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0화 1. 균열의 수문장 (1) >
한 서버의 최고 랭커라는 타이틀은, 결코 쉽게 딸 수 있는 타이틀이 아니다.
프랑스 서버가 아무리 후발 서버라 하더라도, 카셀의 실력은 가짜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마 동등한 조건에서 카이자르와 싸웠더라면, 최소한 대등한 수준의 싸움을 보여 줬을 터.
다만 차원 마력 저항력 풀 스텍의 카이자르라는 존재가, 카셀이 아니라 그 어떤 랭커가 오더라도 상대하기 벅찬 상대였을 뿐이었다.
강력한 차원 마력 버프를 받고 있는 카이자르와, 디버프로 인해 온몸이 무거워진 카셀.
이런 조건에서는 설령 이안이라 할지라도, 결코 카이자르를 쉽게 이길 수 없을 것이었으니까.
‘젠장, 여긴 아니야. 일단 빠져나가자.’
같은 분대의 기계 괴수를 방패 삼아 가까스로 카이자르를 따돌린 카셀은, 빠르게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공헌도고 나발이고, 그런 것은 일단 살아남았을 때에 의미가 있는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미친 대검 전사와 마그마를 뿜어 대는 거대한 드래곤으로부터, 일단 몸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쩐지 퀘스트 난이도가 높더라니……!’
전투가 시작된 지는 이제 고작 5분.
그사이 카셀이 속해 있던 기계 군단 분대는, 거의 궤멸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총 열 다섯으로 구성되어 있던 100레벨 초반의 기계 괴수들 중, 열 기 정도가 순식간에 파괴된 것이다.
물론 카셀의 분대가 선봉이었고, 통로를 통해 후발 부대는 지속적으로 유입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카셀은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100레벨 대 라고는 하지만 이런 일반 등급의 기계 괴수들로는, 아무리 물량이 많아도 결코 저 괴물 같은 수문장들을 뚫어 낼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으니 말이다.
‘공간이라도 넓으면 모르겠는데, 이렇게 좁은 곳에서는 불가능해.’
분신술과 이동기까지 활용하여, 통로를 잽싸게 빠져나온 카셀.
그렇다면 카셀은, 이 퀘스트를 포기하고 아예 균열을 되돌아 나가려는 것일까?
당연히 그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포기해 버리기엔 이 퀘스트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너무 달콤했고, 기계 군단의 병력도 아직 수백 기 이상 남아있었으니 말이었다.
‘다른 통로로 움직여 봐야겠어. 모든 통로의 수문장이 이런 미친 수준은 아니겠지.’
카셀이 방금 전까지 있던 통로는, 다섯 개의 통로 중 가장 좌측의 통로였다.
아직 전황을 확인하지 못한, 네 곳의 통로가 남아 있는 것.
그리고 카셀은, 그곳들 중 가장 상황이 좋은 곳으로 합류해 볼 생각이었다.
‘설마, 다섯 통로의 수문장이 전부 다 같은 구성은 아니겠지?’
카셀은 살금살금 움직여, 바로 옆의 통로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통로의 수문장들을 발견한 순간, 살짝 안도할 수 있었다.
‘확실히 여기가 좀 더 나은 것 같은데……?’
일단 두 번째 통로에서는, 방금 만났던 대검 전사도, 용암으로 휩싸인 드래곤도 시야에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두 번째 통로를 막고 있는 수문장들은, 비교적 평범해 보이는(?) 각종 동물들.
펜리르와 할리칸, 그리고 거대한 거북룡과 해골거인 등. 사나워 보이는 외모의 몬스터들이 진을 치고 있긴 하였으나, 라바 드래곤 정도의 위압감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커다란 몬스터들의 사이에 있는 머리 큰 거북이는, 적임에도 불구하고 귀엽게 느껴질 정도!
‘전체적인 레벨대도 전부 80 중후반 정도이고……. 이 정도면 해볼 만한데?’
하여 카셀은 빠르게 판단을 마친 뒤, 통로의 안쪽으로 걸음을 들였다.
저벅-.
물론 그 걸음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지만 말이다.
캬아아오-!
“뭐, 뭐야 이번엔 또……!”
뿍뿍거리며 움직이던 작은 거북이가, 갑자기 거대한 드래곤으로 변해 포효하기 시작한 것.
쿠르릉-.
콰아아아-!
카셀은 이러한 비주얼을 가진 존재를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그대로 걸음을 돌려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비스 드래곤이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지상계에서의 에피소드를 진행하던 시절.
마족 진영의 입장에서 최종 보스나 다름없던 존재인 어비스 드래곤.
지상계에서도 충분히 강력했던 어비스 드래곤이 90레벨에 육박하는 초월 레벨까지 갖췄으니, 지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이번에도 통로를 되돌아 도주한 카셀은, 다음 통로를 향해 이동하였다.
다섯 통로 중 한 곳 정도는, 전황이 좋은 전장이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세 번째 통로를 들여다본 카셀은, 아예 발조차 들이지 못하고 다음 통로를 향해 이동해야 했다.
‘여긴 무슨 드래곤이 세 마리나 있어?’
눈부시게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빛의 신룡과, 그와 상반되게 칠흑 같은 어둠의 마법을 쏟아 내는 어둠의 신룡.
그 둘 사이에는 짙은 보랏빛의 브래스를 뿜어 대는 전쟁의 신룡까지 있었으니, 처음부터 답이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쯤 되자, 카셀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이거 이러다가…… 엘프의 부락인지 뭔지. 가 보지도 못하는 거 아닐까?’
이제는 자신이 탑승한 이 버스가, 혹시 지옥행은 아니었는지 슬슬 고민되기 시작하는 카셀.
