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세를 몰아 좀 더 뽑기를 돌려 볼까?
사람이 고할 때와 스톱할 때를 알아야 하는데 왠지 지금이 GO! 아닐까? 묘하게 확률도 좋은데, 등급은 상관없고 더 뽑으면 저렇게 잘생기고 예쁘고 멋진 드라이어드들을 많이 만날 수 있잖아.
욕망에 눈이 멀어 수량을 짐작하려 머리를 굴리는데, 별안간 빈혈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머리가 핑 돌고 시야가 훅 낮아졌다. 휘청 몸이 기우는 것을 메스키트가 붙잡았다.
메스키트의 한 팔에 폭삭 안겨 있는 것이 마치 용사와 공주 같은 느낌이었지만, 빙글빙글 도는 머릿속 때문에 마음껏 이 상황을 즐기지도 못했다.
“영혼의 한계치에 도달하신 겁니다.”
“…그게 뭐죠?”
메스키트가 걱정이 된다는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사막의 태양과도 같은 호박색의 눈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제이, 내 주인은 너무나도 여리구나. 어린 인간 아이보다도 더….”
애 취급받는 것은 좀 그렇지만, 그래도 멋진 메스키트가 걱정을 해 주니 마냥 좋았다. 엘더가 내 이마에 손을 대자 흰 빛이 새어 나와 내게 스며들었다.
“내 기술은 드라이어드에 특화되어 있지만 인간인 너에게도 영향은 줄 거야. 좀 나아졌지?”
“오… 역시 힐러.”
“비용은 100다이아다.”
“미친….”
네 주인 죽어 가는데 다이아 타령을 하고 싶더냐! 눈으로 쌍욕을 하고 있으니 농담이라며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제가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는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드렸죠? 드루이드님께서 작은 세계수가 되어 그들에게 힘을 나눠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바로 영혼의 힘이지요. 아직 드루이드님은 수행이 부족하여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 수에 한계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등급이 높은 드라이어드일수록 필요로 하는 영혼의 힘은 더욱 많아지지요. 아마 여기서 더 드라이어드를 얻으시면 몸이 더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그럴 순 없어….”
랜덤 뽑기 게임은 기본으로 극혐하지만 플러스로 더 극혐하는 것은 일본의 카드 게임 방식인 ‘COST 시스템’이었다.
수용할 수 있는 캐릭터 칸이 많더라도 COST에 맞춰서 해야 되기 때문에, 내 한계 COST가 30이고 캐릭터들 각자의 COST가 15, 13, 12라면 30이 넘지 않게 조합해 최대 2명밖에 데려가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아, 극혐. 난 내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멋지고 예쁜 드라이어드로 가득 채워야 한단 말이다. 이보게, 안내원 양반, 방법이 없는 겁니까…!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지내며 영혼의 힘을 키우시면 됩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전투를 하면 되는 것이죠. 빨리 많은 드라이어드들을 부리고 싶으시다면 드라이어드들과 많은 전투를 하시면 됩니다.”
한마디로 레벨 업 하란 말이시군요. 이것이 쪼렙의 비애인가…. 원통하다. 내가 다이아가 이렇게 많은데 뽑기를 강제로 그만해야 된다니. 내가 내 돈을 쓰겠다는데!
뭐, 그래도 스페셜 등급과 유니크 등급을 얻었으니까 됐다. 남들은 레어만 나와도 펄펄 뛰는데 나는 행복한 소리를 한 거지. 다 끝났으니까 데이지나 만나러 가야겠다.
상태가 나아져서 메스키트의 부축을 거절했다. 행복했지만 더 이상은 심장이 무리였다. 잠깐 엘더를 보고 잘생긴 그의 품에 똑같이 안겨 있는 상상도 해 보았다.
왠지 1초당 100다이아를 내놓으라는 산통 깨는 소리를 할 것 같아서 관두었다. 전혀 설레지 않았다.
“아!”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나는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들어 둘에게 보여 주었다.
“나 당신들이 여기 안에 들어간 모습 보고 싶어!”
마이 룸! 마이 룸! 웰컴 투 마이 룸! 들어오면 설마 다른 게임들처럼 2D가 되나요?
