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0화 4. 이라한의 설계 (3) >
* * *
“뭐야, 여기도 왜 이렇게 쪼랩이 끼어 있어?”
소환진 한가운데 소환된 몇몇 마족을 보며, 이안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기계 군단 돌격대원’ Lv82(초월)
최소 100레벨 초반부터 최대 120레벨까지 즐비한 기계 군단의 지원군 한복판에, 웬 80레벨대의 쪼랩(?)이 끼어 있었으니 말이다.
퀘스트에 투입된 마족 진영 유저들이 이안을 NPC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안 또한 그들을 NPC라고 판단한 것.
유저 기준에서 86레벨이면 최고 수준의 상위 레벨이 분명했지만, 적어도 이 퀘스트의 기계 괴수들 사이에서는 쪼랩이 맞았으니 말이다.
‘얼레, 80레벨대가 저쪽에도 하나 더 있잖아? 아니, 근데 저기 저 마족 놈은 또 왜, 레벨이 비공개 처리되어 있는 거야?’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NPC의 레벨이 비공개 처리되어 있을 때는 퀘스트 진행과 관련하여 나름의 이유가 존재하는데, 지금의 상황에서 볼 때는 전혀 그런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레벨이 비공개 처리되어 있는 이들의 정체는, 스키노카케 길드의 길드원들.
유저는 카일란에서 제공하는 기본 옵션을 통해, 자신의 레벨을 비공개로 할 수도 있고 공개로 할 수도 있었으니.
이안의 입장에선 의아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안같이 항상 자신의 레벨을 비공개로 해 두고 다니는 랭커도 있는 반면, 신경 쓰지 않거나 자랑 삼아 공개로 두는 랭커도 있었던 것.
여하튼 신속하게 기계 문명 지원군의 전력을 파악한 이안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그 이유를 추측해 보았다.
‘이전 수비 요새에서도 80레벨대가 간혹 보였었는데……. 어쩌면 공략하는 유저 레벨에 비례해서, 등장하는 NPC들일 수도 있겠네.’
자신의 레벨이 퀘스트 수준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이런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라고 짐작한 이안.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 나야 빠르게 돌파해서 여길 지나가면 그만이니까.’
스르릉-!
심판검을 뽑아 든 이안은, 다시 빠르게 기계 군단을 스캔하였다.
이런 대규모 전투에서 가장 처음 노려야 하는 것은 당연히 ‘지휘관’이라 할 수 있었으니, 대장급 NPC를 가장 먼저 찾은 것이다.
이어서 타깃을 찾아낸 이안은, 망설임 없이 아이언을 타고 쇄도하였다.
-‘기계 군단 지원대장’ Lv???(초월)
한눈에 보아도 기계 군단 지원대대의 지휘관인 듯 보이는 남자.
물론 지휘관인 만큼 가장 강력한 NPC(?)일 테지만, 그래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심판검의 모든 능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면, 초월 130레벨 이상의 NPC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었다.
이안은 지휘관 NPC의 레벨이 대충 130레벨대 정도 될 것이라 짐작하였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10분 내로는 처치해야 해. 너무 길어지면 헬라임과 카이자르가 버텨 내지 못할 거야.’
이안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몰아칠 생각으로, 서머너 나이트의 고유 능력들을 개방하였다.
띠링-!
-서머너 나이트의 고유 능력, ‘바이탈리티 웨폰 (Vitality Weapon)’을 발동합니다.
-‘성령의 심판검’에 생명력을 부여하였습니다.
-‘심연의 심판검’에 생명력을 부여하였습니다.
……중략……
-서머너 나이트의 고유 능력, 서먼 인카네이션 (Summon Incarnation)을 발동합니다.
파아앗-!
재사용 대기시간 때문에 아껴 두었던 서머너 나이트의 고유 능력들을, 동시에 발동시킨 이안.
어차피 이 마지막 페이즈만 넘어가면 퀘스트가 종료될 테니, 아낌없이 모든 능력을 끌어 올린 것이었다.
하여 이안은 총 열두 개까지 증식된 심판검으로, 동시에 ‘지휘관’을 난도질하기 시작하였다.
