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1화 2. 유적의 계승자 (2) >
* * *
비터스텔라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가장 높은 난이도의 필드이기도 한 지역인 루판.
평균 초월 레벨이 90 중반대인 이 루판은, 오늘도 무척이나 한산한 분위기였다.
필드 자체의 넓이는 무척이나 광활한 데 반해, 아직 이곳에서 사냥 가능한 파티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필드 몬스터의 레벨로만 따진다면, 라카토리움의 ‘오염된 대지’보다도 더 상위 티어의 사냥터인 루판 산맥.
이곳에서 사냥이 가능한 파티는 사실상 서너 파티 정도뿐이었으며, 그들조차도 아직 제대로 된 효율을 뽑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들조차 이제야 사냥 가능한 스펙을 겨우 맞춘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루판 산맥의 사냥터들은 무척이나 평온하였다.
애초에 같은 종족끼리는 PK도 되지 않는 필드였던 데다, 사냥터에 사냥감이 넘쳐나고 있었으니 길드 간의 분쟁이 일어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평온했던 루판 산맥의 사냥터.
하지만 이 평화로웠던 사냥터도 조금씩 경쟁의 장으로 변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며칠 전에 나타난 불청객(?)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흐으, 훈이랑 유신형 템이 좋아져서 그런지, 확실히 클리어 속도가 빨라졌네요.”
부기사단장 카노엘의 말에, 옆에 있던 훈이가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으흐흐, 방금 광역 폭딜 봤지? 이제 데스 메테오 한방 당 10만 넘게 딜 뽑힌다고.”
이어서 유신 또한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삭풍 너클 덕에, 생존력이 훨씬 올라갔어.”
“그거 딜 템인데 생존력이 왜 올라?”
“최대 체력 비례 흡혈 달려 있거든.”
“오……!”
“공속만 올리면, 흡혈량 장난 아니더라고.”
로터스의 천룡기사단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시 용천으로 사냥터를 옮겼었다.
단장인 이안이 빠진 데다, 핵심 전력 세 사람이 이탈하였으니.
평균 초월 레벨이 80레벨이 넘는 비터 스텔라에서의 사냥이 효율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빠져나갔던 세 사람이 복귀하자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현존 최상위 티어 장비들이라 할 수 있는 삭풍 세트로 무장한 삼인방이 합류하자, 파티 전투력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간 것이다.
유적을 발굴(?)하러 떠난 이안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지만, 그가 없는 상황에서도 이전보다 더 빠른 사냥 속도가 나올 수준이었으니 삭풍 세트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카노엘 형.”
“응?”
“스콜피언 놈들, 아직도 첫 번째 캠프에서 빌빌대고 있던데, 걔들 주변 캠프부터 야금야금 털어 버릴까?”
사악한 표정으로 실실 웃는 훈이를 향해 카노엘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였다.
“지금 굳이 같은 인간계 진영의 길드를 견제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흐음, 그런가?”
“괜히 분쟁 만들지 말고, 널려 있는 다른 캠프들부터 싹 털고 생각하자고.”
노엘의 말에, 옆에 있던 피올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부단장님 말이 맞아요. 이제 마족 진영이랑 이어지는 균열 좌표도 여섯 군데나 밝혀졌고……. 사실상 언제 마족 녀석들과 전쟁이 날지 모르는 상황이잖아요.”
“쳇, 스콜피언 놈들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훈이는 지금 사실 몸이 근질거리는 상태였다.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장비들로 전신을 도배하고 나니, 싸움을 일으키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이다.
물론 몬스터들을 때려잡는 PVE도 충분히 재밌었지만, PVP를 할 때만큼의 긴장감은 느낄 수 없었던 것.
지금이라면 어떤 랭커를 만나도 일대 일로는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훈이였다.
‘물론 이안갓은 빼고 말이지.’
여하튼 업그레이드된 장비들로 의욕적인 삼인방 덕에, 오늘도 루판 산맥을 휘젓고 다니는 로터스의 기사단 파티.
그런데 하루의 사냥이 끝나 갈 무렵.
훈이를 무척이나 기쁘게 해주는 월드 메시지가 모두의 눈앞에 떠올랐다.
띠링-!
-‘마드룬’ 길드가 ‘신성 기사단’을 창단했습니다!
-중간계에 ‘기사단’을 보유한 길드의 숫자가 서른두 곳이 되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금일 자정을 기준으로 열흘 뒤, 첫 번째 기사대전이 열립니다.
-기사대전
-소르피스 내성의 광장에서 일정표대로 진행되는 결투입니다.
-10팀이 남을 때까지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며…….
……후략……
* * *
꿀꺽.
