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604)

가는 길 중간중간 바곳이 지내며 터를 잡았던 곳들이 보였다. 푹 꺼진 나무줄기 더미, 둥글게 파헤쳐진 땅,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죽은 나뭇잎들이 잔뜩 쌓인 곳.

보고 있자니 너무 안쓰러워서 자꾸만 바곳의 머리에 손이 갔다. 잊자, 안 좋았던 기억들은 다 잊자.

작은 다리로 졸졸 따라오는 바곳의 시선이 오롯이 날 향했다. 작은 강아지처럼. 그래, 이런 음습한 곳 눈에 담으면 뭐가 좋겠니.

반대편 출구에도 덩굴이 커튼처럼 내려앉아 있어서 메스키트가 랜스로 훅 걷어 냈다.

끝이 보일 때까지 한참을 가야 했는데, 이 넓은 지역을 자신도 모르게 통제하고 있던 바곳에게 다시 한번 놀라움을 느꼈다. 무턱대고 울어 젖히지만 않으면 진짜 대단한 공격형 드라이어드가 될 텐데 말이야.

밖으로 나와 메스키트가 기감(氣感)을 끌어 올려 근처의 불을 탐색하는 동안, 엘더는 주변을 향해 스태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28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 가지가 힘을 되찾아서 훨씬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긴 29번째 테라리움의 영향권이라 어느 정도 드루이드의 손길이 닿은 것 같은데.”

불이 어느 정도 처치가 되며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파릇한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럼 조금 곤란한데. 저 늪지대를 좀 태워 먹으려면 불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단 말이지. 안 되겠군. 이왕 이렇게 된 거 예전 경험 좀 되살려 볼까?

“데이지, 힘 안 주고 때려야 한다.”

멀리 메스키트가 겨우 찾아낸 불을 가리키며 데이지에게 말했다. 네가 힘줘서 때리면 팍 꺼져 버리니까 살살 쳐야 해. 딱 반으로 갈라져 나갈 만큼만.

매번 힘줘서 때리기만 해 왔던 아이는 내 요청에 어렵다는 표정을 했다. 우리 애가 이제 힘 조절을 해야 할 만큼 컸다니….

모 게임에도 이런 퀘스트가 있다. 몬스터의 생명력을 일정 수준으로 깎은 후 포획해 오세요. 생명력이 가득 찬 상태에선 포획이 발동 안 되고, 너무 조금 깎아도 포획할 확률이 낮습니다. 그런 퀘스트를 꼭 내가 필드 몬스터를 원 킬 낼 정도로 강할 때 준다.

한 대만 쳐도 죽는데요! 퀘스트 완료를 위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장비도 벗고 스킬이 아닌 맨손으로 찔끔찔끔 때렸었지. 그래도 죽긴 죽더라…. 너무 강해지면 살살 때리는 것이 제일 힘들어.

데이지의 작은 손을 잡아 올리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냈다. 줬다 뺏는 거는 아니란다. 안 그래도 강한데 너도 장비는 벗어야지.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작은 아이의 의지를 다지는 말이… 왜 하필 안 죽게 때릴 수 있을까 묻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나오는지. 보통의 너라면 ‘제가 저 불을 잡을 수 있을까요?’가 맞는데.

나는 거기에 “널 믿어.”와 같은 웃긴 대답을 해야만 했다.

데이지가 원 킬을 내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불에 열심히 다이아를 던져서 강화를 시켰다. 아이는 정말 섬세하게 움직여서, 불을 죽이지 않고 정확하게 반 토막을 냈다.

잔뜩 강해져 버린 아이가 제 힘을 숨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어쩐지 딱했지만, 그래도 내 요청을 완수하려 애를 쓰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초반에 우리가 초보자 사냥터에서 했던 것처럼, 불을 쪼개고 각자의 불에 다이아를 던져 넣어 크기를 키우고, 또다시 쪼개고…. 그렇게 수를 잔뜩 불려 놓았다.

덕분에 볼일이 다 끝난 후 처치가 귀찮게 되었다. 불 한정으로 광역 딜을 넣으려면… 아직 바곳을 쓰기에는 시기상조 같고, 역시 그때의 엘더의 힘이 필요했다.

