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7화 6. 정령수 차르타 (3) >
* * *
정령산 북쪽에는, 높다랗고 웅장한 네 개의 봉우리가 솟아있다.
각각 샤이야, 호른, 마타야, 루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네 개의 서로 다른 봉우리들.
이 네 개의 봉우리는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마름모의 형태로 솟아올라 있었고, 정령산의 수 많은 지역들 중에서도 무척이나 특별한 곳이었다.
생명력이 넘치는 정령산의 한복판에서, 모든 생명의 힘을 잃고 얼어버린 유일한 지역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고랄 종족은 이 네 개의 봉우리를 일컬어 비타 스텔라Vita Stella라고 불러왔소이다.”
“비타 스텔라……. 그게 무슨 뜻인데요?”
“‘생명의 별’이라는 뜻이라오.”
“아…….”
물론 정령산 내에 생명의 힘을 잃은 곳이 비단 이 네 개의 봉우리들만은 아니었다.
기계 문명의 침략이 있은 이후 그들의 손이 뻗친 많은 지역들이 회색지대로 변해 왔으니까.
하지만 ‘비타 스텔라’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이 네 개의 봉우리들은, 그런 곳들과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곳이었다.
그곳들은 기계문명의 마수에 의해 ‘오염’된 것이었지만, 오히려 이 네 개의 봉우리들은 전혀 오염되지 않았던 것이다.
‘비타 스텔라’는 기계 문명의 침략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자체적으로 생명력을 잃고 한파 속에 봉인된 특별한 지역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의 상황을 예견하신지도 모르겠구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동안 이곳 정령계의 많은 부분들이 기계 문명으로 인해 썩어 들어갔지만, ‘비타 스텔라’만큼은 아직 전혀 오염되지 않았으니 말이오.”
“엇, 그래요? 그건 왜 그런 건가요?”
“그 이유는 간단하오.”
“……?”
“이미 모든 생명이 얼어붙은 지 오래였던 비타 스텔라는, 기계 문명의 침략자들에게 아무런 매력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아,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모든 생명의 힘을 잃었지만, 동시에 그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특별한 지역이 바로 비타 스텔라요.”
카일란 전 서버를 통틀어도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탐험가’ 클래스 랭커인 릴슨.
탐험가 클래스의 특성과 스킬들을 이용해 수많은 숨겨진 콘텐츠들을 찾아온 릴슨은, 항상 로터스 길드의 등대가 되어 왔었다.
그리고 지금 릴슨이 정령계에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많은 유저들이 유입된 탓에, 비교적 여 러가지 정보가 오픈된 명계와 달리 정령계의 콘텐츠들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었으니 말이었다.
숨겨진 정보들을 최대한 빠르게 찾아내어 길드에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탐험가’ 클래스 유저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공헌!
로터스 길드로부터 많은 장비들을 지원받는 릴슨은 오늘도 그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장로님께서 비타 스텔라를 언급하신 이유는 혹시 ‘성령의 유적’과 관련된 단서 때문입니까?
“바로 그렇소이다.”
“하지만 성령의 유적은 ‘생명의 힘이 가득한 곳’에 있다 하였는데……. 비타 스텔라는 모든 생명을 잃은 지역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사실, 바로 얼마 전까지의 이야기일 뿐이오.”
“……?”
“놀랍게도 며칠 전부터, 비타 스텔라의 봉우리 중 한 곳에 생명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런 일이……!”
“비타 스텔라는 오랜 기간 생명의 힘이 봉인되어 있던 곳이니, 아마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내재하고 있을 터.”
“아마도 그렇겠지요.”
“어쩌면 이곳이야말로 성령의 유적이 잠들어 있는 장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소이다.”
지금 정령산에서 릴슨이 찾고 있는 것은, 고대 정령계의 유적들이었다.
그것들이야말로 정령계의 메인 시나리오와 이어진 가장 강력한 단서들이었고, 많은 숨겨진 콘텐츠들이 연계되어 있는 ‘보물창고’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숨겨진 단서들을 찾아내서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릴슨의 많은 노력과 시간이 담겨 있었다.
“만약 그대가 성령의 유적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엘리샤 님께서 남기신 단서를 찾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겠지.”
“후우. 꼭 해낼 겁니다, 장로님.”
“무운을 빌겠소, 릴슨 공.”
이어서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릴슨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숨겨진 성령의 유적Ⅱ (에픽)(연계)’ 퀘스트가 발동되었습니다.
-‘정령계 탐험일지 A-5’의 완성도가 1.5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직업 숙련도가 0.4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후략……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릴슨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연계 퀘스트가 떴다는 것은, 제대로 된 방향으로 탐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었으니 말이다.
배태랑 탐험가답게, 생각했던 대로 퀘스트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는 릴슨!
‘그래. 최초로 정령왕을 만난 탐험가가 된다면 클래스 티어 상승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모든 일이 항상 술술 풀려 나가지만은 않는 법.
한껏 기분이 고양되어 있는 릴슨을 향해, 고랄 장로의 청천벽력 같은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릴슨 공, 비타 스텔라에 가기 전에 한 가지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소이다.”
“그게…… 뭔가요?”
장로의 말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낀 릴슨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만약 비타 스텔라에 성령의 유적이 있다면, 분명 ‘생명의 계곡’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오.”
“생명의 계곡이라면…….”
