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6화 8. 새로운 정령을 만나다Ⅲ >
샬론으로부터 힌트를 얻어 아기로를 통해 받을 수 있었던 퀘스트인 ‘도장 사범 아기로의 부탁’ 퀘스트.
이 퀘스트는 사실, 정령계의 새로운 콘텐츠로 연결되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는 히든 퀘스트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령계의 ‘중위 콘텐츠’를 시작하기 위한 ‘힌트’ 같은 개념의 퀘스트였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이안은, 퀘스트가 준 그 힌트를 무척이나 완벽하게 캐치해 낸 셈이었다.
‘역시 내 생각대로였어.’
이안이 퀘스트 진행을 위해 받았던 아이템인 ‘조화의 구슬’과 ‘정령 계약서’는 그가 생각했던 대로 단순한 이벤트 아이템이 아니었다.
정령 보호소가 아닌 일반 필드에서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으며, 심지어 아기로는 그것들을 계속해서 구할 수 있는 방법까지도 있다 하였으니 말이다.
이안이 아기로의 이 퀘스트를 통해 얻은 가장 큰 것은, 사실상 보상이 아닌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정보!
‘이러면 어떤 정령이든 오염된 정령은 포획이 가능하단 얘기겠고, 그럼 상급을 넘어 최상급 정령까지도 포획할 수 있겠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이안을 보며, 아기로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조화의 구슬과 정령 계약서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도 당연히 궁금하겠지?”
아기로의 물음에, 이안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물론이죠. 제가 가지고 있는 조화의 구슬과 정령 계약서만으로는 이 정령산에 쌓여 있는 수많은 오염된 정령들을 정화하고 탐구하기에 턱없이 부족할 테니까요.”
“후후, 그럼 내 얘기를 한번 들어 보겠는가?”
“넵!”
“조금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끝까지 듣는다면 분명 자네에게 큰 도움이 될 걸세.”
이어서 아기로는, 정령계의 과거사 이야기를 시작으로 콘텐츠에 대한 정보들을 이안에게 하나씩 풀어주기 시작하였다.
아기로는 이야기가 지루할 지도 모른다 하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흥미진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우리 정령계가 처음부터 기계문명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었다네.”
“그렇……군요.”
“처음 그들이 침략해 왔을 때, 우리는 무척이나 손쉽게 기계괴수들을 몰아냈었지.”
처음 기계문명이 정령계를 침탈했을 땐, 정령계에서도 그들의 침략을 잘 막아 냈었다고 하였다.
고랄 종족을 비롯하여 오랜 기간 정령계를 지켜온 자연의 종족들, 그리고 정령왕을 위시한 정령들의 힘이 강력했을 뿐 아니라 기계 문명의 힘 또한 지금처럼 강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 차원의 균열이 열리고 기계 문명의 공격이 시작될 당시에는, 이안이 얼마 전까지 있었던 용천과 크게 다른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
그렇다면 그렇게 강대했던 정령계가 어쩌다가 이 정도로 몰락하게 된 것일까?
아기로는 그 이유가 자연의 종족 중 한 곳인 ‘파프마’ 종족의 배신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지금은 이 자연의 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이지만, 과거엔 ‘파프마’라는 이름의 종족이 정령산에 터를 잡고 살아갔다네.”
“그들도 사범님의 ‘고랄’ 종족처럼 자연의 종족인가 보죠?”
이안의 물음에, 아기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후후, 과거에는 그랬었지.”
원래 파프마 종족은 고랄 종족과 마찬가지로 정령들과 공생하는 자연의 종족이었다.
하지만 족장이 바뀐 뒤 그들 종족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타락해 갔고, 결국에는 정령을 융합하여 더욱 강력한 정령을 만들어 내는 금단의 비술에까지 손을 대기에 이르렀다.
고대의 정령계에서 전해져 내려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금기시된 비술인 ‘정령 연성술’.
그런데 그것을 연구하던 파프마 종족은 결국 다른 자연의 종족들에게 꼬리를 밟히고 말았고, 사면초가의 상황이 되어 정령왕들에게 심판당할 위기에 처하였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던 이안이 뭔가 궁금해진 것인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아기로 님.”
“말씀하시게.”
“그 정령 연성술이라는 것이 금단의 비술이라면, 고대의 정령계에서는 어째서 사용되었던 것인가요?”
‘정령 연성술’이라는 단어에서 또다시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냄새를 귀신같이 맡은 탓에, 참지 못하고 질문을 꺼낸 것.
이안의 물음에 아기로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하였다.
“원래부터 정령 연성술이 금지된 비술은 아니었다네. 고대에 사용되었던 정령 연성술은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령의 힘을 융합하여 새로운 정령을 탄생시키는 창조의 비술이었으니 말이야.”
“그럼……?”
“다만 그 ‘정상적인’ 비술은 거의 사장되다시피 하였고, 파프마 종족에서 연구하던 비술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기형적인 것이었지. 그게 문제였어.”
아기로의 말에 의하면, 원래 정령 연성술은 정령 자체를 융합하여 새로운 정령을 만들어내는 개념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모종의 방법으로 정령이 가진 원소의 힘을 추출해 내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새로운 정령을 창조해 내는 창조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비술은 고대의 역사 속에 사장되었고, 파프마 일족의 정령 연성술은 그것을 흉내 낸 금단의 비술이었다.
정령이 가진 원소의 힘만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두 개체 이상의 정령을 강제로 융합시켜 새로운 정령을 탄생시키려는 시도였으니 말이다.
