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4화 4. 찰리스의 최후 (3) >
* * *
찰리스의 기계 발록과 이안이 소환한 수호령의 싸움.
이 전쟁의 결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이 싸움은, 사실상 이안과 찰리스 둘만의 결투나 다름없었다.
기계 발록과 수호령의 주변에는 NPC나 이안의 소환수들을 제외하고는 양 진영을 막론하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찰리스의 스펙 자체가 인간 진영의 평범한 랭커들이 건드려 볼 수 없는 수준이었으며.
반대로 두 정령왕과의 계약에 더해 정령신의 가호까지 받은 이안의 스펙 또한, 마족 랭커들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비단 이안의 스펙이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메인 에피소드를 클리어하고 정령의 구원자가 된 유저가 만약 이안이 아니라 다른 랭커였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를 것 없었을 테니 말이다.
만약 퀘스트로 인한 버프와 정령왕들의 힘을 제외한다면, 이안의 전투력도 지금의 1/4 수준밖에 되지 않을 것이었으니까.
-수호령의 전투력이 정말 엄청나군요.
-찰리스의 기계 발록을 일대일로 상대 가능한 유저가 존재하다니…….
-두 정령왕의 힘을 등에 업기는 했지만, 확실히 대단합니다, 이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안을 제외한 다른 유저들의 싸움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두 진영 간의 전투가 한쪽으로 압도적으로 밀린다면, 그것이 이안과 찰리스의 전투력에 영향을 미칠 테니 말이다.
다른 랭커들이 치열하게 서로의 진영과 전투하며 전장의 균형을 유지해 주고 있는 것이, 이안과 찰리스의 전투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이안과 두 정령왕의 힘이 찰리스를 상대하는 데 집중되니, 확실히 전체적인 전력은 다시 기계문명 쪽으로 기울어지는군요.
-유저들의 숫자는 정령계가 더 많지만, 아무래도 군단장들의 힘이 강력하니까요.
-어찌 됐든 정령계는 버텨 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안이 찰리스를 처치해 낼 때까지, 어떻게든 기계문명의 진격을 막아 내야만 해요!
그리고 이렇게 치열한 혈투 끝에, 이안이 조종하는 수호령의 삼지창이 드디어 발록의 심장을 관통하였다.
콰앙-!
-‘권능의 수호령’이 ‘찰리스의 기계 발록’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찰리스의 기계 발록’의 방어장갑이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기계 발록’의 물리 저항력이 급격하게 감소합니다.
-‘기계 발록’의 내구도가 3,100,922만큼 감소합니다!
-‘기계 발록’의 내구도가 10% 미만으로 떨어집니다.
-‘기계 발록’의 코어 설비가 파괴되었습니다!
발록을 감싸고 있던 강력한 철갑이 결국 내구도가 다해 파손되었고, 그 파손된 균열 사이를 수호령의 삼지창이 정확히 찌르고 들어간 것이다.
콰득-!
이어서 찰리스의 부서진 장갑 사이로 정확히 창을 꽂아 넣은 이안은, 수호령의 양손으로 창대를 틀어 쥔 채 그대로 비틀어 버렸고.
지이잉-콰쾅-!
-‘기계 발록’이 추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기계 발록’의 내부 설비가 파괴됩니다.
-‘기계 발록’의 내구도가 671,829만큼 감소합니다!
-‘기계 발록’의 내구도가 510,092만큼 감소합니다!
-‘기계 발록’의 내구도가 691,102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발록의 심장에 꽂힌 채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비틀어진 창대를 밟고 뛰어, 그대로 발록의 심장에 팔꿈치를 틀어박았다.
콰쾅-!
모든 기계 괴수들에게는 ‘동력 장치’가 심장이나 다름없는 개념이었고, 수호령의 팔꿈치가 정확히 그곳을 가격한 것이다.
퍼엉-!
그리고 이렇게 되자, 아무리 강력한 맷집을 가진 찰리스라 해도 더 이상 버텨 낼 수는 없게 되었다.
지직-지지직-!
발록을 감싸던 전신의 장갑이 균열을 만들어 내며 부서졌고, 내부 설비가 박살난 탓에 이제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태가 되었으니 말이다.
-크아아아아-!
분노한 찰리스는 포효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있을 턱이 없었다.
-수, 수호령의 삼지창이 찰리스의 심장을 뚫었습니다!
손에 땀을 쥐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해설진은 각자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분명히 수호령의 삼지창이 찰리스의 동력 장치를 파괴한 듯 보였지만, 아직까지 찰리스의 생명력 게이지는 미세하게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공격에 성공한 이안의 수호령도 소멸되기 직전까지 생명력 게이지가 떨어진 상황이었으니, 마지막까지 이 전투의 결말을 확신할 수 없었다.
-수호령의 생명력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렇게 모두가 긴장한 순간.
띠링-!
전장에 참전해 있던 모든 유저들, 그리고 옵져버를 통해 방송을 해설 중이던 모든 해설진들의 눈앞에, 전쟁의 끝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정령계의 구원자’에 의해 찰리스의 ‘기계 발록’이 파손되었습니다.
-기계군단의 전투력이 대폭 약화됩니다.
-균열의 힘이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중략……
그리고 그 메시지들을 마지막으로.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가 발동합니다.
