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3화 5. 물의 부족들을 찾다 >
약 보름 정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안이 정령계 사대 속성의 부족들을 규합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뒤로, 벌써 2주라는 시간이 흘러 버린 것이다.
짧다면 짧고, 또 길다면 긴 2주라는 시간.
그동안 정령계에서는 정말 다이내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것은 공식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게임 매체들의 기사 헤드라인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속보! 제2, 제3 차원의 균열 함락!
-이대로 정령계는 무너지고 말 것인가?
-정령계 지원 병력의 도착!
-로터스와 세인트라이언의 약진! 제2차원의 균열 수복!
……후략……
정령계와 기계문명의 전쟁은 모든 카일란 유저들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기존에 용천이나 엘라시움, 명계 등의 다른 중간계를 공략하던 랭커들까지도, 전부 다 정령계의 균열에 모여서 참전 중인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인간 진영의 랭커들이 전부 모인 정령계의 진영과, 마족 진영의 랭커들이 전부 모인 기계문명의 진영.
이번 이벤트는 사실 중간계에서 열린 첫 번째 대규모 전쟁이자 메인 에피소드였기 때문에, 이렇게 대부분의 랭커들이 모인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크, 기사 대전이랑은 보는 맛이 또 다르네.”
“역시 카일란은 대규모 전쟁이지.”
“하…… 나도 참전 한번 해 보고 싶다.”
“그냥 구경하는 걸로 만족하는 게 어때? 우리 레벨대로는 저기 들어가면…… 아마 푹찍일걸?”
“그냥 하는 말이지, 뭐. 어차피 레벨 조건 때문에 전쟁 퀘 받을 수도 없을 듯.”
하지만 전쟁 에피소드가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계대전쟁 에피소드는 점점 마족 진영 유저들의 축제로 변해 가기 시작하였다.
-샤이야 봉우리를 함락한 어둠의 군단. 그리고 후방을 빼앗긴 정령계의 병력.
-제4, 제5 차원 균열의 함락! 다시 위태로워지는 정령계!
-최고의 전쟁 공헌도를 달성한 카이! 기사 대전의 패배를 만회하나?
처음 불의 부족들과 바람의 부족들이 전장에 합류했을 때만 하더라도 엇비슷해 보였던 전황이, 점점 더 기계문명 쪽으로 기울어져 갔으니 말이다.
랭커들의 활약과는 별개로 에피소드의 특성상, 정령계와 기계문명의 전력 차이는 유저들의 능력으로 메우기 어려울 만큼 큰 것이었다.
“으, 전쟁 공헌도고 나발이고…… 슬슬 발 빼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전력 차이가 크니, 공헌도 쌓기도 어렵고…….”
“난 하던 퀘스트나 하러 가련다. 어차피 이번 에피소드는 승산이 없어.”
“그러게. 애초에 스토리 진행상 기계문명이 이길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괜히 참전한 것 같기도 하고…….”
균열이 하나둘 함락당하면서 정령계의 진영이 확실히 열세에 빠지자, 인간 진영의 랭커들은 하나둘 발을 빼기 시작하였다.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가진 최상위권의 길드들은 공헌도를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버티고 있었지만, 애초에 자력으로 공헌도를 쌓기 힘든 중위권 이하의 길드들은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었다.
기계문명의 병력을 자력으로 상대하기 힘든 수준의 유저들은 전쟁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전쟁 승리 보상 정도뿐이었는데, 도저히 정령계가 승리할 각이 보이지를 않으니 발을 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이미 수백만 단위의 공헌도를 쌓은 상위권 길드들은 죽을 맛이었다.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면 공헌도가 절반으로 깎인다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미 너무 많은 공헌도를 쌓았기에 포기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마스터, 우리도 여기까지만 하고, 발 빼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지금까지 쌓은 공헌도 싹 날리자고?”
“하…… 아깝기는 한데…….”
“전쟁 끝날 때까지 최대한 공헌도 파밍 해서, 절반이라도 가져가야지.”
