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트워크 신호를 잡고, 우리들은 최단 거리로 일직선을 뚫기 위해 그대로 달려 나갔다.
여러 전투로 포메이션을 잘 잡은 우리는 거침없이 밀고 들어갈 수 있었다.
양옆으로 밀고 들어오는 불들을 메스키트가 어그로를 끌어 집중시키고 데이지가 벌처럼 날아다니며 숨통을 끊어 놓았다.
확실히 앞서 전투를 겪지 않았다면 이런 대규모 전투는 힘들었을 거야.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서 전멸하기 딱 좋은 난이도잖아?
불의 크기도 클뿐더러 쉴 틈 없이 많은 숫자가 밀려 들어왔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퀘스트를 준 26번째 행정 관리인은 사기꾼이야! 이게 무슨 초보자 퀘스트야?
나와 내 드라이어드들 정도 되니까 이게 가능하지. 어중이떠중이들은 여기 근처에 접근도 못 해 보고 리타이어였네!
메스키트가 데이지가 쓸어버린 왼쪽에 거대한 모래 벽을 세웠다. 오른쪽을 마저 데이지가 처리하자 그쪽에도 모래 벽이 우뚝 솟았다.
불들이 양식장에 갇힌 물고기들처럼 메스키트의 앞에 주르르 몰려 섰다.
메스키트는 순식간에 방어를 버리고 공격으로 돌아서며 정면의 불을 향해 랜스를 힘 있게 내질렀다.
정면의 모든 불들이 방망이로 후려친 촛불들처럼 일제히 꺼졌다. 모세의 바다처럼 앞이 휑하니 비어 버렸다.
절로 박수가 나올 것 같아서 두 손을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더가 지금이라며 나를 불쑥 들고 앞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잠시만여. 미리 말 좀 해 주고. 배가 쪼여서 숨쉬기 힘든데여.
거친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자전거 위에 짐짝처럼 실린 것 같다. 위아래로 정신없이 흔들리는 시야를 겨우 다잡으며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인접 테라리움 아티팩트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메시지가 보였다.
어디 계세여? 구조 요청 신호 받고 왔어요. 머리 위로 SOS를 그려 주… 저기, 저기!
엘더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며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거대한 나무에 푹 파묻힌 사람이 있었다.
다른 곳은 불에 다 타 버려서 새까만데 그 주변만 비정상적으로 멀쩡하고 깨끗했다.
앞은 겨우 뚫었지만, 우리 뒤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해안가의 발자국을 지우는 것처럼 불이 다시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려 해도 불의 어그로를 잔뜩 끌고 가면 민폐일 것 같았다.
필살기는 아직이니? 하고 엘더를 바라보았는데 대뜸 날 내려 주었다. 예고도 없이 등 뒤로 큰 품에 폭삭 껴안겼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엘더가 내민 스태프를 함께 쥐었다. 팔랑이는 엘더의 옷자락이 내 어깨로 내려앉고 내 손 위로 커다란 엘더의 손이 덮였다.
함께 쥔 스태프가 흰빛으로 휩싸였다.
“아직 때가 이르긴 하지만.”
마차 보스와의 전투에서와 달리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온전히 내가 작은 세계수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때가 이르다는 건 이걸 뜻했구나. 달콤한 향기가 풍겨 오며 스태프에서 뿜어져 나온 안개가 이 일대를 감싸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완전히 방어를 버리고 랜스를 꽂는 메스키트와 회피를 버리고 뛰어다니는 데이지 덕에 우린 적당히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안개의 범위 내로 불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안개에 닿는 부위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크기가 줄어드니 불은 재빨리 후퇴했다. 안개 내의 불은 내 드라이어드들이 모두 치워 냈다.
내 난쟁이들이 잠잠한 걸 보니… 다이아의 출처가 내가 아니군. 징징대기 전에 다시 다이아를 채워 줘야겠다. 내가 스태프에서 손을 떼도 안개는 계속 유지되었다.
엘더의 팔 밑으로 쑥 빠져나왔다. 사람이 파묻힌 나무를 향해 조심히 다가가 보았다.
땅에서 솟아오른 수십 개의 나무줄기가 감옥처럼 노인 한 명을 가두고 있었다. 안의 노인은 둥근 방패를 꼭 쥔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죽은 거 아니지…?
나무는 비쩍 말라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주위에 흩날리는 잿가루와 함께, 나무의 다 말라빠진 이파리들도 처량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저 나무가 아직 죽지 않고 버티고 있다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가슴속 깊은 곳을 울리는 미미한 생명의 기운.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누군가를 만난 것처럼,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내게 반가움을 담은 손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 신발에 닿은 땅이 환상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내가 그 나무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핸드폰이 울렸다.
인접 테라리움 아티팩트: 스케어크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