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604)

“살살해. 마을을 죄다 뒤집어 놓을 생각이야?”

내가 휘청거리자 엘더가 강하게 팔을 붙잡아 주었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나와 다르게, 엘더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날이 날이다 보니 이 마을에 드라이어드들이 굉장히 많아요. 데이지와 같은 종은 기운이 약해서 묻히기 쉬워요. 하지만 절 믿어요. 전 제이, 당신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지반이 한 번 더 크게 파도쳤다. 엘더는 혀를 차더니 스태프를 옆구리에 끼고 날 번쩍 안아 올렸다.

“뭐, 뭐야!”

“메스키트의 지진은 근원에서 가장 가깝기 때문에 강력해. 잘못하다간 네가 휘말릴 거야. 보통이라면 너의 근처에서 절대 사용하지 않겠지만 내가 있기에 강행한 거겠지. 내 뿌리는 깊어서 지진에 면역이 있으니까.”

많이 무거울 텐데도 엘더는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나는 그저 모든 것을 내려 두고 메스키트가 데이지를 찾을 수 있기를 빌었다.

한참을 땅속을 들쑤시던 메스키트가 마침내 내가 그토록 바라던 답을 해 주었다.

“찾았어요. 완벽한 위치를 찾은 것은 아니지만 있을 법한 근방을 찾았어요. 발걸음이 아주 많아요.”

지진이 잦아들자 엘더의 팔 힘도 약해져 폴짝 내렸다. 나는 메스키트에게 달려가 재촉했다.

“데이지뿐만 아니라… 다른 드라이어드들의 정보도 비정상적으로 많아요. 어쩌면… 제이가 찾고 있는 그 드라이어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아요.”

메스키트가 내 약도를 토대로 데이지의 기운이 느껴진 곳을 짚어 주었다.

그녀는 어느 한 곳이라고 특정 짓지 못했지만, 제시해 준 방향과 회관의 위치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높은 곳이 한 곳 있었다.

데이지가 위험에 처해 있다니. 대체 무슨 일이… 메스키트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의심이 가는 지점으로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달렸다. 다만 내가 체력이 젬병이라 자꾸 뒤쳐져 짐이 되었다. 흡연과 운동 부족으로 다져진 쓰레기 체력을 저주하며 이를 악물고 뛰었다. 메스키트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방패와 랜스를 들고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목적지가 이 근방이긴 해요. 하지만 너무 넓어요. 제가 한 번 더 뿌리를 내려볼까요?”

“건물이 너무 밀집되어 있어. 여기서 한 번 더 지진을 일으키면 위험해.”

메스키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랜스를 들었다. 하지만 엘더가 스태프를 이리저리 옮겨 보며 그런 메스키트를 저지했다.

너무 오랜만에 전력 질주를 했더니 토할 것 같았다. 담벼락에 손을 대고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담 너머로 소란이 느껴졌다. 아직 거친 호흡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라 엘더와 메스키트에게 손짓했다. 저 너머로 소란이 들려.

메스키트가 작은 도약만으로 훌쩍 담 위로 올라섰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표정을 찌푸렸다.

“내 주인, 제이. 레드 데이지를 찾는다고 했죠?”

메스키트의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엘더가 내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야… 안 된다. 내가 내 발로 넘어가게 해 줘. 제발.”

“어느 세월에? 여기 높아서 넌 못 넘을걸?”

안 그래도 죽을 것 같은데 엘더가 뛰어오르며 배를 압박하니 더 죽을 것 같았다. 질식사하는 줄 알았다. 엘더는 담 위로 올라 메스키트의 옆에 가뿐하게 섰다. 난 떨어질 것이 무서워, 엘더에게 팔을 놓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담 아래엔 세 명의 남자와 그들의 드라이어드들이 무언가를 중심으로 둥글게 포진해 있었다. 드라이어드들의 체구가 커서 중앙의 그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떨어져도 같이 떨어질 생각으로 엘더를 꼭 붙잡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안에 있는 게 뭔데? 설마 데이지야?

“세상에. 어째서 어린 묘목이 이곳에 있는 걸까요? 세계수는 절대 어린 묘목을 그 품 밖으로 보내지 않아요.”

“뭐야? 너 야생 드라이어드랑 인연이 있어? 그렇기엔 이곳 환경은 드라이어드가 자연 발생하기에 적합하지 않는데?”

“내가 찾는 드라이어드는… 강제로 야생 상태가 된 드라이어드야.”

내 말뜻을 이해한 메스키트의 표정이 무척이나 매서워졌다. 내게 화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기세에 조금 두려움을 느꼈다.

“영혼을 끊을 때 쌍방의 동의가 아니라 드루이드 쪽에서 강제로 끊어 내 버린 것이군요.”

메스키트가 여관 주인과 같은 말을 했다.

“본래는 영혼의 연결을 끊을 때, 드라이어드가 세계수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소한의 생활이라도 가능하도록 주인의 영혼 파편을 조금 떼어 갈 수 있게 해 줘야 해요. 그 영혼 파편이 식물들에게 일종의 배젖 역할을 하는 거죠. 하지만 저 드라이어드는 그런 과정이 없었으니 힘을 잃고 오염되어 묘목 상태가 되어 버린 거예요. 크기로 보면 영혼이 끊긴 지 아주 오래되었어요. 저 상태서 더 작아지면 결국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 그건 드라이어드의 정신적 죽음을 뜻해요.”

