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
먹구름 속에서 겨우 모습을 내민 해처럼, 촉촉하게 젖은 밤색 눈망울이 보였다. 데이지는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상체를 일으켰다.
부축하기 위해 붙든 어깨가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만큼 가녀리게 느껴졌다. 데이지는 힘없이 눈만 굴려 내 옆에 있는 엘더와 메스키트의 모습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좋은 드라이어드들을 얻으셨네요…. 정말 축하드려요.”
…누군가에게 버려졌던 아픔을 가진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어?
데이지의 그 말에 꾹 참고 있던 감정의 댐이 박살 나 버린 것 같았다. 허락도 없이 들춰보게 된 데이지의 아픈 과거가 연민의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더 좋은 드루이드를 먼저 만났으면, 데이지가 낮은 등급이 아니었다면,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나를 따라 과수원에 가지 않았으면, 어쩌면 달리 쓰일 수도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의 시작에 대한 안타까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아직이야…. 난 아직 하나를 얻지 못했어. 너에게 축하를 받을 수 없어.”
당황한 표정으로 내 볼의 눈물을 닦던 데이지의 양손을 조심히 붙잡았다.
“난 아직 내 행운을 얻지 못했어. 내가 말했잖아, 내게 행운은 넌데. 네가 없어서 온전치 않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드루이드님….”
“내 드라이어드가 되어 줘, 데이지.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네가 나에게 행운이 되어 준 만큼 난 네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내 모든 것을 할 거야.”
내 눈을 떠난 사이 엉망이 되어 버린 꽃을, 다시는 놓치기 싫어서 꼭 끌어안았다.
바짝 끌어안은 아이의 품에선 아프게도 흙먼지 냄새가 났다.
엘더는 멀찍이 떨어져 있어도 달콤한 향기가 풍겼고 메스키트는 가까이 다가가면 아찔하고도 강한 스모크 향이 났다.
생기 있는 두 드라이어드는 이렇게 자신만의 향기를 내뿜었는데, 같은 드라이어드인 데이지는 아무런 향기가 나지 않았다.
그것이 꼭 드라이어드로서 죽어 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냥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 승산이 없어 보여.”
끔찍한 짓을 한 남자의 무리에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지만 안정을 찾으면, 반드시 데이지에게 했던 짓의 몇 배로 갚아 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꿈… 꿈….”
품 안에서 데이지가 바르작거렸다. 결코 꿈이 아니라고 말해 주려는 순간이었다.
난 힘 있게 끌어안았다고 생각했는데, 데이지는 단번에 내 팔을 풀어냈다. 그러곤 양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한쪽 신발이 사라진 상처투성이 발로 도약을 하며 내 어깨를 짓눌렀다.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존재하나 싶었다. 내 상체가 푹 숙여지고 반대로 데이지의 몸은 반대로 붕 떠서 날았다.
촤악…! 하고 물풍선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비라도 온 것처럼 내 주변 땅에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 이…! 이제 너희도 못 벗어나! 아악!”
비명과,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지반이 흔들리며 알이 큰 자갈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 어깨를 짓눌렀던 힘은 금방 풀렸다. 등 뒤로 풀썩, 하고 내 시야에서 사라진 데이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날 보호하기 위해 나에게 쏘아진 공격을 대신 맞은 것이 분명했다.
숙였던 허리를 펴고 마주하게 된 광경은, 이 상황에서 자욱하게 풍기는 엘더의 달콤한 향기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그 향기 속에 미미하게 섞여 파고드는 피 냄새가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눈앞의 드라이어드들과 사람이 한데 묶여, 땅에서 솟구쳐 오른 수많은 나뭇가지들에 꼬챙이 꿰듯 꽂혀 있었다. 그 끝에 엘더의 새하얀 눈송이 같은 꽃들이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기름칠이 안 된 녹슨 기계처럼 머뭇머뭇 몸을 돌렸다. 등과 다리에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데이지가 다시금 쓰러져 있었다. 메스키트의 방패에도, 엘더가 친 반투명한 방어막에도 똑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메스키트의 거대한 랜스가 꽃가지에 싸여 있는 남자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가슴이 꿰뚫린 남자는 손에 쥔 진홍색 열매를 떨어뜨리곤 가래가 들끓는 비명을 질렀다.
떨어진 열매에서 진득한 액체가 흘러나오며 땅을 적셨다.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 드라이어드들에게서 피어오르는 그것이었다.
“제이! 괜찮아요? 저들의 드라이어드 중에 산성액을 만들 줄 아는 종이 있었어요!”
메스키트는 여전히 방패를 세운 채 뒷걸음질 치며 내게 물었다.
“난… 난 괜찮아. 하지만….”
엘더의 손에서 쏘아진 빛이 나와 메스키트, 데이지의 순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데이지에게 닿은 빛은 튕겨져 나갔다.
“끝이군….”
엘더가 손을 거두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 피부가 녹아 붉은 속살이 드러난 모습이 내가 다 아플 정도였다. 데이지에게 차마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데이지가… 데이지가….”
엘더에게 어서 회복 스킬을 쓰라고 울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회복을 받아들일 영혼의 그릇조차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내 성화에 못 이겨 다시금 빛을 쏘았지만 확인 사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빛은 다시 튕겨져 나왔다.
“그럴 리 없어… 이렇게 아프기만 하다 갈 순 없어….”
“…아픈 건 괜찮아요, 드루이드님.”
내가 내민 손끝에 덜덜 떨리는 데이지의 손끝이 와 닿았다. 아이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아서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픈 건 이젠 무뎌져서…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게 되었어요.”
