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0화 5. 개막전 (2) >
* * *
띠링-!
-‘로터스’ 길드의 도전자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플로아스’ 길드에 승점이 1점 부여됩니다.
-전투가 종료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생명력의 30퍼센트가 회복됩니다.
-대기실로 이동됩니다.
기분 좋은 메시지들이 떠오름과 동시에, 플로아스 길드의 암살자 랭커 ‘오스틴’의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크, 이겼군……!’
무려 플로아스 길드의 선봉 셋을 연달아 찍어 누른, 로터스 길드의 에이스로 추정되는 기사 유저.
깔끔한 환영술과 연환 공격으로 녀석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오스틴은, 온몸으로 짜릿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보여준 이 슈퍼 플레이를, 전 세계 수많은 카일란 유저들이 보고 있을 테니 말이었다.
‘확실히 로터스의 에이스다운 실력……. 쉽지 않았어.’
본래 기사 클래스는, 암살자 클래스에 PVP 상성이 좋은 편이다.
암살자의 한방 기습 공격에 잘 죽지도 않을뿐더러, 성직자만큼은 아니지만 회복 스킬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말이었다.
게다가 로터스의 이 첫 번째 도전자는 기사 클래스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한 유저였으니, 아마 평범한 대전장에서 만났더라면, 오스틴이 훨씬 더 애를 먹었을 터.
하지만 이곳은 ‘기사대전’이라는 특수한 이벤트가 걸린 대전장이었고, 때문에 상황이 조금 달랐다.
경기가 끝난 뒤 회복되는 생명력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스킬이나 아이템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룰 때문에.
이미 전투가 시작될 때부터, 녀석의 생명력은 절반 이하였으니 말이었다.
‘마지막에 반격을 한 번 허용하지만 않았어도, 거의 피해 없이 승리할 수 있었을 텐데…….’
제법 닳아 있는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한 오스틴이,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전투에 승리하면서 잃은 생명력의 30퍼센트가 회복되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생명력은 절반이 조금 넘는 정도.
못해도 2연승 이상 하여 더욱 실력을 뽐내고 싶은 오스틴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우웅-.
오스틴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사이, 대기 시간이 지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띠링-!
-로터스 vs 플로아스
-제 5차전이 시작됩니다.
-현재 스코어 – 3 : 1
-잠시 후 대전장으로 이동됩니다.
……후략……
이어서 오스틴의 눈앞에 있던 커다란 철문이 열리며, 콜로세움의 하얀 빛이 대기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그긍-!
그리고 빛과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뜨거운 함성에, 오스틴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크……!”
대기실에서 겨우 가라앉혀 놓았던 흥분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제까지 겪어 왔던 PVP리그에서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거대한 전율.
저벅저벅.
오스틴은 천천히 대전장을 향해 걸어 나왔고, 이어서 침착한 눈빛으로 반대편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전장 너머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로터스의 두 번째 도전자.
상대를 확인한 오스틴이 저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오늘, 운이 좀 따라 주려나 본데?’
오스틴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상대를 확인한 순간 로터스의 출전 목록표가 떠올랐으며, 자신의 이번 상대가 ‘마법사’ 클래스라는 사실이 상기되었으니 말이다.
타는 듯이 붉은 로브를 입은, 화려한 외모를 가진 적발의 마법사.
마법사 클래스야말로 암살자 클래스로 상대하기 가장 수월했고, 때문에 오스틴의 자신감이 더 차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로터스의 두 번째 도전자가 마법사였고, 세 번째가 전사였어. 이어서 다시 네 번째 도전자가 마법사 클래스니까…….’
척-!
애지중지하는 쌍검을 뽑아 올린 오스틴의 입가에, 더욱 미소가 짙어지기 시작하였다.
‘전사 클래스까지만 이길 수 있으면, 4연승도 불가능하지 않아.’
기분 좋은 상상의 날개를 펼친 오스틴이, 상대를 향해 신중히 검을 겨누었다.
마법사 클래스에게 일대일 대전에서 질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방심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상대의 장비들이 처음 보는 화려한 것들이라는 점도 조금 거슬렸으며, 이곳은 말 그대로 세계 무대였으니 말이었다.
‘마크 올리버급 괴물이 아니고서야, 내가 질 일은 없겠지만, 그냥 이기기만 해서는 연승을 할 수 없겠지.’
위이잉.
-잠시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9…… 8…… 7…….
오스틴의 눈앞에 마지막으로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상대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오스틴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도발하였다.
“첫 경기부터 암살자를 만나다니, 운이 없네.”
“…….”
“괜히 힘 빼지 말라고. 어차피 캐스팅만 하다가 끝날 테니 말이야.”
물론 그 도발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말이었다.
“운이 좀 없는 것 같기는 하네.”
“흐흐, 역시 그렇지?”
“처음부터 모양 빠지게, 이런 멍청이를 만나다니 말이야.”
“……!”
* * *
통상적으로 마법사는, 암살자 클래스에 무척이나 취약하다.
애초에 암살자라는 클래스가 PVP에 최적화되어 있어서 그렇기도 하였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매커니즘 자체에서 상성이 너무 나쁜 것이다.
태생적으로 생명력과 방어력이 낮은 데다 굼뜨기까지 한 마법사 클래스는 순식간에 파고드는 강력한 암살 공격에 대응하기 쉽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일반적으로 비슷한 실력의 암살자와 마법사가 대전을 벌이면,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제대로 마법 한번 써 보지 못하고 패배하는 것이 보통.