엘더가 움찔 몸을 떨었다. 우리 둘은 이전에 과수원에서 그와 관련된 소재로 대화를 한 적 있었지.

“설마 저기 데이지가 있어?”

메스키트는 마치 데이지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의 중앙을 보며. 마음이 급해졌다.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을까? 다리 안 부러지겠지? 고민하고 있는데 엘더가 날 붙잡고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다리 대신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뒤이어 메스키트도 뛰어내렸다. 그녀의 큰 체구와 육중한 갑옷 무게 때문에 쿵! 하고 큰 소리가 났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이곳을 바라보았다.

“앗! 너는!”

익숙한 얼굴이 날 보며 소리쳤다.

“저 새끼 저거 과수원에서 미신으로 입 털던 새끼 아냐?”

“내가 죽여 줄까?”

내 노골적인 적의에 엘더가 스태프로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니 넌 무슨 힐러가 자꾸 죽이네 마네야? 메스키트가 그런 소릴 하면 이해하겠다.

“저리 꺼져 봐. 확인해 볼 게 있으니까.”

무례한 남자를 향해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털고 데이지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웬 드라이어드 하나가 거대한 부채 같은 잎사귀로 내 앞을 막아섰다.

후웅…!

갑자기 귀 옆으로 엄청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등 뒤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랜스가 날 막은 잎사귀에 꽂혔다. 그리고 잎사귀는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터져 버렸다. 등 뒤가 서늘해져 침을 꿀꺽 삼켰다.

“내 주인, 제이의 앞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습니다. 비켜서세요.”

여기 모여 있는 그 어떠한 드라이어드들도 메스키트의 기세와 위압감을 따라올 수 없었다. 각자 자신들의 주인을 보호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모두가 비켜서고 난 후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빈사 상태로 쓰러져 있는 데이지였다.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앞으로 구르듯 뛰어가 데이지를 끌어안았다.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었다. 새빨간 머리카락과 입고 있는 옷 모두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엘… 엘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엘더는 내 의도를 바로 알아듣고 내 곁으로 와 몸을 낮추었다. 엘더가 빛이 나는 손으로 데이지의 이마를 짚었다.

“우린 서로 영혼이 연결된 드라이어드들이 아니기 때문에, 내 회복의 기운을 이 드라이어드가 모두 받아들일 순 없어. 더구나 이 데이지 종은 나와 인연도 없어서 더욱 힘들어. 회복되는 것보다 몸과 정신이 붕괴되는 속도가 너무 빨라.”

그 말은 즉, 아무리 엘더라도 데이지를 완전히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뜻이었다. 데이지,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니…?

“데이지… 데이지! 정신 좀 차려 보렴. 제발.”

“쳇, 좋은 거름을 뺏겼잖아.”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 말을 뱉은 무례한 남자는 제 드라이어드의 보호를 받아 뒤에 숨어서 이쪽을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혼자 다니길래 거름으로 슬쩍하려 했더니. 거 보아하니 당신 드라이어드도 아니던데! 다이아도 많으신 양반이 적당히 욕심 부리고 갈 길 가지 그래? 이렇게 된 거 꼬마를 넘기면 기꺼이 피를 보지 않고 보내 주지.”

저 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이가 아득 갈렸다. 진심으로 죽여 버리고 싶다는 살의가 피어올랐다.

“설마 데이지를 이렇게 만든 게 네놈 새끼냐?”

“네 분노의 원인이 저 구역질 나는 자식이야? 저 자식이 마음에 안 들어? 죽여 줄까?”

엘더가 쥔 스태프의 끝이 내가 바라보는 곳으로 향하였다. 철컥, 하고 내 옆에 선 메스키트의 금속 갑옷 소리가 들렸다. 메스키트의 랜스가 땅을 드드득 긁었다.

“내 주인, 제이. 본디 우리 드라이어드들은 세계수에서 다 함께 태어난 형제들과 같아서 동족끼리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공격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존재 자체로 작은 세계수가 되는 드루이드들에게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제게 당신의 온몸이 떨리도록 아주 처절한 분노가 느껴져요. 당신이 원한다면 저 역시 기꺼이 당신의 분노가 되어, 불문율을 깨고 제 랜스 끝을 저들을 향해 세우겠습니다.”

땅에 끌리던 랜스가 내가 노려보는 남자를 향해 겨누어졌다. 나의 두 드라이어드는 마치 내가 명령만 내리면 언제든지 튀어 나갈 것처럼 보였다.

모두에게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와중에도 미약하게 데이지의 숨소리가 느껴져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작고 여린 아이를… 저런 쳐죽일 놈이….

“거 형님을 모욕했다던 여자가 저 여잡니까? 가진 드라이어드가 붉은 머리 하나뿐이라서 수월할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말이 틀리지 않습니까?”

“옆에 선 드라이어드들을 보십쇼! 하나같이 높은 등급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시끄러워! 어차피 한 놈은 회복형이고 다른 하나는 방어형이다. 네놈은 오늘 레어 등급도 뽑았지 않느냐! 우리 드라이어드가 다 덤비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의 말이 틀린 것은 드라이어드들의 분위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엘더는 코웃음을 쳤고 상대의 드라이어드들은 불안한 눈빛이 되었다.

나에 대한 복수를 위해 데이지가 이렇게 된 거라고? 데이지를 내 드라이어드로 착각하여 이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만들었단 말이야? 나 때문에?

“…드루이드님?”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작고 여린 목소리에 의해 깨졌다. 죽은 것처럼 감겨 있던 데이지의 눈이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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