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카셀은 남은 두 곳의 통로까지 확인해 보았고, 그 결과 완벽히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가 바로 지옥이구나……!’
애초에 버스에 탑승했던 것 자체가,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말이다.
‘아직 남은 병력이 많으니 여긴 어떻게 뚫어 낸다 하더라도……. 엘프 부락 공성전 자체가 성립이 되질 않겠네.’
이제는 정말 모든 미련을 버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통로에서 돌아 나오는 카셀.
지금이라도 손절하고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카셀이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이미 손절할 수 있는 타이밍조차도 지나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쿠르릉- 콰콰쾅-!
다섯 갈래의 진입로 쪽으로 되돌아 나온 카셀의 머리 위엔, 어느새 새하얀 심판의 번개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띠링-!
-강력한 심판자의 힘이 서린, ‘심판의 번개’에 적중당했습니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중략……
-모든 생명력이 소진되었습니다.
-사망하셨습니다.
-잠시 후 자동으로 로그아웃됩니다.
그렇게 꿈과 희망에 가득 차 버스에 탑승했던 카셀은…….
그 누구보다도 억울한 표정으로, 균열의 한복판에서 쓸쓸히 사망하고 말았다.
* * *
-제1분대가 궤멸에 이르렀습니다.
-기계 군단의 전력이 1.3%만큼 감소하였습니다.
-제3분대가 궤멸에 이르렀습니다.
-기계 군단의 전력이 1.5%만큼 감소하였습니다.
……후략……
에픽 퀘스트를 통해 기계 군단의 지휘관 자격을 얻은 류첸.
그는 지금, 근래 들어 가장 혼란스런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저 안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야?’
류첸이 지휘하는 기계 군단의 규모는, 무려 일흔이 넘는 분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의 분대에 속해 있는 기계 괴수가 10~15기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거의 일천에 가까운 대규모의 병력인 것이다.
반면에 지금 기계 군단이 이동 중인 이 균열은, 이만한 병력이 지나기에는 좁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통로.
거기에 다섯 갈래로 쪼개진 더 작은 통로들이 지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위치였으니, 전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류첸으로서는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초월 90레벨 정도의 적들이라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데?’
처음 적들의 정보를 보고받은 류첸은, 무척이나 가볍게 생각하고 돌파 명령을 내렸었다.
척후병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단 한 기의 병력 손실도 없이 순식간에 돌파 가능한 적들이라 느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자, 그것은 잘못되도 너무 잘못된 판단이었다.
마치 파도 속으로 몰려 들어가는 개미들처럼.
무려 100레벨대의 기계 괴수들이, 순식간에 궤멸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젠장, 이거 어떻게 해야 해?’
그 때문에 류첸의 머릿속에는, 오만 가지 생각과 고민들이 뒤죽박죽 섞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병력이 20% 가깝게 박살이 나 버린 지금.
어떤 방향으로든 빠른 결단을 내려야 했으니 말이다.
‘선발대를 후방으로 물리고, 본대를 끌고 가서 밀어붙여야 하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 궤멸된 병력의 대부분이 가장 낮은 등급의 최약체들이라는 것.
3티어 이상의 전투력을 가진 핵심 전력들은 아직 온전하다는 것이, 류첸의 유일한 위안거리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길 뚫고 엘프 부락에 도착하면, 병력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류첸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 난관을 극복할 방법은 어떻게든 균열을 뚫고, 손실된 전력으로 엘프 부락까지 점령해 내는 것뿐.
‘젠장, 여기서 후퇴를 했다가는, 모든 신임을 잃고 지휘관 자리를 내놔야 하겠지.’
공략에 실패하고 모든 병력을 잃는 것보다야 지금이라도 후퇴하는 것이 손실은 적겠지만, 어떤 방향이든 지휘관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었다.
‘병력을 전부 잃으면 찰리스 학파에서 쌓은 공헌도가 다 날아가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순 없지.’
결국 결정을 내린 류첸은, 빠르게 전략을 변경하였다.
“선발대는 사이드로 빠지면서, 적들을 유인해 나오도록!”
“명을 받듭니다!”
“최대한 좁은 공간을 피해서, 본대가 직접 놈들을 상대한다!”
기깅-기기깅-!
잠시 혼란에 빠지긴 했었지만, 일단 결정을 내리자 신속하게 오더를 내리며 전장을 지휘하는 류첸.
그러나 이를 악물고 오더를 내리던 류첸은, 잠시 후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앞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변수가 튀어나왔으니 말이었다.
띠링-!
-전체 병력의 30% 이상이 궤멸되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공성전을 진행할 수 없는 규모의 병력입니다.
-더 이상 퀘스트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중략……
“뭐라고……?”
-기계 군단의 모든 병력에게 자동으로 퇴각 명령이 내려집니다.
-찰리스가 분노하였습니다.
-찰리스와의 친밀도가 50만큼 감소합니다.
-기계 군단의 지휘관 자리를 박탈당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기계 군단이, 당신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후략……
“젠장! 무슨 이런 퀘스트가 다 있어……!”
시스템 메시지를 전부 확인한 류첸은,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소리치고 말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뭔가 해 보기도 전에, 에픽 퀘스트를 통째로 날려 버린 셈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지금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 이안이라는 재앙 때문인 것을 알 리 없는 류첸은, 그저 퀘스트의 구조를 탓할 수밖에 없었고.
“제기랄, 퀘스트 한번 더럽네.”
결국 흑마법 한번 써 보지도 못한 채, 강제로 균열을 되돌아 나와야만 하였다.
-퀘스트에 실패하였습니다.
-모든 연계 퀘스트가 파기됩니다.
물론 이렇게 강제로 퀘스트가 종료된 것이 그나마 행복한 결말이었다는 사실을, 류첸은 영원히 깨달을 수 없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