내 간절한 요청에 메스키트가 땅에 떨어진 랜스를 주웠다.
“내 주인, 제이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메스키트의 몸이 순식간에 흰빛으로 감싸였다. 그리고 빛 무리가 되어 뾰로롱, 하고 유리 돔 안으로 들어갔다.
내 작은 유리 돔 안에 개미보다 아주 작아진 메스키트가 움직이고 있었다. 테라리움 아티팩트 안이 생각보다 많이 축소되어 있었구나. 혹시 내가 움직이면 안에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걸까?
조금 손을 움직여 보았는데 메스키트는 평안해 보였다. 다행이다.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흔들리지 않게 팔을 고정해서 움직여야 되나 걱정했잖아.
그런데 엘더는 메스키트와 달리 절대로 한 번에 들어주는 법이 없었다.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허리를 숙여 내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바라보았다.
“뭐야? 너무 황량하잖아. 아무것도 없는데? 넌 다이아도 많으면서 왜 아무것도 안에 두지 않았어?”
“어디서 사면 되는데?”
내가 돈이 없어서 못 샀겠니? 얻은 지 한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어디서 어떻게 꾸미는 줄 알면 다 털어서 꾸몄지.
“공방에서 사면 되지. 싸구려는 싫어. 고급스럽고 화려한 걸로!”
“일단 곱게 좀 들어가면 안 돼? 나 드라이어드가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단 말이야.”
어련히 알아서 내 드라이어들을 위해 좋은 걸로만 마련해 줄까. 지금의 너를 보면, 너는 좀 고민해 보겠다만 멋진 메스키트를 위해선 그곳에서 가장 비싸고 좋다는 것만 사줄 거다.
“넌 왜 나랑 메스키트를 대할 때가 달라? 나한테도 좀 곱게 대해 봐.”
“네 주둥이가 고와지면 나도 생각해 볼게.”
저건 삐친 표정이다. 남들이 하면 나잇값 못 하는 유치한 놈이 될 법한 표정도 예쁜 엘더가 하니 그냥 예뻤다. 얼굴이 다했다. 엘더는 신이 내린 주둥이임과 동시에 신이 내린 얼굴이 분명했다.
핸드폰을 털어 다이아를 꺼내 살살 달래니 금세 풀어져서는 유리 돔 안으로 쏙 들어갔다. 대체 쟤는 다이아를 어디다 쓰려고 저렇게 집착하는 걸까?
테라리움 아티팩트에 손을 대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머릿속에 확대된 유리 돔 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메스키트와 엘더는 황량한 풍경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그러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서로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향하며 걸어갔다.
어느 지점에 도달해서는 메스키트는 랜스 끝으로, 엘더는 스태프 끝으로 땅을 툭툭 쳤다. 저거 뭐 하는 걸까? 하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메스키트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내 주인, 제이. 제 보금자리를 꾸미는 거랍니다. 저와 엘더 꼬맹이는 자생지의 환경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서로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죠.”
“자꾸 꼬맹이라고 하지 마. 오래 산 게 자랑이야?”
“네가 묘목일 때가 생각나는구나. 그땐 내가 참 살뜰히도 샘물을 퍼다 날라 주었는데 말이야. 땅도 골라 주고.”
마치 메스키트의 말이 ‘네가 어렸을 땐 기저귀도 갈아주고 우유도 먹여 줬는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갓난아기 엘더에게 젖병을 물리는 메스키트를 생각하니까 웃겨서 미칠 것 같았다.
“이상한 상상하지 마! 드라이어드들은 인간들과 성장이 달라!”
뭐야, 내가 상상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
“내 주인, 제이가 이 테라리움 안을 들여다보면서 하는 생각은 곧이곧대로 우리에게 흘러들어온답니다. 정말 귀여운 상상을 하시는군요. 물론 그와 비슷하게 제가 엘더를 업어 키우긴 했답니다.”
“난 그런 기억 없어!”
“그땐 엘더 꼬맹이, 네가 꽃도 피기 전, 파릇파릇할 때잖니.”
메스키트는 웃으며 말했다. 멀리 있어도 서로의 목소리는 들리는구나.