릴슨은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쾅- 콰쾅-!
“흐익!”
다만 흩날리는 바위 파편과 광역 대미지를 피하기 위해, 정신없이 도망다닐 뿐인 릴슨.
그는 사실, 전투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니, 저 미친 골렘은 뭐로 만들어졌기에 속도가 저리 빨라?’
그저 최종 보스 격인 심연의 군주가 밸런스를 붕괴시킬 만큼 강력한 고유 능력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
‘기사단 다 끌고 와서 레이드해도, 쉽지 않을 난이도인데 이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릴슨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실상 종교나 다름없는 존재.
이안이 아직 버티며 싸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뭔가 방법이 있겠지. 이안이라면 말야.’
하여 릴슨은, 부상당한 이안의 소환수들에게 아껴 뒀던 마법 스크롤들을 아낌 없이 사용하였다.
“인벨리드 스펠Invalid Spell!”
“헤이스트Haste!”
조금이라도 이안의 공략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릴슨의 노력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이안은 정말 필사적이었다.
‘젠장. 조금만 더 적응되면,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안과 심연의 군주.
둘 간의 전투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함의 연속이었다.
일방적인 딜을 넣는 것처럼 보이던 이안의 생명력이 단 한 번의 카운터로 바닥까지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원거리 딜이라도 박히면 훨씬 더 수월했을 텐데. 어떻게 보면 진짜 약점이 없는 녀석이군, 저거.’
처음 강력한 카운터 펀치를 경험한 이안은 아예 전략을 선회했었다.
소환수들을 활용해 보스 어그로를 이리저리 분산시키며, 블래스터와 마그번을 활용해 원거리에서 딜을 넣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전략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원거리 공격에 대한 안티 스펠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심연의 군주’의 고유 능력, ‘심연의 자기장’이 발동합니다.
-자기장 안으로 들어온 모든 투사체의 투사 속도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자기장을 통과하는 동안, 매 초마다 투사체의 위력이 5퍼센트만큼 감소합니다.
마법이나 정령에는 아예 면역에 가까운 녀석이었던 것이다.
-‘심연의 군주’의 고유 능력 ‘원소의 지배자’가 발동합니다.
-‘속성’을 가진 모든 피해를 90퍼센트만큼 흡수합니다.
-10초에 걸쳐 흡수한 피해를 천천히 입습니다.
-‘원소의 지배자’ 고유 능력이 발동하는 동안, ‘심연의 군주’의 생명력 재생 속도가 20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뭐 이런 거지발싸개 같은……!”
해서 결국 이안의 전략은 원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괴상한 방어형 패시브 스킬들을 가진 데다 기본 맷집 자체가 상당한 이 괴물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결국 악마의 심판검을 쑤셔 박는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타임 홀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대략적으로라도 알아냈다는 정돈데…….’
이안이 파악한 ‘타임 홀’ 고유 능력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대략 3분 정도였다.
때문에 3분에 한 번씩 오는 이 타임 홀 페이즈를 잘 극복해 내는 것이, 결국 이 전투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
콰앙-!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텐가, 이안!
가까스로 심연의 군주의 공격을 피해 낸 이안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드라고닉 배리어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좀만 더 짧았어도 어떻게 해 볼 텐데…….’
머릿속으로 소환수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스킬들을 조합해 가며, 녀석의 공격을 파훼할 방법을 찾으면서 말이다.
‘타임 홀이 발동되는 순간, 디스펠이라도 걸어 버릴까? 아니. 버프 스킬은 또 아니라서 디스펠은 안 걸리겠지?’
모든 버프 마법을 한 번에 해제할 수 있는 디스펠 계열의 마법까지 떠올리는 이안.
그런데 바로 그때.
이안의 뇌리에, 타임 홀을 카운터 칠 기가 막힌 방법이 떠올랐다.
* * *
이안이 기가 막힌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사실 타임 홀 이라는 스킬의 본질적인 개념을 고민한 덕분이었다.
10초 동안 누적된 모든 둔화 효과를 풀어내며, 해당 효과로 인해 ‘손해 본’ 움직임을 1초 동안 폭발시키는 스킬인 타임 홀.
처음에 이안은 타임 홀이 단순 버프 스킬이라 생각하였으나, 조금 더 생각해 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에는 어디에도, 심연의 군주가 버프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었으니 말이다.
만약 버프였더라면 구체적인 계수가 명시되었을 텐데, 그저 ‘폭발적으로 가속됩니다.’ 라는 문구만이 남아 있었던 것.