“후우, 그 시간에 다른 퀘스트 하는 게 더 이득인 것 같기도 한데…… 뭐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진짜.”
전쟁에서 패배할 시 절반의 공헌도라도 남길 수 있었지만, 중간에 포기하고 전장을 이탈하면 단 한 톨의 공헌도도 챙길 수 없는 시스템이었으니.
패색이 짙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다만 인간 진영의 상위권 길드들 중에서도 아직 승리의 희망을 놓지 않고 있는 길드도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로터스 길드였다.
“후, 버티기 힘드네, 진짜.”
“이안 형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하, 균열 전부 뺏기기 전에는 이안이가 돌아와야 하는데…….”
이안이 정확히 어떤 퀘스트를 하고 있으며, 그것이 이 전쟁 에피소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유저들이 바로, 로터스 길드의 길드원들 이었으니 말이다.
“전략을 바꿔야겠어, 레미르 누나.”
“어떻게?”
“아예 균열 하나에 집중해서, 이안이 돌아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지켜 내는 거야.”
“그게 무슨……?”
“차라리 발러 길드가 있는 쪽으로 우리가 지원을 가서, 그쪽 균열을 필사적으로 지켜보자는 거지.”
“흐음…….”
“균열이 하나라도 남아 있어야, 이안이 퀘스트 깨고 왔을 때 뭐라도 해 볼 수 있지 않겠어?”
“그건 그래.”
이안을 비롯한 로터스의 길드원들은 그간 쌓아 온 노가다로 인해 강력한 차원 마력 버프를 받을 수 있다.
반대로 기계문명의 기계들은 차원 마력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차원 마력으로 인한 버프, 또는 디버프가 전혀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
이것은 차원 마력 저항력을 충분히 올리지 못한 중위권의 유저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는 시스템이었지만, 로터스와 같은 최상위권 길드에게는 아주 유용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헤르스는 어떻게든 균열을 하나 이상 사수해 두어야 이안이 돌아왔을 때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확실히 발러 길드랑 힘을 합친다면, 균열 하나 정돈 지켜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올리버한테 연락해 보자, 헤르스 형. 지난번에 보니 그 친구, 우리 길드에 호의적이더라고.”
“좋아. 그럼 그렇게 한번 해 보자고.”
그리고 이렇게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무렵.
이안은 드디어 지원군 퀘스트의 마지막 단추인, ‘물의 부족’들을 만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 * *
엘던을 떼어 내고(?) 길드 거점으로 복귀하여, 때마침 돌아온 조나단과 마주친 이안.
그로부터 마력 환원 장치 해제를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안은 곧바로 다시 정령계를 향해 이동하였다.
물론 크르르를 신화 등급의 마수로 연성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쿨하게 포기하고 퀘스트를 진행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레시피에 들어가는 재료들 중, 당장은 절대로 구할 수 없는 재료를 발견했으니 말이었다.
골드나 차원 코인이 아무리 많아도, 절대로 구할 수 없는 고대의 아티펙트.
<마기의 이빨 장식>
-발록의 이빨을 모아 가공하여 만든 장식품으로, 강력한 마기를 담는 아티펙트입니다. 고대의 아티펙트 연성술을 사용해서 제작이 가능합니다.
고대의 아티펙트 연성술을 사용할 수 있는 이가 아직 유저들 중 아무도 없었기에, 이것은 경매장에서조차 구할 수 없는 재료였던 것이다.
물론 이안에게는 이 아이템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어둠의 요새에서 얻은 아티펙트 연성술을 가신인 ‘한’에게 습득시켜 두었으니 말이다.
다만 한조차도 아티펙트 연성술을 이제 막 습득했을 뿐이었고, 마기의 이빨 장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작에 필요한 레시피까지 알아내야 했으니.
이안이 아무리 빨리 크르르를 연성하고 싶다 하더라도, 당장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안은 아무런 미련 없이 정령계 퀘스트로 다시 방향을 선회할 수 있었고, 덕분에 지금 이안이 도착한 곳은 어느새 샤이야 산맥이었다.