둘은 하던 일을 마저 했다. 랜스 끝과 스태프 끝에서 튀어나온 빛이 서로가 딛고 선 땅에 스며들어 갔다.
그 순간 메스키트가 딛고 선 땅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모래알들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번져 가던 모래 바닥이 어느 지점을 기점으로 세력 확장을 멈췄다. 꼭 작은 사막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메스키트의 자생지는 데저트 필드, 즉 사막이라고 했지. 메스키트의 랜스 끝이 닿은 땅에서 작은 새싹이 피어올랐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던 그것은 메스키트의 키를 4번 정도 넘길 만큼 크고 굵게 자라났다. 뾰족하고 얇은 나뭇잎들이 자라고 그 안에 노랗고 작은 꽃들이 모여 있는 길쭉한 꽃줄기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바로 메스키트의 모체 식물인 ‘벨벳 메스키트 나무’였다.
설마 드라이어드들을 테라리움 아티팩트에 수집하면 모체 식물로 그 안을 꾸밀 수 있는 건가?
“내 주인, 제이. 맞습니다. 제 나무가 매우 아름답고 우람하죠? 전 땅속 9미터 아래까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강인한 식물이랍니다. 사막에선 제가 있는 곳이 곧 지하수가 있는 곳이죠. 덕분에 제가 사막의 수호신이 된 것이랍니다.”
진짜 멋있다. 곧고 강인해 보이는 메스키트 드라이어드의 모습답게 모체 식물도 굉장히 멋있었다.
“여기도 봐! 내 꽃도 얼마나 아름다운데!”
엘더가 있는 곳에도 새하얀 눈덩이들이 소복소복 맺혀 있는 것 같은 아름다운 나무가 한 그루가 초원에 우뚝 솟아 있었다.
저것이 엘더의 모체가 되는 ‘엘더 플라워’구나. 엘더 얼굴값 하는 나무였다. 진짜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어쩐지 좋은 향기도 나는 것 같다.
내가 느낀 그대로 온갖 칭찬을 하자 엘더의 얼굴이 기고만장해졌다. 좀 더 해 보란 식으로 귀를 열고 있길래 그 뒤로도 더 찬양해 주었다. 다루기 쉽다.
둘은 그 뒤로도 보금자리를 꾸미기 위해 바빠 보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내 예쁘고 멋진 드라이어드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둘 다 체구가 나보다 워낙 커서 사람 많은 시장거리를 지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엘더는 또 옷이 오죽 치렁치렁해야지. 메스키트의 랜스는 들고 있기만 해도 살인 무기가 아닐까?
잠시 테라리움 아티팩트에 지내고 있도록 두고 데이지를 찾으러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확연히 줄어 있었다.
내가 온실 안에서 시간을 꽤 소모한 모양이다.
내가 있던 온실 외에도 다른 온실이 더 있었던지 이미 개화한 드라이어드들을 데리고 있는 사람도 꽤 있었다.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상당히 화려한 외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드라이어드가 더 멋있었다. 여기 있는 드라이어드들 다 모아도 엘더가 얼굴 한 번 내비치면 다 눌러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온실에서 나오자 몇몇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 내가 뽑은 드라이어드를 궁금해하는 거겠지.
하지만 내 옆에 아무도 없자 멋대로들 해석했는지 수군거렸다. 물론 내가 4개의 꽝을 뽑긴 했지만 그 뒤는 스페셜과 유니크다! 누가 뭐라 해도 내 마음이 풍족하면 됐다. 우리 드라이어드들은 보금자리 꾸미느라 바쁘니까 배려해 줘야지.
금방 뒤따라 나온 안내원이 나가는 문까지 날 에스코트했다. 다이아를 잔뜩 쓴 나는 마치 백화점 VVIP 고객이 된 것 같았다.
헤어지기 전, 그는 덕분에 실적을 남들보다 10배 이상으로 올렸다고 내게 많은 고마움을 표했다. 허리도 연신 숙였다.
현실 세계에선 로드 숍 VIP가 고작인 나였지만, 이곳에선 블랙 카드 막 긁는 셀럽 부럽지 않게 된 것이었다.
짜릿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