엘더, 우리 그래프트 한 번 쓸 수 있니? 다이아가 마구 낭비되고 있는데도 아까부터 딴짓을 하고 있는 엘더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늪지대에 던져진 다이아를 향해 불들이 꾸역꾸역 주변을 태우며 움직이고 있었다. 다이아를 벽난로 속에 던지는 장작처럼 써먹고 있어서, 이쯤 되면 엘더가 꿍얼대는 소리가 들려와야 하는데?

“어디에 한눈을 파는 거야?”

“네가 무턱대고 불을 끌어모으고 있으니 주변의 식물들이 타지 않게 보호해야지.”

그러고 보니 흰빛을 내는 엘더의 스태프가 조금 떨어진 땅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엔 늪지대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여 있는 아주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

용케 근처에 식물이 살고 있었다고? 뭔가 해서 보는데 내가 아는 식물이었다. 물 위에 점점이 동동 떠다니는 작고 귀여운 둥근 잎들.

“개구리밥이다!”

나 이거 알아. 많이 봤어. 연못에도 떠 있고 논에도 떠 있고 어항 꾸밀 때도 쓰고.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물이니까. 물이 고여 있는 곳에선 보편적인 풍경화처럼 그 한 조각에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을 만큼.

이렇게 작은 웅덩이에도 있을 줄은 몰랐지만. 미약한 지식이나마 뽐낼 수 있는 상황이 되어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니 메스키트가 웃으며 칭찬했다.

“맞아요. 부평초군요. 이렇게 구석진 곳에 숨어 여태 불의 시선을 피해 왔나 보네요.”

데이지가 내가 떠넘긴 다이아 뭉텅이를 힘 있게 멀리멀리 던져서 불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우린 옹기종기 작은 웅덩이로 모여들었다.

개구리밥은 정말 작아서 거대한 메스키트가 움직이자 그 진동에 하릴없이 물 위에서 흔들렸다. 물을 뒤집어쓴 개구리밥은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처럼 올망졸망 빛났다.

“얘들이 모두 지내기엔 웅덩이가 많이 좁아 보이는데.”

“맞아. 부평초는 번식력이 뛰어나. 보통이라면 이 작은 웅덩이는 금방 미어터졌을 거야.”

“번식력도 뛰어나고 정화력도 뛰어나죠. 이 정도 거리라면 늪에서 물은 공급받지만 악영향은 많이 받지 않을 테고. 자체적으로 정화력이 뛰어난 편이니 조금의 오염은 정화해 가며 지냈겠군요. 하지만 정화에 힘을 계속 써야 하는 것과 좋지 않은 환경 탓에 억제가 된 걸로 보여요.”

오오, 작고 좋은 애들이다. 어디에 좋냐면 새로 태어날 늪지대에 딱 좋은 애들이지! 물도 정화하고 죽은 땅에 생명을 깃들게 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는 거야!

바곳이 내 바로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신기한 눈으로 둥둥 떠다니는 개구리밥을 구경하는 것이 보였다. 밖으로 나와서 보는 모든 것들이 새롭고 신기하게 보이나 보다. 하다못해 흔한 개구리밥조차.

타닥타닥 낙엽이 불에 타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리고 매캐한 연기가 하늘 높이 자욱하게 깔렸다. 본격적으로 불들이 늪지대를 암막처럼 덮고 있는 나무들을 태우는 것 같았다.

데이지는 이제 그만 던지면 안 되냐는 눈을 하고 날 바라보았다. 일단 시키니 하긴 했지만 많은 다이아를 땅에 버리는 것은 아이에게 큰 부담을 느끼게 했나 보다.

그즈음 데이지가 한 아름 안고 있는 다이아 뭉텅이를 발견한 엘더가 뒷북을 치며 노발대발했다. 그 아까운 걸 대체 어디에 뿌리고 있냐며.

“피해가 커지기 전에 꺼야 될 것 같은데. 불이 늪을 벗어나면 안 되잖아.”

성을 내는 엘더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그래프트 쓸 수 있니? 응? 저기 던진 것보다 다이아 더 많이 줄게.

