 순간…….
띠링-!
시스템 알림음과 함께,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주르륵 하고 떠올랐다.
-지저세계, 고대 거신족 영령들의 마을. ‘쟈크람 마을’에 입장하셨습니다.
-‘쟈크람 마을’은 거신족들의 성역聖域입니다.
-‘쟈크람 마을’에서는 공격적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 종족 유저 중 최초로 쟈크람 마을에 입장하였습니다.
-명성(초월)이 1,000만큼 상승합니다.
-12시간 동안, 쟈크람 마을의 모든 물건을 80퍼센트의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이제 완전히 안도할 수 있었다.
‘휘유, 중립 지역이라……. 이렇게 되면 마음이 훨씬 편해지잖아?’
적진 한복판이라는 리스크야 항상 남아 있지만, 그래도 이 마을 안에만 있으면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니 조금은 더 마음 편하게 일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건도 싸게 살 수 있겠다, 좋아, 오늘 여기서 지저금화는 싹 다 쓰고 가겠어.’
한층 기분이 좋아진 이안은, 인벤토리를 열어 보유중인 지저금화를 한번 확인해 보았다.
-보유 중인 재화
-용천주화龍天鑄貨 : 373,981냥
-지저금화地底金貨 : 672,983냥
그러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거신족을 많이 때려잡긴 했네……. 어떻게 용천주화보다도 지저금화가 훨씬 많을 수가 있지?”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기획자가 이안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일지도 몰랐다.
* * *
쟈크람 마을은 작고 아담한 마을이었다.
입구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을 내부의 건물 전부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였으니, 작고 귀여웠던 라페르 일족의 거점과 비교하더라도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건물 하나하나의 외형은 무척이나 멋들어졌다.
오색찬란한 신비로운 광휘가 뿜어져 나오는 첨탑부터 시작하여, 고풍스럽게 디자인된 고서점까지.
디자인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이안조차도 자신의 왕국에 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건물들의 외형 퀄리티는 상당히 뛰어났다.
“호오, 제법 멋지잖아……?”
하지만 그러한 감탄도 잠시, 마을의 건물들을 하나씩 들어가 보던 이안은 점점 더 불안한 표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처음 고서점에 들어가 고대 거신족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었는데, 다섯 번째 건물쯤 들어갔다 나온 이안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워져 있었다.
“이게 아닌데……. 설마 마을에 돈 쓸데가 하나도 없는 건 아니겠지?”
마을에 있는 총 일곱 개의 건물 중 다섯 개를 이 잡듯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판매하는 상인을 찾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아냐, 그럴 리는 없을 거야. 그랬더라면 최초 발견 보상으로 물건이 할인된다는 메시지가 떴을 리 없잖아?’
불길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이안은, 짧게 심호흡을 한 뒤 다음 건물에 들어섰다.
이번에 걸음을 들인 건물은, 다른 건물들과 달리 특이하게 반 지하로 설계된 건물이었다.
끼익-!
듣기 거북한 마찰음과 함께 조심스레 문을 밀어 연 이안은, 두리번거리며 안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를 발견한 이안의 눈이 반짝였다.
‘찾았다! 저 녀석은 딱 봐도 뭔가 팔게 생겼잖아?’
조금 음침한 분위기라는 것만 제외하면, 한눈에 보아도 상점의 매대처럼 생긴 구조를 가진 건물 내부.
그리고 그 안쪽에서 꾸벅 꾸벅 졸고 있는 한 명의 NPC.
-쟈크람 고대 상인 로로크 / 레벨 : 알 수 없음
그를 발견한 이안은 신이 나서 그 앞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이안이 바로 앞까지 다가섰음에도 불구하고, ‘로로크’라는 이름의 NPC는 계속해서 졸기만 하였다.
“……!”
이안은 혹여 녀석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할까, 조심스럽게 그를 흔들어 깨웠다.
“저기요, 아저씨! 혹시 많이 피곤하세요?”
“드르렁.”
“조금 졸리시더라도, 잠깐만 장사하고 다시 주무시면 안 될까요?”
“푸우우.”
“후…….”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의 인내심이 슬슬 바닥날 무렵.
“으아앗-!”
갑자기 뜬금없이 괴성을 지른 ‘로로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변을 휙휙 돌아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염왕께서 다녀가신 건 아니지? 그렇지?”