촥-촤촥-촤아아악-!
-‘기계 군단 지원대장’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기계 군단 지원대장’의 생명력이 198,209만큼 감소합니다!
-‘기계 군단 지원대장’의 생명력이 510,012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딜 들어가는 걸 보니 탱커형 NPC는 아닌 것 같고. 이런 식으로 빡세게 더 몰아치면…… 어……?’
심판검의 표식을 최대한 터뜨리기 위해 정교하게 분신들을 컨트롤하던 이안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공세를 시작해 보려던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으니 말이었다.
-‘기계 군단 지원대장’의 생명력이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기계 군단 지원대장’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명성(초월)을 7,500만큼 획득합니다.
……중략……
‘뭐야, 벌써 죽었다고?’
지휘관 NPC의 공격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 가볍게(?) 칼질을 몇 번 했을 뿐인데, 공격 대상이 사망해 버리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툭 하고 쳤더니 억 하고 죽어 버린 느낌이랄까.
‘젠장, 뭔가 이상한데. 이거 함정 아냐?’
당황한 이안은 고개를 휘휘 돌리며,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왠지 방금 처치된 녀석은 가짜였고, ‘진짜’는 따로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하지만 너무 당연히도, 이안이 뭔가를 찾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이안의 의심과 달리, 딱히 함정 같은 것은 없었으니 말이다.
‘템이 이렇게 많이 떨어지는 걸 보면, 가짜는 아닌 것 같은데…….’
눈앞에 주르륵 하고 떨어진 아이템 목록을 살펴보며, 이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투르크(3티어 기계 괴수) 설계도’를 획득하셨습니다.
-‘붉은 광전사의 벨트(영웅)(초월)’ 장비를 획득하셨습니다.
……중략……
‘뭔가 드롭 테이블은 이상한 것 같고…….’
하지만 이안의 생각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지휘관을 처치한 것은 처치한 것이고,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기에.
이런 사소한 문제로 더 고민할 시간은 없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버그 같긴 한데, 나한테 나쁠 건 없으니까 뭐.’
하여 다시 심판검을 고쳐 잡은 이안은, 본격적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서겅-!
콰콰쾅-!
결론을 내린 순간 이미, 이안의 뇌리에서 방금 처치된 NPC(?)에 대한 생각들은 지워진 것.
하지만 이렇게 급박한 전투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이안은 조금 더 기뻐했을지도 몰랐다.
그가 대충 확인하느라 보지 못한 드롭 아이템 목록 중에, 제법 특별한 품목도 하나 존재했었으니 말이었다.
-‘기계공학의 정수(신화)(잡화)’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안은 결코 알 수 없는 사실도 하나 있었다.
24시간 후에 다시 부활하게 될 그 NPC(?)는, 사라진 그 아이템을 확인한 뒤 게임을 접고 싶어질지도 모를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 * *
카일란의 새 아침이 밝았다.
수많은 팬들의 관심이 쏠려 있는, 기사 대전 패자부활전이 시작되는 날이 밝은 것이다.
그리고 동이 갓 트기 시작한 꼭두새벽부터, 폭탄 같은 소식들이 커뮤니티를 장식하였다.
-동남아 서버 최강 길드 ‘그라탄’. 패자부활전에서 기권 선언!
-소브레 길드의 길드마스터 올리비아, 행방불명되다!
-패자부활전 B조, 스키노카케 길드. 참가 신청 누락으로 자동 탈락 위기?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패자부활전 시작도 전에, 세 팀이 아웃되는 게 말이 돼?
-소브레는 아웃은 아님.
-아웃 아니면 뭐 해? 올리비아 못 나오면 나가린데.
-스키노카케도 아직 아웃은 아니죠. 10시까지 시간 남아 있으니까요.
-그런데 님들, 그거 아심?
-뭐요?
-오늘 기사 뜬 세 팀이, 전부 같은 조 소속이라는 거임.
-헐, 진짜?
-덕분에 다크루나는, 자동으로 조 1위 예약임요. 개꿀!
-와 씨, 대박이네. 이러다가 패자부활전에서 한국팀 두 팀 올라오는 거 아님?
