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2화 4. 고대 유적의 가디언들 (1) >
철우와의 딜이 끝난 뒤 이안 일행은 미련 없이 호루스 지하기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기지에서 나오자, 일시적으로 봉쇄됐던 던전은 곧바로 정상화되었다.
-이제부터 ‘호루스 지하기지’ 던전이 다시 정상화됩니다.
-정상적인 플레이가 가능합니다.
카일란에서는 정말로 보기 드문 개발사에 의한 던전 봉쇄.
10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의 일이었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유저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지하기지에서 어떤 히든 피스가 발견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며, 어떤 버그가 발견되어 잠시 개발진이 개입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리고 몇몇 유저들은 던전에 나타난 이안 일행과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내었으나 이 가설은 금방 묻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유저 하나 때문에 던전이 정지되었다는 가설 자체가 잘 상상되지 않았으며, 이안과 연결 짓기에는 시간대가 애매했으니 말이다.
“이안 일행이 들어가고 거의 7시간 뒤에 발생한 일인데, 그쪽과 연결 짓는 건 좀 무리수인 듯.”
“하긴, 그것도 그래. 최하층이 계속 잠겨 있긴 했지만, 7시간 동안 이안 파티만 있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갑작스레 만들어진 이 소란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이 소란을 만들어 낸 이안 일행이 이미 던전 인근 지역을 멀찍이 벗어나기도 했거니와 던전이 봉쇄됐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유저도 더 이상 특이점을 찾아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사냥이나 하자고, 브로.”
“그래. 던전 봉쇄 이후에 드롭 아이템이 추가됐을지도 모르잖아?”
“뭐, 그렇게 행복 회로를 돌려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여하튼 잠시 이슈가 됐었던 이 사건은 그렇게 자연스레 묻혀 갔고, 한나절 동안 던전의 단물을 쪽쪽 빨아낸 이안 일행은 우선 소르피스 내성의 길드 거점으로 복귀하였다.
물론 거점에 있던 로터스 길드원들 사이에서,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소란이 일기는 했지만 말이다.
“뭐, 뭐야? 훈이 너……!”
“후후.”
“대체 하루 동안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야? 니들 레벨이 왜 이래?”
“와 씨, 훈이랑 레비아님 레벨 봐! 미쳤어! 82렙이잖아?”
“이안갓은 84렙인데?”
“…….”
“와, 이런 버그 유저들! 당장 로그아웃해서 신고하러 가야겠어!”
7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이 지났다 해도 믿기 힘들 만큼,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레벨 업을 한 이안과 삼인방.
그들의 레벨을 확인한 길드원들이 충격과 혼돈 속에 빠진 것이다.
“하아, 현자 타임 오네. 초월 50레벨대인 나도 한나절 동안 1업을 못 했는데…….”
“1업이 뭐야, 형. 경험치 한 30퍼센트 정도 깐 거 같은데?”
“크윽, 갑자기 내 게임 인생이 불행해졌어.”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특히 배 아픈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레미르였다.
삭풍의 던전 공략을 위해 하드 트레이닝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미 용암의 지팡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안도하였었는데 하루 만에 이안이 이런 기괴한(?) 결과를 뽑아낼 줄은 상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럴 수가…….”
특히 길드의 광역 딜러 담당으로서, 알게 모르게 라이벌(?) 관계였던 훈이의 어마어마한 성장은 그녀에게 충격과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역시 이안갓이 어디 간다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단 따라가야 되는 건가…….’
이제부터는 이안의 꽁무니를 바짝 쫓아다녀야겠다고,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하는 레미르였다.
* * *
“오, 박 팀장,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크으! 역시 박 팀장을 보내길 잘했어. 깔끔하게 해결했구먼!”
“제가 뭐랬습니까. 역시 한번 이안을 만나 본 박 팀장이 가야 일이 잘 풀릴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좋아, 좋아. 이정도면 아주 훌륭해.”
LB사 본사 건물의 15층에 있는 카일란 운영 팀의 회의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던 회의실의 안에는, 화기애애한 목소리들이 피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분위기가 밝아진 이유는, 당연히 이안과의 딜이 성공적으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히든 콘텐츠들에 대한 단서를 몇 개 주긴 했지만, 어차피 이안이라면 시간이 지나 진행하게 될 콘텐츠였습니다.”
“후후, 그렇다고 들었네.”
“그리고 어차피 초월 80레벨 정도로 클리어할 수 있는 던전들이 아니니, 그 정보들을 알아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겁니다.”
“역시 철우 팀장이 일을 잘한단 말이지.”
철우가 올린 보고서를 쭉 읽어 내려가던 운영실의 실장 윤진택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해도 신화 등급 장비 한두개는 뜯길 각오를 하고 철우를 보냈던 것이었는데, 실질적인 아이템을 아무것도 뜯기지 않고 협상이 마무리되었으니 게임의 세부 콘텐츠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그로서는 너무도 만족스러운 결과였던 것이다.
“좋아, 박 팀장. 보고서 정리해서 기획실 쪽으로 보내도록 해. 문제는 잘 해결됐다고 말이야.”
“옙! 알겠습니다, 팀장님!”
기분 좋은 표정의 윤진택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철우는 보고서 파일을 집어 들고 회의실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리고 회의실을 나오는 철우의 표정 또한 해맑기 그지없었다.
그의 직속 상관인 윤실장이 만족했다는 사실이 그에겐 무엇보다 중요했으니 말이다.
“뭐, 이안이 유적들을 한 달 내로 클리어해 버린다거나 하면 기획 팀 쪽에서 골치가 아파지겠지만,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
기획 팀의 입장에서는 복장이 터졌을 법한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천천히 복도를 걷는 박철우.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어차피 밸런스 잘못 잡은 기획 팀 잘못이니까 뭐.’
