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4화 5. 물의 부족들을 찾다 (2) >
* * *
샤이야 산맥에 처음 도착한 이안과 조나단은 가장 먼저 끝없는 전투를 해야만 했다.
마력 환원 장치가 해제된 것을 알아챈 어둠의 군단이 샤이야 산맥을 더 철통같이 지키기 시작했으니.
물의 부족이 있는 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방어선을 뚫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조나단 또한 크게 불만이 없었다.
물론 전투의 난이도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지만, 조나단 또한 이런 고난도의 전투를 즐기는 실력자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안과 함께하는 전투는 무척이나 시원시원했으니, 오히려 만족스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후, 역시 이안인가…… 명불허전이군.’
하지만 그 치열한 전투가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조나단은 곧 첫 번째 후회(?)를 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이 호수 밑으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거지……?”
“그렇다니까. 퀘스트에 좌표가 떡하니 떠 있는데, 왜 또 물어보는 거야?”
“하아…….”
물의 부족들이 있다는 퀘스트 목적지의 좌표가, 무척이나 낯익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젠장!’
물의 부족들이 있는 곳이 바로, 조나단이 익사할 뻔했던 그 호수의 안쪽이었던 것.
‘이번에도 또 수중 퀘스트라니…….’
물속에서 그 고생을 하며 익사할 뻔한 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또다시 물속으로 들어가게 생겼으니.
그렇지 않아도 이안으로부터 탈출하겠다는 다짐까지 했던 조나단으로서는, 자괴감(?)이 드는 게 당연한 것이다.
‘아오, 진짜 흑우가 따로 없네.’
하지만 그의 자괴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미루, 부탁해도 될까?.”
“물론이야, 이안. 이 정도 쯤이야.”
이안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어깨 위로 작은 요정이 폴폴거리며 날아올랐고.
-القوة القديمة ، تظهر الطريق…….
요상한 주문을 외우는 순간, 거대한 냉기의 바람이 호수를 향해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고오오오오-!
요정의 작은 몸에서 퍼져 나온 빛이 거대한 한기의 폭풍이 되어 호수를 얼리기 시작한 것.
“뭐, 뭐 하는 거야?”
놀랍게도 얼어붙은 호수의 한복판에 커다란 얼음 동굴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눈치가 빠른 편인 조나단은 이 요정이 뭘 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미친……! 물을 얼려서 길을 만들고 있잖아?’
얼어붙는 호수와 그 안쪽에 생기는 얼음길을 보며, 조나단은 두 가지의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일단 다시 물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후우…….”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안에 대한 강렬한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이 사악한 놈!’
이런 고차원적인(?) 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안이 이야기해 주지 않은 탓에, 이전 퀘스트에서 익사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야이, 씨.”
“갑자기 왜 그래?”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즉에 알려 줬어야…….”
“아, 그럴 걸 그랬나?”
“후우…….”
하지만 강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조나단은 이안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화를 낸 다음의 시나리오가 또 머릿속에 뻔히 보였으니 말이다.
-와 씨, 이안. 너, 너무한 거 아냐?
-그럼 돌아가든가.
-……!
-난 여기 있으라고 한 적 없다?
-혀, 형님…….
파괴자의 부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는 한 조나단은 절대 ‘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결국 찍 소리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참자, 참아. 파괴자의 부적만 손에 넣으면, 내가 뒤도 안 보고 길드 퀘 하러 돌아간다.’
하여 혼자 분노를 삼키며 다시 조용해진 조나단과, 이안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계속해서 고대의 마법 주문을 외는 미루.
그렇게 3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법 영창을 끝낸 미루가, 이안의 앞으로 폴폴 날아 내려왔다.
“다 됐어, 이안.”
“고마워, 미루.”
“고맙긴. 너 아니었으면 아직까지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을 텐데…… 이쯤은 당연히 도와줘야지.”
“흐흣,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과거 이안 덕에 성령의 유물을 얻고, 끝없이 이어지던 고통에서 해방된 미루.
이안에 대한 그녀의 친밀도는 최상에 가까웠으니,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친밀도를 떠나 미루가 이안을 돕는 가장 큰 이유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고마우면, 나중에 파프마 녀석들이나 꼭 찾아서…… 심판해 줬으면 좋겠어.”
“그야 당연하지, 미루. 그놈들은 정령계의 공적이나 다름없는걸.”
지금의 미루를 탄생시킨 장본인이자, 그녀를 고통에 시달리게 만들었던 원흉.
정령계의 배신자 ‘파프마 일족’에 대한 적개심 또한, 이안을 돕게 만드는 중요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하여 그러한 이유들 덕에 ‘최고 티어 NPC’인 미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이안은 물의 부족이 있는 위치까지 어렵지 않게 이동할 수 있었다.
저벅-저벅-.
호수 주변을 지키던 어둠의 군단들까지 깔끔하게 박살 내어 놓았으니, 그들을 방해하는 존재도 없었고 말이었다.
하여 여유가 생긴 이안은 얼음 동굴을 걸어 내려가며 미루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었다.
“지난번에도 봤지만, 미루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헤헤, 대단하긴. 이안 너도 고대의 정령 마법을 배웠다면서?”
고대의 정령술을 사용하는 그녀와의 친밀도를 더욱 높여 놓는다면, 뭔가 콩고물이 더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미루에 비하면, 아직 난 초보지 뭐.”