전장에 있던 모든 유저들과 NPC들의 움직임이, 일시에 정지되었다.
에피소드의 진행과 함께, 통제권을 잃어버린 것이다.
“……!”
그리고 상황이 이쯤 되자, 유저들은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됐어……!’
‘해냈어!’
이 전쟁의 결말이 정령계의 승리로 끝났음을 말이다.
쿠쿠쿵-쿵-!
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쥔 정령계의 유저들은 마음 편히 에피소드의 진행을 지켜보기 시작하였다.
* * *
모든 불빛이 잦아들어, 어두컴컴해진 전장.
그 안에서 가장 먼저 울려 퍼진 것은 트로웰의 묵직한 목소리였다.
-드디어, 억겁의 세월 동안 쌓여 온 정령계의 숙원을 풀어내었군.
그리고 트로웰의 그 목소리에 대답한 것은, 무너진 발록의 잿더미 사이에서 일어난 작은 찰리스의 그림자였다.
-재미있군. 나 찰리스에게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강력한 권력과 기계 로봇이 없는 찰리스는 무척이나 왜소하였다.
새카만 폭발 속에 그을린 주름진 얼굴은, 한낱 평범한 노인의 그것일 뿐.
하지만 찰리스의 눈빛만큼은 아직도 무척이나 강렬하였다.
-네놈의 저주받은 힘이, 영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는가?
-글쎄. 한 번도 내가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
-다만 이렇게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부서져 버릴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뿐.
찰리스의 담담한 시선이, 그의 앞에 선 거대한 수호령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자 수호령의 신형은 초록빛 안개가 되어 허공에서 흩어졌고, 그 자리에 황금빛 기운으로 뒤덮인 이안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새파란 빛을 뿜어내는 엘리샤가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네트라 님의 가호를 받으신, 정령계의 구원자십니다.
-후후, 그래서?
-그대의 권력이, 하찮은 인간의 손에 무너진 것은 아니라 알려드린 것뿐이지요.
-…….
엘리샤의 차분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찰리스는 자조적인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를 향해, 엘리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멸이란, 그대에게도 두려운 것이었군요.
카일란의 세계관에서 ‘죽음’과 ‘소멸’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었다.
죽은 자들의 차원계인 ‘명계’또한, 결국 중간계의 하나일 뿐이니 말이다.
하여 엘리샤가 이야기한 ‘소멸’이라는 것은 찰리스라는 존재의 완전한 소거를 의미하는 것.
하지만 그 담담한 엘리샤의 목소리에도, 찰리스는 별다른 동요 없이 대답하였다.
-어차피 소멸 따위가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엘리샤.
-…….
-신들의 섭리를 거역한 나의 결말은 결국 소멸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대는 결국 인간이었죠.
‘신들의 섭리를 거역하였다’는 찰리스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복합적인 것이었다.
그가 거역한 신들의 섭리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만 찰리스가 저지른 다른 모든 죄악을 전부 제하더라도.
그는 이미 절대로 명계를 밟을 수 없는 한 가지 죄악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섭리’를 거역한 죄.
인간으로서의 천수를 거부하고 수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계문명의 힘으로 살아온 찰리스는 결국 소멸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찰리스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아쉬운 것은 단 하나뿐.
-그게 뭔가?
-문명의 힘…… 그 한계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문명의 힘이 가진 한계라…….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속이 후련하군.
-……?
-나는 여기서 소멸하지만, 나의 안배는 아직 남아 있을 테니 말이지.
-그게 무슨…….
트로웰과 대화하던 찰리스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하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거든.
-……!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찰리스의 대사가 끝나자, 황금빛으로 빛나던 이안의 신형이 그의 앞에 다가섰다.
물론 이안을 움직이는 것은 이안이 아니었다.
에피소드의 진행에 의해 이안을 통제하고 있는, 이안의 AI가 움직인 것이었다.
양손에 각각 한 자루씩의 심판대검을 늘어뜨린 이안은, 찰리스의 앞에 서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안배…… 그런 것이 있다 한들, 신의 섭리를 다시 거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후후, 그것이야 세월이 다시 이야기해 주겠지.
-그래. 헛된 망상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소멸’이라는 공포를 극복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우우웅-!
이안은 양손에 들고 있던 심판 검을 높게 들어 올려, 등 뒤로 천천히 교차시켰다.
그리고 그런 그를 지켜보던 찰리스는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내게 유일한 후회가 있다면, 그것은 2년 전 네놈을 죽이지 못한 것이다.
-그런 후회라면, 할 필요 없을 것이다, 찰리스.
-……?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니…….
촤아악-!
찰리스를 향해 담담히 대답한 이안은 등 뒤로 교차시켰던 두 자루의 검을 그대로 찰리스를 향해 쏟아 내었다.
그러자 심판 검에서 뻗어 나온 시퍼런 섬광이, 찰리스의 몸을 그대로 폭사하며 지나갔다.
콰앙-!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띠링-!
중간계에 접속해 있던 모든 유저들의 눈앞에, 에피소드의 종결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하고 떠올랐다.
-정령계의 구원자, ‘이안’이 기계문명의 지도자 ‘찰리스’를 처치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중략……
-정령계와 기계문명을 잇는 모든 차원의 균열이 소멸됩니다.
-‘최후의 전쟁’ 에피소드가 종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