타임 홀은 군주의 움직임 자체를 빠르게 해 주는 것이 아닌, 녀석의 시간만 빠르게 감아 버리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안은, 여기서 한 가지 힌트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어둠의 시계태엽. 그걸 왜 생각 못 했을까!’
흑마법사 클래스 8서클의 보조 마법 중 하나인, 어둠의 시계태엽.
신의 말판 전장에서 훈이가 이안을 서포팅할 때 사용했던 이 스킬은, 지금 이안도 사용이 가능하였다.
이안에게는 9서클의 흑마법 구사가 가능한 루가릭스가 있었으니 말이다.
‘녀석이 시간 왜곡류 스킬을 사용한다면, 우리도 사용하면 되는 거였는데.’
대상의 시간을 최대 5초까지 되감아 버릴 수 있는 스킬인, ‘어둠의 시계태엽’ 스킬.
이안은 이 스킬을 활용하여, ‘타임 홀’의 카운터를 치려 하는 것이다.
‘시계태엽에 데스 인카네이션, 여기에 망자의 보복까지 활용한다면, 녀석을 확실히 골로 보낼 수 있을 거야.’
물론 시계태엽을 활용하여, 심연의 군주의 시간을 되돌리려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녀석의 시간을 되감아 봐야 다시 5초가 지나면 타임 홀이 발동될 것이었으니, 카운터가 성립할 수 없었던 것.
때문에 이안이 떠올린 것은 완전한 역발상이었다.
“루가릭스, 준비해!”
-……?
“나한테 데스 인카네이션을 걸어 줘.”
-그게 무슨……!
루가릭스에게 오더를 내린 이안은, 그대로 심연의 군주를 향해 달려들었고.
쐐애액-
서걱- 촤아악-!
녀석의 약점들을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지옥의 칼날’ 고유 능력이 발동합니다.
-일시적으로 공격 속도가 35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일시적으로 방어 관통 능력이 3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중략……
-‘심연의 군주’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심연의 군주’에게 ‘악마의 낙인’이 각인되었습니다!
……중략……
-대상의 방어력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치명타 피해량이 5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지옥의 칼날’ 고유 능력의 위력이 300퍼센트만큼 증폭됩니다.
콰콰쾅-!
자체 둔화 효과에 디버프까지 걸려 느려 터진 녀석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난도질한 것이다.
타임 홀로 인한 카운터를 맞아도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완전히 공격적으로 태세를 전환해 버린 이안!
-크윽, 이놈, 겁을 상실했구나!
그리고 그런 주인의 모습에, 루가릭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이 대체 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뭐지? 데스 인카네이션을 믿는 건가, 설마?’
데스 인카네이션은 부활 계열의 스킬이지만 그 성격이 조금 달랐다.
부활 스킬임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대상에게 사용하는 스킬이 아닌 살아 있는 대상에게 사용하는 스킬이었으니 말이다.
‘데스 인카네이션’에 걸린 대상이 20분 내로 사망할 시 1회에 한해 되살려 주는 스킬이 바로 데스 인카네이션이었던 것.
하지만 이것으로 살아난다고 해도 정말 부활한 것은 아니었다.
데스 인카네이션으로 살아난 대상은, 3분 후에 다시 모든 생명력을 잃는 시한부의 상태가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루가릭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안의 공격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데스 인카네이션으로 살아난 3분 안에 심연의 군주를 처치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지금 미친 듯이 딜을 넣고 있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심연의 군주의 생명력은 20퍼센트밖에 깎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어쩌겠어, 일단 시키는 대로 해야지.’
우우웅-!
루가릭스의 손에서 뻗어 나간 어둠의 기운이, 이안에게 빨려 들어가 칠흑의 고리를 생성하였다.
그리고 그런 이안의 모습을 본 심연의 군주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이안, 그런 같잖은 수가 먹힐 것이라 생각하는가.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어둠의 힘을 빌리다니. 두 번 죽여 주도록 하지.
고오오-!
이안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던 심연의 군주의 기세가 순식간에 일변하였다.
-‘심연의 군주’의 고유 능력 ‘타임 홀’이 발동하였습니다.
-모든 둔화 효과가 해제됩니다.
-10초 이내에서 둔화 효과로 인해…….
……후략……
이어서 다음 순간.
쐐애액-
군주의 거대한 주먹이, 이안의 머리 위로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콰콰쾅-!
“으아앗!”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릴슨은, 그대로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데스 인카네이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그는 이대로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젠장, 결국 이렇게……!’
하지만 잠시 후.
“……?”
릴슨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띠링-!
그의 눈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으니 말이었다.
-‘심연의 군주’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심연의 군주’의 모든 생명력이 소진되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심연의 유적’에 존재하는 모든 시험을 돌파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