“파프마 일족이 연구하던 방식으로 정령을 융합시킨다면, 기존의 정령들이 갖고 있던 영혼은 말 그대로 소멸되어 버리고 말지.”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그게 파프마 일족이 탄압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어.”
“이해했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안을 잠시 응시한 아기로가 빙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궁금증이 해결되었으면, 다음 이야기를 해도 되겠는가?”
“넵!”
“험험!”
헛기침을 하며 잠시 뜸을 들인 아기로는, 파프마 일족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여하튼 그렇게 위기에 처한 파프마 일족은, 살아남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기계문명에 손을 뻗었다네.”
“아……!”
“그들과 모종의 거래를 한 뒤 기계 문명의 땅인 라카토리움으로 도망쳐 버린 것이지.”
파프마 종족은 그 선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선택 때문에, 정령계에는 재앙이 시작되었다.
금단의 비술을 연구하던 파프마 일족은 정령에 대한 수많은 타락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기계 문명과의 거래에서 정령의 영혼을 오염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 것이다.
“기계 문명은 그 뒤로 은밀히 정령계의 정령들을 오염시키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곧 우리 정령계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지.”
“아…….”
“처음 오염된 정령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우린 그들을 정화할 방법조차 알지 못했으니 말일세.”
고랄 종족을 비롯한 자연의 종족들은, 오염된 정령들을 정화시키기 위한 연구를 밤낮으로 거듭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기계 문명의 세력들은, 정령계를 차츰차츰 잠식해 갔다.
“자, 이쯤 되면 내가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왜 꺼냈는지 알아차렸을 수도 있겠군.”
아기로의 말에, 이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염된 정령을 정화할 수 있는 ‘조화의 구슬’이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요?”
아기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바로 맞췄네.”
“……!”
“우리 고랄 종족이 연구 끝에 탄생시킨 것이 바로, 이 ‘조화의 구슬’이니 말이야.”
이어서 아기로는, 드디어 조화의 구슬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였다.
“조화의 구슬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원료, 그것이 바로 ‘생명의 결정’이라는 보석이라네.”
아기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생명의 샘을 찾아서 (히든)(에픽)’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 * *
아기로의 이야기는 그 후로도 이어졌지만, 그리 길지도 않았을 뿐더러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다.
다만 이제까지 길고 길었던 기계 문명과의 싸움.
그에 대한 한탄에 가까운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안은 고랄 종족과의 친밀도를 위해서 그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주었고, 기분이 좋아진 아기로로부터 선물도 받을 수 있었다.
-‘조화의 구슬×30’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정령 계약서’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푸짐한 선물까지 챙긴 이안은, 기분 좋게 도장을 나설 수 있었다.
‘정령 하나 얻으려고 갔다가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엄청 얻었어. 정령계 메인 퀘도 하나 받았고 말이지.’
‘에픽’이라는 수식이 붙어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정령계의 메인 스토리와 연계되어 있는 퀘스트인 ‘생명의 샘을 찾아서’ 퀘스트.
이안은 아이언의 등에 올라 정령산을 향해 이동하면서, 퀘스트 창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생명의 샘을 찾아서 (히든)(에픽)
……전략……
파프마 종족의 배신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오염되어 가던 정령계의 정령들.
오염된 정령들을 정화시키기 위해 고랄 종족이 찾아낸 방법은, 강력한 자연의 기운을 가진 ‘생명의 샘’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생명의 샘이 가지고 있는 자연의 힘을 응축시켜 ‘생명의 결정’으로 가공하고, 그것을 원료로 만든 ‘조화의 구슬’로 정령들을 정화시킨 것이다.
……중략……
생명의 샘은 정령산 곳곳에 있으나, 자연의 기운이 강력한 높은 지대에서 찾기 쉬울 것이다.
정령산 중턱 위로 올라가 생명의 샘을 찾아보자.
생명의 물을 충분히 떠서 고랄 종족의 정령 수호자에게 찾아간다면, 그것으로 ‘조화의 구슬’을 만들어 줄 것이다.
퀘스트 난이도 : A
퀘스트 발동 조건 : ‘도장 사범 아기로의 부탁(히든)’ 퀘스트 클리어.
정령의 도장 30층 클리어.
퀘스트 클리어 조건 : ‘생명수’ 다섯 되 이상 채집.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 생명의 자루
아기로에게서 받은 퀘스트 창은 무척이나 긴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아기로로부터 들었던 정령계의 슬픈(?) 역사에 대한 내용이었고, 결국 결론은 간단하였다.
정령산의 높은 곳으로 올라 생명의 샘을 찾은 뒤 그곳에서 솟아나는 생명수를 떠다가 정령 수호자를 찾아가라는 것.
아기로는 생명수를 뜰 수 있는 ‘생명의 두레박’을 이안에게 주었고, 퀘스트 클리어 조건에 쓰여 있는 ‘생명수 다섯 되’라는 것은 그 두레박으로 다섯 번 퍼 올린 만큼의 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퀘스트 창을 다시 다 읽은 이안은,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하였다.
어쩌다 보니 해야 할 일들은 복잡하게 쌓였지만, 결국 방향성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어차피 기계 로봇을 만들기 위한 설계도를 구하기 위해서도 정령산 중턱을 넘어야 했으며, 강력한 오염된 정령을 찾아 포획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지금 이안이 진행하고자 하는 콘텐츠들은, 모두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좋아, 아주 마음에 드는 효율적인 플랜이군.’
아이언의 등에 오른 채 빠르게 허공을 가르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 이안.
그런데 그때, 이안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아, 이제 바쁜 일은 다 끝났냐뿍.”
오전부터 이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입을 씰룩거리던 뿍뿍이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