“강력한 생명의 힘을 담은 생명수가 끝없이 흘러넘치는, 깊고 아름다운 계곡을 말함이지.”
“그런데 그게 왜……?”
“문제는 평범한 인간이 생명의 계곡에 발을 들일 방법이 없다는 것이오.”
“……!”
“그곳을 보호하는 강력한 생명의 결계를 통과하려면, 특별한 존재가 필요하지.”
고랄 장로의 말에, 순식간에 우울한 표정이 된 릴슨.
‘아, 또 뭘 구해야 한다는 거야? 제발 할 만한 걸 시켰으면 좋겠는데…….’
이어서 잠시 뜸을 들인 장로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정령산 어딘가에 존재하는 생명의 샘을 먼저 찾으시오.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정령수 ‘차르타’를 만난다면, 녀석에게 도움을 한번 청해 보시구려.”
“정령수 차르타라…….”
“까다로운 녀석이라 인간의 부탁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녀석이라면 생명의 결계를 통과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오.”
이어서 릴슨의 눈앞에, 또다시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띠링-!
-선행 퀘스트, ‘정령수 차르타를 찾아서’가 발동합니다.
그리고 릴슨은 살짝 혼란스런 표정으로 퀘스트 창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 * *
“그러니까…… 내가 방금 잡은 이 녀석이 필요하다는 거야?”
“네, 이안 님. 생명의 계곡에 들어가려면, 차르타의 도움이 꼭 필요하거든요. 혹시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흠, 어떻게 도와 달라는 거지?”
“차르타를 반나절만 빌려주시면 되요. 저는 계곡에 있는 생명수만 퍼 올리면, 곧바로 계곡에서 다시 나올 거니까요.”
“여기 생명의 샘에서도 생명수를 퍼 올릴 수 있잖아?”
“이런 농도 낮은 생명수로는 턱도 없어요.”
“흐음, 생명의 계곡이라…….”
생명의 계곡을 찾아 무작정 오두막을 떠났던 아렌은, 며칠을 헤맨 끝에 샤이야 산맥의 중턱에서 계곡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북이 쌓여있던 만년설이 아직 다 녹지도 않은 커다란 협곡 사이로, 거짓말처럼 콸콸 흘러내리고 있는 새파란 계곡.
하지만 아렌은 계곡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주변을 막고 있는 반투명한 장벽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기라도 하듯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보려 하였으나,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거짓말처럼 몸이 밀려나가 버렸던 것.
그러고 나서 아렌이 알게 된 것이, 바로 정령수 ‘차르타’의 존재였다.
그녀의 정령이자 고대 물의 정령인 ‘루루’가 고대의 기억을 되살려 알려준 것이다.
-생명의 수호자 차르타라면 여길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주인.
-차르타?
-응. 생명의 샘을 지키는 수호자인데, 고대부터 존재해 온 정령수이기도 해.
-……!
-녀석을 찾아가서 한번 부탁해 보자, 주인.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까?
-내가 한번 얘기해 볼게.
하지만 겨우 ‘차르타’를 찾아낸 아렌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신령스런 고대의 정령수라던 ‘차르타’가 인간의 손에 포획되어 버리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정령수는 우리 엘프 정령술사들도 길들이기 힘든데, 인간이 고대의 정령수를 길들이다니!’
심지어 이안이 차르타를 학대하는(?) 과정을 하나도 보지 못한 아렌은 그가 정말 대단한 정령술사로 보였다.
마치 과거의 전설적인 인간 정령술사 ‘판’처럼 말이다.
해서 아렌은, 정말 존경 어린 눈빛으로 이안에게 부탁하였다.
“염치없지만 부탁 좀 드릴게요, 이안 님. 생명수만 있으면, 할아버지께서 다시 건강해질 수 있거든요.”
“흐음…….”
“만약 도와주신다면,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아렌이 말을 마치자마자, 이안의 귓전으로 익숙한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돌발 퀘스트가 발동하였습니다.
-‘엘프 정령술사, 아렌의 부탁(히든)’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그리고 퀘스트가 발동한 것을 확인한 이안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음은 물론이었다.
‘이거 뭔가 재밌는 냄새가 나는데…….’
이안은 사실 퀘스트가 없었더라도, 아렌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그녀를 따라 ‘생명의 계곡’이라는 곳에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렌의 말에 의하면 그곳에 차르타와 연관된 어떤 콘텐츠가 있을 것이었으니, 이안으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거기에 이렇게 히든 퀘스트까지 떠오른 이상, 이안을 움직일 동기부여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생명의 계곡에 가는 걸 도와 달라…….”
“넵! 부탁드려요.”
아렌과 눈이 마주친 이안이, 씨익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조건……요?”
살짝 불안한 표정이 된 아렌을 향해,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 생명의 계곡이라는 곳에 나도 함께 가야겠어. 이 조건만 들어준다면 도와주도록 할게.”
이안의 대답을 들은 아렌의 커다란 두 눈이, 휘둥그레 확대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안의 대답에, 감격하고 만 것이다.
“저, 정말이죠?”
이안이야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욕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었지만, 아렌은 그것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해 버린 것.
‘그냥 차르타만 잠깐 빌려주셔도 되는데, 직접 도와주시겠다니……!’
뭔가 약간의(?) 오해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안에 대한 아렌의 호감도는 급상승하였고…….
“고, 고마워요, 이안 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이안과 아렌은 샤이야 봉우리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