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8화 2. 콜로세움의 마법사 (2) >
* * *
카일란에는 ‘강함’을 표현하는 지표가 무척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게임이 그렇듯, 그 모든 지표 중 가장 직관적이고 확실한 것은 ‘레벨’이었다.
레벨에 따라 전반적인 전투 스텟이 달라지고, 또 레벨에 따라 착용할 수 있는 장비의 티어가 달라지니.
그것이 가장 절대적인 지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그런 의미에서, 이안과 계약한 대지의 정령왕 ‘트로웰’이라는 존재는 사실 밸런스 붕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었다.
200이라는 초월 레벨은 현 시점 중간계의 유저들의 입장에서 ‘언터쳐블’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카일란의 기획자들은 당연히 바보가 아니다.
그 때문에 한시적일지라도, 이런 위험한(?) 보상을 쥐여 줄 때에는 확실한 안전장치를 걸어 놓는 편이었다.
-대지의 정령왕 ‘트로웰’을 소환하는 데에 실패하였습니다.
-특정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소환할 수 있는 정령입니다.
대지의 정령왕 트로웰의 경우, 그와 관련된 메인 퀘스트를 진행할 때에만 소환할 수 있도록 해 두었던 것이다.
‘아쉽긴 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부분인가.’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전투를 준비하며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미 트로웰을 소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소환을 발동시켜 본 것.
트로웰만 꺼낼 수 있다면, 정령 마법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랭커들을 박살 내 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뭐, 어차피 고대의 정령 마법들을 시험해 보는 게 목적이니까…… 너무 아쉬워할 필요 없겠지.’
미리 준비해 둔 정령 마법들을 차례로 떠올린 이안은,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표정이 되었다.
정령왕이 없더라도 그에겐 강력한 최상급 정령들이 있었고, 정령 마법 융합술을 통해 생각보다 더 훌륭한(?) 결과를 얻어 두었으니 말이었다.
‘역시 인생은 도박이지.’
한차례 히죽 웃어 보인 이안은 시선을 올려 시야 구석의 타이머를 확인하였다.
-경기 시작까지 남은 시간 – 00 : 01 : 27
그리고 째깍째깍 줄어드는 전투 대기시간을 지켜보며, 이안은 점점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하였다.
‘일단 눈앞에 보이는 친구들 정도는 싹 다 잡고 시작해야겠지.’
긴장 상태로 서로를 탐색하는 다른 랭커들을 보며, 이안 또한 슬슬 전투준비를 시작하였다.
* * *
기사 대전의 리그전에서 로터스가 속한 A조의 구성은 카일란 팬들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흥미로운 구성이었다.
독보적인 전력을 가진 로터스도 로터스였지만, 그에 비벼 볼 법 한 최강 길드가 두 곳이나 더 포함되어 있었으니 말이었다.
그 두 곳은 바로 천웅 길드와 발러 길드.
중국 서버의 독보적인 마족 진영 1위 천웅과, 미국 서버의 인간 진영 1위 길드인 발러 길드는, 로터스와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는 스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조 2팀은 어디 어디가 올라갈까?
-일단 로터스는 거의 확정이겠고, 보나마나 천웅 길드가 같이 가겠지.
-윗님, 발러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님? 난 솔직히 발러가 천웅보다 위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사람마다 견해 차이는 다양했다.
발러보다는 대체로 천웅 길드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유저에 따라 두 길드와 로터스의 차이를 다른 급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근소한 차이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으니 말이었다.
여기에 중국 서버의 인간 진영 1위 길드인 ‘스콜피온’길드 또한, 충분히 눈여겨볼 만큼 뛰어난 전력의 길드.
-어쩌면 이변으로, 스콜피온이 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스콜피온이 길드 규모만 놓고 보면, 천웅보다 크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하지만 스콜피온이 올라가기엔, S급 랭커가 너무 부족하죠. 물량 싸움이면 몰라도 결국 10인 대전인데. 스콜피온 자원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A조에서 구멍이랄 만한 길드는 ‘호왕’뿐이었으니, 유저들의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는 구도라 할 수 있었다.