다만 재밌는 점은, 이안과 더 이상 같이 다니지 않겠다고 맹세(?)한 조나단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이. 간다더니 왜 또 따라오는 건데?”
“…….”
“단검도 줬고, 약속했던 거 다 줬잖아.”
“…….”
“볼일 끝났으면 이제 그만 가 보라고.”
“흐음, 그러니까, 그게…….”
처음 이안의 심부름을 완수하고 거점으로 돌아올 때만 하더라도, 조나단은 더 이상 이안의 퀘스트(?)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으며, 실제로 그 다짐을 실행했었다.
-수고했어, 조나단. 역시 깔끔하군.
-약속했던 거나, 어서…….
-그거야 당연히 줘야지.
이안에게 단검과 퀘스트 보상을 받은 뒤, 곧바로 자신의 길드 파티로 복귀하려 했던 것이다.
진짜 어지간히 매력적인 보상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면, 칼같이 끊고 개인 퀘스트를 진행하러 움직일 생각이었던 것.
-약속은 확실히 지켜서 좋군. 그럼 난 이제 가 보도록 하지.
-응? 어딜 가려고.
-길드에 바쁜 일이 생기기도 했고, 너랑 더 다니다가는…… 뼈마디가 삭아 버릴 것 같아서 말이지.
-엄살은…….
-엄살이라니! 마력 환원 장치인지 뭔지. 그거 해제하다가 익사할 뻔했다니까?
다만 문제는 역시, 이안이 제안한 보상의 매력이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럼 잘 가라고.
-흠흠.
-다음 퀘스트를 도와주면 ‘파괴자의 부적’을 주려 했는데, 뼈마디가 삭을 것 같다니 어쩔 수 없지, 뭐.
-……?
이안이 보상으로 언급한 파괴자의 부적은 암살자 클래스라면 누구나 눈이 돌아갈 만큼 귀하고 매력적인 아이템이었던 것!
인벤토리에 가지고만 있어도 암살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옵션인 ‘방어 관통’스텟이 5%나 상승하는 꿀템이다 보니, 익사를 경험할 뻔했던 조나단조차도 포기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저, 정말 파괴자의 부적을 준다고?
-일 없다. 가던 길 가셈.
그렇다면 파괴자의 부적이, 최상위급의 랭커인 조나단조차도 아직 구하지 못했을 만큼 귀한 아이템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아니었다.
이미 조나단의 인벤토리에도, 파괴자의 부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 파괴자의 부적에는 특수한 옵션이 있었는데, 조나단의 눈이 돌아간 것은 이 옵션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두 개 이상의 파괴자의 부적을 보유할 시, 모든 파괴자의 부적 옵션이 절반의 성능으로 적용됩니다.
*파괴자의 부적 옵션은 최대 5중첩까지 가능합니다.
파괴자의 부적 옵션인 방어 관통이 최대 다섯 번까지 중첩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미 세 장 가지고 있는 조나단에게도 너무 매력적인 아이템일 수밖에 없었던 것.
현재 조나단이 파괴자의 부적으로 얻은 방어 관통 스텟은 7.5%였는데, 이안에게 한 장 얻는다면 10%까지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경매장에서도 구할 수 없는 이 귀한 아이템을 얻을 기회를 조나단으로서는 버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하였다.
“아니, 왜 아직 안 가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 파괴자의 부적…….”
“길드에 바쁜 일이 있다며?”
“그, 그건…… 괜찮아졌어.”
“……?”
하여 샤이야 봉우리까지 슬금슬금 따라온 조나단을 확인한 이안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나단이 하는 짓이 제법 귀여웠으니 말이었다.
‘이제 그만 놀려 줄까……?’
하여 씨익 웃어 보인 이안은 조나단을 향해 다음 퀘스트를 공유해 주었고.
띠링-!
-‘물의 부족을 찾아서 Ⅲ(연계, 히든, 에픽)’ 퀘스트를 유저 ‘조나단’에게 공유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마수를 벗어나지 못한 조나단은 점점 더 이안이라는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