축 늘어진 고개로 데이지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이의 새하얀 얼굴을 잔뜩 더럽힌 먼지와 피만 아니었다면, 난 우리가 만난 그날의 여관 침대 위에 나란히 함께 누워 있는 착각을 할 뻔했다.
그만큼 데이지의 미소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이 아려올 정도로 눈부시게 환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점점 곧 꺼질 것 같은 성냥불처럼 위태하게 일렁거렸다.
“하지만 드루이드님이 다치셨다면… 전 아팠을 거예요. 몸은 이제 아프지 않은데…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을 거예요. 드루이드님이 무사해서 기뻐요.”
온몸이 얼음 속에 갇힌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숨도 쉬기 힘들었다. 오직 실시간으로 희미해져 가는 데이지의 미소를 담는 흔들리는 두 눈과 고장 난 것처럼 흐르는 눈물만이 내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전 행복해요. 잠깐이나마 저를 원하는 소중한 주인님이 생겼으니까요…. 꿈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드루이드님을 제가 지켰다고 생각한 순간… 전 무척 행복한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데이지는 이제 손을 들 힘조차 없는지, 가녀린 팔이 낙엽처럽 툭 떨어졌다. 그 뒤를 쫓기 위해 곧바로 손을 내렸지만 놓쳐 버리고 말았다.
“안 돼…. 눈을 감지 마. 감으면 안 돼, 데이지.”
“드루이드님이… 제게… 행운이라고 하셨죠? 저도 그래요. 드루이드님도 제게 행운이에요…. 그리고 제 희망이에요.”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데이지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감긴 눈꺼풀이 데이지의 예쁜 눈을 영원히 숨겨 버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곳이 게임 속 세계라 하더라도 함께 교류했던 누군가의 죽음을 실제로 목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데이지는 내게 친절하게 대해 주고 무척이나 많은 도움을 준 아이였다. 데이지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을 피해 숨은 그 어두운 골목에서 언제까지고 주저앉아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낯선 세계에서 내게 환한 길잡이 등불이 되어 준 아이.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같이 있을걸. 함께 과수원이 아닌 산책을 갈걸. 게임 속에 들어왔다고 마냥 기뻐서, 그게 뭐라고.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라 두 팔로 끌어안고 몸을 숙였다. 숨을 쉴 때마다 공기가 칼날이 되어 폐를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내 목 깊은 곳에서부터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땅의 흙모래가 내 이마에 짓이겨질 때까지 몸을 깊숙이 숙였다. 엘더의 향이 위로하듯 어깨에 와 닿았다. 이젠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때였다.
“제이! 제이! 고개를 들어요! 앞을 봐요!”
메스키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몸이 움직이지 않자 엘더가 긴 팔을 끼워 넣어 강제로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 붙은 흙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사이로 따뜻한 하얀 빛이 파고들었다.
데이지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아이의 몸이 빛에 싸여 점점 더 작아졌다. 계속 작아지더니 아주 작은 공이 되었다.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메스키트가 랜스와 방패를 땅에 떨어트렸다. 무릎을 꿇고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공에 닿지 않게 조심히 날 향해 떠밀었다.
“내 주인, 제이. 이건 드라이어드 아이의 작은 희망이에요.”
빛의 공이 메스키트의 인도를 따라 둥실 내게로 날아왔다. 두 손으로 조심히 그 공을 받았다. 마치 내 손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된 거군.”
엘더가 혼잣말을 하며 힘이 풀리려는 내 손을 함께 붙잡아주었다.
“세계수에서 태어난 순수 드라이어드들은 생명이 다하면 모두 세계수의 품으로 되돌아가.”
공은 빛이 사그라들수록 점점 더 따뜻해졌다.
“하지만 모체가 세계수뿐만 아니라 다른 종과 결합되어 개량종이 된 경우, 드물게 자신도 모르는 특별한 힘이 영혼에 새겨지게 돼. 그게 이 아이가 세계수로 돌아가지 않고 남을 수 있는 이유야.”
환한 빛이 사라진 곳엔 반짝이는 금빛 열매가 자리하고 있었다. 난 이 열매를 과수원에서 본 적이 있었다. 드라이어드들이 태어나는 열매. 엘더도 메스키트도 개화하기 전에 담겨 있던 열매….
투둑, 하고 윗부분의 껍질이 깨지며 동그란 두 개의 황금 새싹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이 개량종 드라이어드의 영혼에 새겨진 특수 힘은 부활. 다시 태어날 준비를 마친 씨앗이 여기 있어.”
“내 주인, 제이. 당신을 다시 찾아온 작은 희망이에요.”
새싹에 어린 작은 빛이 내게 안녕, 하고 인사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다른 드라이어드들을 개화시킬 때 어떻게 했더라.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걸까? 과수원에 다시 가야 하나?
“제이, 침착해요. 숨을 쉬어요. 작은 묘목 아이가 제이를 다시 만났을 때, 숨을 못 쉬어서 쓰러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건 아니죠?”
메스키트의 호박색 눈이 따뜻하게 날 바라보았다. 빛을 품은 엘더의 손이 가볍게 내 코와 입을 막았다가 떠났다. 참았던 숨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내 주인, 제이. 어서 드라이어드 포트가 있는 곳으로 가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곳으로요. 그곳에서 다시 인사해야죠. 빨갛고 작은 꽃송이와.”
메스키트가 아주 가볍게 날 일으켰다. 그러곤 허리를 한껏 숙여 내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