그에 더해 나지찬이나 김의환이 들었더라면 곧바로 원수지간이 될 만한 이야기를 속으로 중얼거린 철우는, 기획 팀에 보고서를 넘기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철우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가 탑승한 바로 옆 엘리베이터에, 이미 새하얗게 얼굴이 질린 나지찬이 타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 * *
“난 이제 볼일 보러 간다, 제군들.”
“……?”
“그렇게 바쁘게 어딜 또 가는 건데요?”
“나도 따라가면 안 돼, 형?”
“응, 안 돼. 나 없는 동안, 삭풍의 절곡이나 깔끔하게 클리어해 두라고.”
“쳇.”
“다시 얘기하지만, 기회는 한 번뿐이야. 한 사람당 한 번 도전하면 더 이상 도전할 수 없다고.”
“레미르 누나한테 이미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거든?”
“마지막 수호자 못 잡아서 신화 무기 날리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훈이.”
“걱정 붙들어 매시라고. 이 훈이가 어둠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잊은 모양인데…….”
소르피스 내성의 길드 거점에서 잠시 정비를 마친 이안은, 곧바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훈이와 유신, 레비아에게 삭풍의 절곡 좌표를 공유해 준 뒤, 바람처럼 또 종적을 감춰 버린 것이다.
기사단장으로서 진행해야 할 길드 기사단의 퀘스트들은, 빠르게 카노엘에게 전부 인수인계한 뒤에 말이다.
‘일단 다른 모든 일들은, 심판검을 전부 모은 뒤에 생각하기로 하자고.’
이안이 생각하기에 세 자루의 심판검들은 단순한 신화 등급의 초월 장비가 아니었다.
물론 세 자루를 다 모으기 전까지는 용암의 장비보다도 기본 스펙이 부족하지만, 세트 옵션이 발동되는 순간 그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유적을 전부 깔끔하게 클리어하고 한 단계 성장한 뒤에는, 정말 기계문명과 한바탕 드잡이질을 벌일 때가 올 것이었다.
‘찰리스고 나발이고, 심판검만 다 모으면 게임 끝이야. 특히 악령의 심판검만 있으면…….’
기계 문명의 괴수들은 대부분 무속성이지만, 종종 정령과 융합되어 속성을 가지는 상위 개체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안이 본 그들은 대부분 시온 속성이었으니.
시온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악령의 검만 있으면, 훨씬 더 수월하게 전투를 벌일 수 있으리라.
“불용아, 형이 좀 급하니까, 속도 좀 내 봐.”
“크릉! 내가 느린 게 불만이면 다른 녀석을 타라, 주인!”
“어쭈. 너 자꾸 반항하면, 이름을 아예 불용이로 바꿔 버리는 수가 있어.”
“크이익!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왜 없어? 소르피스 성에 있는 신전에 가서 한 1백 코인 정도만 헌금하면, 네 이름 정도는 바로 바꿔 줄걸?”
“캬악! 비겁한 주인이다……!”
“원래 자본주의란,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야, 짜식아.”
“크윽! 그거 신성모독이다, 주인!”
라카도르는 이안의 협박에 심통 난 표정이 되었지만, 그것와 별개로 그의 날개는 더욱 빠르게 펄럭이기 시작하였다.
악덕 주인인 이안이라면 정말로 1백 코인을 들고, 신전에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펄럭.
그리고 라카도르를 놀리는 이안의 모습을 즐겁게 구경하고 있는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이안이 가장 최근에 고용한 가신, 아렌이었다.
“헤헤, 불용이라는 이름은 아무리 봐도 귀여운 것 같아.”
“크르르! 시끄럽다, 아렌! 난 별로 귀엽고 싶지 않아.”
“네가 귀엽고 싶지 않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을 걸?”
“감히 엘프 꼬맹이가……!”
“중요한건 불용이가 귀엽다는 거니까.”
“크으으으!”
이안과 아렌이 라카도르를 놀리는 재미에 푹 빠진 동안, 그들은 금세 악령의 유적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미니 맵에 정확한 좌표가 찍혀 있었기 때문에, 도착하는 데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이다.
쿵-!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커다란 바위에 내려앉은 라카도르.
하지만 좌표를 찾아 도착한 것과 별개로 이안이 곧바로 유적에 입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좌표를 앎에도 불구하고, 던전의 입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마 성령의 유적 입구처럼, 어떤 트릭에 의해 숨겨져 있는 것이겠지.’
탓-!
라카도르의 등에서 뛰어내린 이안이 험준한 바위들을 훑어보기 시작하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곳에 왔다면 모를까, 확실한 좌표를 알고 있는 이상 숨겨진 트릭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흠, GM이 찍어 준 좌표대로라면 저 아래쪽 어딘가가 유적 입구라는 소리인데…….’
이안은 성령의 유적 입구에 들어서던 때를, 머릿속으로 곰곰이 복기해 보았다.
아무래도 세 개의 유적 자체가 병렬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 콘텐츠이다 보니, 진입 과정도 비슷할 확률이 높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안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연히 고대의 정령 미루였다.
‘성령의 유적을 찾을 땐, 얼음에 갇혀 호수에 둥둥 떠 있던 미루가 열쇠였지.’
생각을 마친 이안은 곧바로 아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렌, 미루를 불러 줘.”
“잠시만요!”
우우웅-!
고통에서 해방된 미루는 자연으로 돌아갔지만, 아렌의 정령이자 그녀의 쌍둥이인 ‘루루’의 부름에는 응답했으니 말이다.
“루루, 미루를 잠깐 불러 줄 수 있겠니?”
-알겠어, 아렌. 잠시만 기다려 봐!
아렌과 루루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며, 유적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설렌 표정이 된 이안.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근처에서 이안 일행을 지켜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