영문을 모르는 이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나 말고 누가 온 것 같지는 않으니 걱정 않으셔도 될 것 같네요.”
“휘유…….”
이안의 대답에 가슴을 크게 쓸어내린 로로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염왕님 손에 머리채를 잡혀서 지옥으로 끌려 내려가는 꿈을 꿨어.”
“…….”
“지옥 세계에 있는 상점에서는, 하루에 8시간씩이나 일해야 한다던데……. 괜히 지옥이 아닌 거지.”
“무슨 루가릭스 같은 소리를…….”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로로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안에게, 로로크의 게으름에 참견할 시간 같은 것은 없었다.
“저, 아저씨…….”
“으응……?”
“아저씨가 지옥같이 게으른 건 알겠는데, 그래도 장사는 하셔야죠.”
“흐음, 귀찮은데…….”
“염왕님께 일러도 됩니까?”
“으아아악-!”
이안의 공갈협박에 소스라치게 놀란 로로크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하핫, 이 친구,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하나. 어서 물건을 골라 보시게. 괜히 염왕님께 가서 이상한 소리 할 생각은 말고 말이야. 으흐흣.”
이안은 허둥거리는 로로크를 보며,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이 아저씨 참……. NPC지만 캐릭터 하나는 확실하게 잡혔네.’
그리고 로로크를 안심(?) 시켜주기 위해, 몇 마디를 덧붙였다.
“아, 알겠어요 아저씨. 역시 농담이었던 거죠?”
“그럼, 그럼!”
“염왕님께 고할 일은 없을 테니까, 좋은 물건들로 한번 보여 줘 봐요. 물건이 마음에 들면, 제가 염왕님께 가서 아저씨 칭찬 엄청 해 드릴게요.”
“오옷……! 이제 보니 이거, 뭘 좀 아는 친구였구먼그래!”
이안은 당연히 로로크가 말하는 염왕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너스레를 떨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띠링-!
이안의 눈앞에, 쟈크람 상점의 판매품목이 주르륵 하고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번 골라 보시게나. 물건들 값이 싸지는 않지만, 대부분 여기가 아니면 구할 수 없는 귀중한 물건들이지.”
로로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찬찬히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물건의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하였고, 그의 말처럼 뭐 하나 평범해 보이는 것이 없었다.
물론 싸구려도 없었고 말이다.
‘어휴, 가격이 죄다 10만 냥 이상이네. 금화 파밍 제법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기대감 넘치던 이안의 표정은, 점점 더 아쉬운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상점에서 파는 장비들의 경우 이안이 봐도 탐이 날 만큼 뛰어난 물건들이었지만, 뛰어난 물건일수록 마족 유저 전용 아이템인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물론 마족 전용 장비라 하더라도 사다가 경매장에 올리면 억 소리 나는 값에 팔아치울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이안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돈이야 어떤 방식으로든 벌 방법이 많았고, 지금 이안이 원하는 것은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으면서도 이안에게 꼭 필요한. 그런 아이템이었으니 말이다.
‘보자……. 그럼 장비들은 일단 보류해 두고, 잡화로 분류되어있는 아이템들을 한번 확인해 볼까?’
수십 가지가 넘는 장비들을 전부 확인한 이안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잡화’ 탭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아직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나 가장 기대했던 품목은 장비류 아이템이었으나, 잡화 분류라 하여도 충분히 희귀하고 좋은 템이 있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잡화 텝의 판매 목록 화면에서 뭔가를 발견한 이안의 두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이건 대체 뭐야? 뭔데 장비들보다도 가격이 훨씬 비싼 거지?’
잡화 아이템 목록의 중간쯤 되는 부분에서, 무려 45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이 책정되어 있는 품목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고 전반적인 잡화 템들의 가격이 비싸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장비 품목의 가격이 대부분 10~30만 냥 정도였던 것에 반해, 대부분의 잡화 아이템은 10만 냥을 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음……. 일단 이것부터 확인해 볼까?’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 때문에 호기심이 생긴 이안은, 망설임 없이 해당 아이템의 정보를 오픈해 보았다.
-‘마령 각성의 비약’ 아이템 정보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른 정보 창을 읽어 내려가던 이안의 입에선…….
“뭐?”
너무도 놀란 나머지, 육성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