-님들, 근데 로터스가 떨어질 가능성은 아예 생각도 안 하는 거임?
-이안이 라인업에 들어갔는데, 로터스가 미끄러진다고?
-뭐 다굴당해서 살짝 삐끗한다 해도…… 로터스가 2위 밑으로 떨어지는 그림은 상상이 잘 안 되는데요?
-하긴…….
-아니, 근데 왜 호왕 길드는 아무도 언급 안 함?
-ㅋㅋㅋ국뽕도 정도가 있는 거임.
-…….
-림롱 말곤 1티어 랭커가 거의 없다시피 하는데, 호왕이 어떻게 올라갑니까.
-맞는 말이네요.
-마틴이나 진 같은 랭커들은 1티어로 안 쳐주나 보죠?
-뭐, 국내 기준으론 아직도 1티어지만, 글로벌 1티어라기엔 많이 부족하죠.
-하긴…….
그리고 유저들의 의견이 이렇게 분분한 만큼, 실제로 리그에 참가해 있는 길드들 또한 무척이나 머리가 아픈 상태였다.
어떻게든 다섯 팀 중에 두 번째에 랭크되어야, 다음 전장인 ‘운명의 언덕’으로 갈 수 있었으니 말이었다.
만약 단일 길드끼리의 싸움으로 결정되는 승패 누적식 리그였더라면, 오히려 고민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만나는 길드의 선발 랭커들에 대한 분석만 철저히 해서, 어떻게든 최대한 많은 승리를 따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콜로세움의 전투 방식이 자유 대전(Free for all) 방식이라는 점.
어떤 식으로 전략을 구성하고 세 장의 태그 티켓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절대적으로 부족한 스펙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구조였으니 말이다.
무대포로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다른 길드들 간의 전투를 먼저 유도한 뒤.
킬 포인트를 낼름 낼름 주워 먹으며, 득실에서 이득을 보는 것이 최고의 전략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 A조에 참전한 모든 길드들 중에서 가장 머리가 아픈 길드는 호왕 길드라고 할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확실한 최약체인 호왕 길드로서는, 전략적인 승리 말고는 가망이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그래서 마틴과 림롱은 전장에 임하기 전 두 가지 전략을 세웠다.
첫째, 당장 킬 포인트를 하나 올리는 것보다, 살아남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
둘째, 다른 길드들과 다르게 전력을 역배치해야 한다는 것.
사실 첫 번째 전략은 호왕 길드만의 전략이라 할 수 없었지만, 두 번째 전략은 그들의 핵심 전략이라 할 수 있었다.
다른 길드들이 일반적으로 에이스들을 뒤에 배치하여 안정적인 운영을 꾀할 테니.
그들은 역으로 선발에 전력을 집중시켜, 이득을 취해 보려는 것이다.
림롱이나 마틴과 같은 최고 에이스들이 먼저 나서서 최대한 킬 포인트를 따 둔 뒤, 후발 라인업은 아예 킬 욕심을 버리고 버티기로 일관하려는 전략인 것.
그래서 호왕 길드의 첫 번째 랭커는 바로 마틴이었다.
그리고 마틴의 목표는 다섯 길드의 선발 출전자들 중, 가장 만만한 타겟을 잡아 확실한 1킬을 올리는 것이었다.
‘누굴 타게팅해야 하나…….’
검투장을 둘러보며, 다섯 명의 면면을 면밀하게 살피는 마틴.
물론 사전 탐색만으로 타겟을 곧바로 정할 생각은 아니었다.
참전자의 절대적인 전투력과 별개로 전황에 따른 선택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다섯 중 가장 강한 랭커라 하더라도, 틈이 보이면 여지없이 물어뜯어야 하는 것.
‘천웅 길드의 꼬마는 라위첸인 것 같고, 발러 길드의 마법사는 아세르. 스콜피온 길드의 출전자는 따까리 하윈인 것 같은데…….’
각 길드의 전력에 대해 충분히 분석한 마틴은, 대충 복색을 훑어보는 것 만으로도 출전자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그들 중 단 한 명.