“겸손은…… 다음에 한번 네 마법을 보여 줘, 이안. 네가 어떤 고대의 정령 마법을 쓰는지 궁금하네.”
물론 당장 어떤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마치 농사짓는 농부의 심정이랄까?
씨를 뿌리고 물을 주듯, 주요 NPC와의 친밀도를 틈날 때 마다 쌓는 것은 이안에겐 이제 패시브 스킬 같은 개념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안과 미루가 대화하는 동안, 일행은 어렵지 않게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애초에 미루가 정확한 좌표를 향해 얼음길을 만들어 준 것이었기에,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주인, 아무래도 저긴 것 같다.”
앞장서던 카카의 목소리를 들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카가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눈에 살짝 이채가 어렸다.
‘부락 자체가 수중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네?’
미루가 만들어 준 얼음길은 호수의 깊숙한 곳을 따라 만들어 졌지만, 결국 곡선을 그리며 다시 수면으로 올라가, 물 바깥까지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지상이라기에는 무척이나 어둡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동굴.
물의 부족들이 기거하는 부락은 호수를 통해서 이동해야만 도착할 수 있는 샤이야 봉우리 깊숙한 곳의 비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이안은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까 무슨 수를 써도 못 찾았던 거지.’
보름 전쯤 샤이야 산맥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물의 부족을 찾지 못했던 이유를, 완전히 깨달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잠시 부락의 외관을 감상(?)하던 이안의 귀로 조나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전부 크리스털인가? 엄청나게 화려하군.”
온통 물빛의 수정으로 만들어진 부락의 외형에 조나단도 적잖이 감탄한 목소리였다.
“글쎄, 크리스털이라기엔 좀 더 투명한 느낌이긴 한데…….”
이안의 옆을 폴폴 날던 미루가 이안 대신 답해 주었다.
“저건 물의 힘으로 만들어진 자연의 결정이에요. 크리스털과는 다르죠.”
“아하……?”
“그러니까 저걸 가지고 나갈 생각은 않는 게 좋아요. 물의 힘이 가득한 이 공간을 벗어나면, 결정들은 아마 흩어져 물처럼 흘러 버리고 말 테니까요.”
“뭐, 저걸 가져가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만…….”
뭔가 속내를 들킨 것인지 멋쩍은 표정이 된 조나단을 뒤로한 채, 이안은 부락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이안은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뭐지? 부락에 이렇게까지 가까이 왔는데…… 어떻게 경비병 하나 없을 수가 있는 거야?’
물론 물의 부락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난해한 위치인 것은 맞았지만,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너무 이상할 정도로 방비가 소홀해 보였던 것.
게다가 부락의 안쪽에서도 어떤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으니, 이안으로서는 이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여 이안은 더욱 긴장한 표정이 되어, 조심스레 부락의 정문으로 보이는 곳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순간.
띠링-!
예의 그 익숙한 시스템 알림음과 함께,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주르륵 하고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샤이야 산맥, ‘물의 부락’에 도착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숨겨진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후략……
그리고 그 메시지의 끝에는…….
놀라운 내용의 퀘스트가 이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의 정령왕, 엘리샤의 안배 (에픽)(히든)(연계)’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 * *
이안은 물의 부족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물의 부락을 찾아왔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처음부터 물의 부락에는 이안을 도와줄 수 있는 물의 부족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부락을 지키던 물의 부족원들은 아주 오래 전 자신들의 힘을 봉인한 채, 지금까지 잠들어 있었으니 말이었다.
지금 물의 부락 안에 들어선 이안의 시야에는 물의 부족원들 대신, 보석처럼 파랗게 빛나는 알 수 없는 영체들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이게 대체…….’
그 때문에 이안은 처음,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물의 부족들이 존재치 않았던 것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존재했으니 말이었다.
첫째.
정령의 신 네트라가 ‘물의 부족’을 찾으라며 ‘물의 나침반’을 건네줬던 것.
그리고 둘째.
처음 물의 부족을 찾아 왔을 때, 용천의 NPC인‘드라토쿠스’가 물의 부족들 중 하나인 아쿠스를 ‘몰아내었다’라고 이야기했던 것 까지 말이다.
그들이 유저였다면 얼마든 거짓을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네트라와 드라토쿠스는 모두 확실한 NPC였고, NPC가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니 이안으로서는 혼란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의 그 의문점은 퀘스트 내용 안에 쓰여 있던 한 줄의 문장을 통해, 어렵지 않게 풀릴 수 있었다.
-정령왕의 대리인을 기다리며 샤이야 산맥을 떠돌던 아쿠스 일족은, 결국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부락으로 쫓겨나 봉인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집념으로 부락을 찾아내었고, 엘리샤의 안배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쉽게 정리하자면, 어떤 마족 유저의 훼방으로 인해 퀘스트가 중간에 꼬여 버렸을 뿐이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루트로 퀘스트가 진행되었다면 이안은 천룡 드라토쿠스를 만날 일조차 없었을 것이고.
이안을 기다리던 아쿠스 일족을 만나, 이곳 물의 부락까지 인도받았을 테니 말이다.
‘후, 하마터면 에픽 퀘 날려 먹을 뻔했잖아?’
퀘스트 창을 읽어 내려가며, 다시 한번 안도하여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안.
하지만 잠시 후, 길게 이어진 퀘스트의 내용을 읽을수록 이안의 두 눈은 점점 더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