-그러게. 타이탄도 대진운 좋아 보이던데. 잘하면 가능할지도 모름.
생각지도 못했던 희소식(?)에, 한국 커뮤니티의 팬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그라탄, 소브레 등의 강팀과 같은 조가 된 다크루나의 경우 대진운이 나쁜 편이었는데, 하루 만에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조 1위가 되었다고 해도 다른 조의 1위들을 상대로 2승은 거둬야 부활이 확정되는 것이었으나, 훨씬 더 좋은 상황이 된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해외 서버 팬들은 지금 LB사의 농간이라고 난리를 치던데…….
-LB사가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자국 팀 올리겠다고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함?
-그러니까ㅋㅋ 내 말이ㅋㅋㅋ
-그래도 그 마음, 이해는 함. 상황이 그저 우연이라기엔, 너무 공교로우니까 말이지.
-하긴. 덕분에 오늘 기사 대전 더 꿀잼으로 관전할 수 있겠군.
-크, 기왕 이렇게 된 거, 소브레랑 스키노카케까지 싹 다 기권 패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한국 서버의 커뮤니티가 더욱 불타오른 것은, 오히려 기사 대전이 시작된 이후였다.
한국 팬들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소브레와 스키노카케는 기권하지 않았지만, 결국 조 1위를 차지한 것은 다크루나였으니 말이다.
스키노카케를 이기고 올라온 소브레를, 다크루나가 퍼펙트 스코어로 찍어 눌러 버린 것.
-키야아아……! 이라한 지렸다!
-올리비아 없으니까 소브레 진짜 아무것도 아니구나!
심지어 인간계 진영에서는 기대했던 대로 타이탄 길드가 선전해 주었으니, 한국 팬들 입장에서는 축제가 따로 없었다.
-햐, 이러면 타이탄도 조 1위인가?
-국뽕에 취한다…….
-기사 대전 1, 2, 3위. 전부 한국 팀으로 가즈아!
-님, 아무리 국뽕에 취해도 그건 좀…….
물론 이 모든 결과가 이라한의 설계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었다.
“후후,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그렇게 이라한의 카일란 인생 역사상, 가장 행복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한편 기사 대전이 이렇게 흥미진진한 구도로 흘러가고 있던 그 무렵.
속세(?)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서 퀘스트를 진행 중인 남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당연히 이안이었다.
“미니 맵상으로 이 근방이 확실한데…….”
“맞습니다, 폐하. 좌표상으로 이곳이 분명합니다.”
밤새 호루스의 요새들을 전부 뚫고 비자르 협곡의 심처에 들어서는 데 성공한 이안은, 드디어 미니 맵에 표시되어 있던 ‘그락투스’일족 부락의 좌표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목적지에 성공적으로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샤트라 일족의 부락과 같이 웅장한 부락을 생각하고 목적지에 도착했건만, 일행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이 황량한 암석 협곡뿐이었으니 말이었다.
“한데 왜 이렇게 휑한 거지? 부락은커녕, 구조물 비슷한 것도 보이지를 않잖아?”
“제대로 온 것 맞냐, 주군. 커다란 바윗덩이들 말고는 보이는 게 없는데.”
미니 맵을 열어 좌표를 다시 한번 확인한 이안은,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하였다.
어떤 결계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확한 좌표의 위치로 이동해 보려는 것이다.
분명 겉보기에는 바윗덩이 말고 아무것도 없는 좌표였지만, 일단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 봐야 하는 것.
저벅-저벅-.
하여 조심스레 위치까지 걸어간 이안은, 또다시 고개를 갸웃하였다.
좌표의 위치를 기준으로 커다란 크리에이터 같은 것이 패어 있기는 하였으나, 결계 같은 것은 전혀 찾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뭐지? 내가 뭔가 빼먹은 게 있나?’
하지만 다음 순간,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띠링-!
당황한 그를 구원해 주기라도 하듯,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오르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대지의 눈’이 성스러운 빛을 뿜어내기 시작합니다!
고오오오-!
이안이 어떤 행동을 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 스스로 인벤토리에서 튀어나와 환한 빛을 뿜기 시작하는 대지의 눈.
“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황량하기 그지없던 바위 계곡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