로터스의 선발로 나온, 의문의 출전자를 제외하고 말이다.
로터스의 출전자를 응시하던 마틴은 점점 더 머릿속이 혼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놈은 대체 뭐지?’
기사 대전에 참전할 만한 랭커들 중 자신이 모르는 유저가 있다는 것도 충격적인데.
심지어 로터스는 마틴과 같은 한국 서버의 길드였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것.
‘설마, 이번에 해외 서버의 랭커를 따로 영입이라도 한 건가? 한국 서버 랭커 중엔 저런 녀석이 있을 수가 없는데.’
마틴은 전투가 시작될 때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마법사의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전략을 섣불리 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버리는 카드일까? 아니면 숨겨 둔 에이스?’
그리고 마틴이 고민하는 사이, 경기 시작 시간은 금세 다가왔다.
-잠시 후, A조의 리그전이 시작됩니다.
-20초 후에 경기를 시작합니다.
-19초 후에 경기를 시작합니다.
……중략…….
-5초 후에 경기를 시작합니다.
-4초 후에 경기를 시작합니다.
……후략…….
스르릉-!
마른침을 꿀꺽 삼킨 마틴은 침착하게 무기를 뽑아 들었다.
호왕 길드의 전력상 선발 출전인 그의 역할이 무척이나 중요했기 때문에,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일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저 마법사놈의 능력을 파악해야 해. 다른 놈이 먼저 공격해 주길 기다려야겠어.’
눈앞에서 줄어드는 초시계를 보며 단단하게 수비 태세를 취하는 마틴.
그리고 경기가 시작된 순간.
-지금부터, A조의 경기를 시작합니다.
띠리링-!
“와아아……!”
“로터스, 이겨라!”
“아세르! 전부 다 쓸어 버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어마어마한 함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지만, 경기장 안에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전투 시스템의 구조상 선공이 무조건 유리한 싸움이 아니었으니.
마틴이 그러하듯 나머지 출전자들도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맥이 빠지거나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경기장 밖의 유저들도 충분히 이 전장의 매커니즘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긴장감에 동화되어 갔으니 말이다.
“크, 누가 선방 때릴까?”
“이런 싸움에서 아무래도 마법사는 불리할 텐데…….”
어느덧 콜로세움을 가득 채우던 함성이 잦아들고, 그 대신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전투의 긴장감.
하지만 그 긴장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다들 뭐 하는 거야?”
“……?”
다섯 출전자들 중 유일하게, 그 정체가 베일에 가려진 로터스의 마법사.
“여기, 싸우러 온 거 아니었어?”
그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콜로세움에 흐르던 고요함이 깨져 버렸으니 말이었다.
“이러면 재미없는데.”
휘익-!
긴장한 나머지 참가자들과 달리, 마치 옆집 마실이라도 나온 듯 툴툴거리며 휘적거리는 남자.
우우웅-!
남자의 지팡이가 휘둘러진 순간, 관중석은 다시 끓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저, 정령이다!”
“최상급이야!”
모든 관중들이 궁금해하던 마법사의 정체가 지금껏 단 한 번도 공식적인 경기에 등장한 적 없는 ‘정령 마법사’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말이었다.
“오! 정령 마법사라니!”
“최상급 정령을 둘이나 소환했어!”
뜨겁게 끓어오르기 시작한 기대감으로 인해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된 콜로세움의 경기장.
“대박!”
“이걸 내가 직관하다니!”
“역시 로터스!”
하지만 그 뜨거운 분위기는 고작 시작에 불과하였다.
“……!”
“어어……?”
다른 출전자들이 당황한 사이, 남자의 지팡이에서 거대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마이티 프로즌(Mighty Frozen)…….”
콰아아아-!
물론 랭커들은 순간적으로 반응하였지만, 워낙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었기에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고.
남자의 지팡이에서 퍼져 나온 한기는 그런 랭커들의 발을 천천히 옭아 매었다.
“선빵필승. 이건 기본 아닌가 친구들?”
이어서 남자의 지팡이에서, 수십 발의 빛줄기가 사방으로 쏟아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