반면에 암살자 입장에서는 환영술이나 비도술을 활용하여 마법사의 캐스팅을 끊으며 간을 보다가, 폭발적인 스피드로 접근하여 숨통을 끊어 버릴 수 있었으니, 오스틴의 이러한 자신감도 분명히 근거는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상대인 레미르가 오스틴과 동급의 마법사일 때나 통용 가능한 이야기들이었지만 말이다.
‘이거 귀여운 자식이잖아? 말콤프 오빠랑 싸울 때 밑천 다 털린 주제에 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벌써 이기기라도 한 양 한껏 들떠 있는 오스틴을 보며, 레미르는 기가 찬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어떻게 요리해 줘야 저 가면 안에 숨겨진 얼굴을 시궁창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지, 심도 있게 고민하였다.
-잠시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4…… 3…… 2…….
‘분명 저 녀석, 환영술 기반의 암살자 히든 클래스인 것 같은데…….’
이전 경기에서 오스틴이 보여 줬던 스킬들을 전부 복기한 레미르는 의미심장한 표정이 되어 웃었다.
녀석이 즐겨 사용하는 환영술과 분신술을, 그대로 역이용해 보내 버릴 방법이 떠올랐으니 말이었다.
띠링-!
-로터스 vs 플로아스
-제5차전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자마자 레미르의 양손에서 불길이 끓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자, 편하게 들어오시라고……!”
* * *
-자, 드디어 시작입니다!
-이번 경기 정말 흥미진진하죠?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암살자 클래스가 단연 우세해 보일지 몰라도, 저는 이번 경기, 박빙으로 예측합니다.
-어째서 그런지,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뭐, 설명이랄 것도 없이 간단합니다.
-오호, 이거 더 궁금해지는데요?
-저 마법사 유저가, 로터스에서 자랑하는 최고의 랭커 중 한명인 ‘레미르’로 추정되기 때문이지요.
-아하, 한국 서버 마법사 클래스 1위라는, 홍염의 마도사 레미르 말이죠?
-그렇습니다.
-크, 그렇다면 이 경기, 말씀대로 정말 흥미진진하겠네요.
-하지만 그와 별개로, 로터스 입장에서는 운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건 왜 그렇죠?
-아무리 레미르라 해도 암살자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을 테고, 여기서 만약 그녀가 패배하기라도 하면 전력 손실이 어마어마한 테니 말입니다.
-오호, 일리 있는 말씀이시군요.
-이기더라도 상처뿐인 승리가 된다면 로터스의 입장에서는 뼈아플 수밖에 없겠지요.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해설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콜로세움에 가득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사위를 가득 메운 관중석은 무척이나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전투가 처음 개전될 때만큼 긴장감 넘치는 순간도 없으니까.
다만 몇몇 관중이 작은 목소리로 수근 댈 뿐이었다.
“레미르라니……! 로터스는 아예 처음에 승부를 보려는 걸까?”
“그나저나 레미르 진짜 멋지다.”
“뭐가?”
“기사대전의 룰을 이용하면 정체를 숨길 수도 있었을 텐데, 대놓고 아우라를 뿜어대면서 나타났잖아.”
“아, 그 타오르는 불길?”
“맞아. 그게 사실 레미르의 상징 같은 이펙트거든.”
“그렇군.”
“암살자고 나발이고, 다 이겨 버릴 수 있다는…… 그런 생각 아닐까?”
“크, 간지 터진다!”
그리고 이 관중석의 한쪽 구석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경기를 시청 중인 비슷하게 생긴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형, 진짜 레미르야?”
“아마 그럴 걸.”
“레미르가 이길 수 있을까?”
“지기가 힘들걸?”
“헉, 어째서?”
“입 닫고 보면 안 될까? 집중에 방해되는데.”
“아, 알았어. 미안.”
관중석에서도 무척이나 전망이 좋은 RR석에서,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경기를 시청 중인 한 남자.
그는 바로 황금 같은 휴가에도 동생과 함께 카일란 나들이를 나온, 기획3팀의 팀장 나지찬이었다.
‘하도 데려가 달래서 데려오긴 했지만 진짜 귀찮아 죽겠네, 이 녀석.’
나지찬은 자꾸 옆에서 쫑알대는 동생 나세찬을 힐끔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이차이가 제법 많이 나는 동생은 이제 갓 고등학생이었고, 나지찬만큼이나 카일란을 좋아하는 게임 덕후였다.
동생의 앞에서 기사대전 보러가겠다는 말실수(?)를 한 바람에, 이렇게 둘이 나란히 앉아있게 된 것이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레미르……. 환영살수를 상대로 어떤 대응을 보여 줄까? 이거 너무 기대되는데…….’
나지찬은 이번 경기에서, 레미르가 무조건 승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나지찬은 그녀에게 언령 마법이 있음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평범한 마법들과 달리 캐스팅 없이 사용한 언령 마법들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분명 변수로 작용할 것이고, 플로아스 길드의 랭커 오스틴은 그녀의 변칙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유저가 아니었다.
‘뭐 레미르가 입은 용암로브라면, 기습 한두 번 정도는 허용해도 문제없겠고…….’
일반적인 관중과 달리 두 랭커의 모든 정보를 꿰고 있는 나지찬.
그는 더욱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전투를 지켜보기 시작하였고, 레미르는 그런 그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