“저 드라이어드랑 싸울 때 필요한 만큼 교감은 끌어 올려졌어. 그런데 대체 얼마나 또 다이아를 낭비하려는 거야?”

“낭비라니! 꼭 필요한 곳에 쓰니까 이건 낭비가 아냐!”

내게 낭비란 네 웃는 예쁜 얼굴을 한 번 보려고 다이아 쏟아부을 때 하는 것이 낭비다. 아니 이건 내 미적 감각에도 필요한 일이니까 낭비는 아니지 않을까? 아무튼 아니다.

엘더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며 스태프를 내 쪽으로 뻗었다. 그때 우리의 끈끈했던 유대와 완전 다른 느낌이긴 한데.

어쨌든 좋아, 비 좀 뿌려 볼까? 죽은 물을 깨끗한 물로 덮어야지. 마차 불과의 교전 때 시들링의 드라이어드가 주변을 성역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소리를 했지.

불을 끄는 것은 겸사겸사 하는 일이고. 땅을 재생시키고 불의 접근도 당분간 막으려면 이 생명의 비만한 게 없지.

엘더의 말처럼 교감은 이미 끌어 올려진 상태가 맞는 것 같았다. 마차 불과의 교전 때처럼 정신을 집중하여 감을 잡기 위해 노력할 필요 없이, 엘더의 스태프를 잡자마자 그날의 느낌이 단숨에 떠올랐다.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심장이 마구 뛰고 엘더의 스태프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하얀 꽃가지가 신호탄처럼 피어오르고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때를 알렸다.

지금이다. 난쟁이들아 일할 시간이야. 범위가 전보다 넓으니 수도꼭지를 한껏 돌려야 할 거야.

그래프트를 사용할 때 징징 심장이 울리는 이 기분은 다시 맛봐도 여전히 경이로웠다.

불들이 타들어 가며 내뿜는 쥐색 연기를 몰려온 먹구름이 집어삼켰다. 몸에 마치 가지가 돋아나는 것처럼 간질거리는 느낌이 났다.

엘더의 스태프는 엘더의 키만큼 길쭉해서 휘두르려면 온몸을 움직여야 했다. 내 몸 외에도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나무 같은 기운도 함께 움직여, 모든 몸짓이 거창하게 느껴졌다.

투두둑.

땅을 때리는 방울방울의 빗소리가 시작을 알리는 노크 소리 같았다.

늪지대의 죽은 나무 철거 작업에 한창인 불 노동자분들은 이제 퇴장하실 시간입니다. 봇물 터지듯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빗물이 무서운 기세로 불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재가 눌어붙은 검은 흙이 뒤집히고 밝은 빛깔의 흙이 폭죽처럼 튀어 올랐다. 둥지를 튼 죽은 물이 뒤엎어지고 맑은 물이 자리를 채웠다.

후드득 떨어져 내린 나뭇가지들은 범람한 물에 떠밀려 아주 낮은 둑을 세웠고, 새어 들어온 맑은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음울한 공기를 밀어냈다.

한때 죽음의 숲 같았던 음침한 지역이, 썩은 껍질을 벗겨 탐스러운 하얀 과실을 드러낸 과일처럼 생명의 샘을 머금은 정결한 지역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바곳 아이가 눈을 빛내며 구경하던 작은 웅덩이도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비에 범람했다. 졸졸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는 늪지대를 향해 길게 항로를 내었다. 작은 나룻배들처럼 개구리밥들이 깨끗한 물이 채워진 늪으로 둥둥 흘러갔다.

내리는 비의 기세가 대단하여 작은 배들이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은데도, 흙더미에 부딪히고 둑에 부딪혀도 잠깐 수면 밑으로 폭 가라앉았다가 금세 떠올랐다. 개구리밥들은 흐르고 흘러 제각각의 자리를 찾아 멈춰 섰다.

무채색의 풍경화에 연두색 물감들이 붓을 튕겨 툭툭 뿌려진 것처럼, 작은 개구리밥들이 송송 자리했다.

이제 작은 웅덩이에 고여 움츠려서 지내던 예전을 잊고, 물에 번진 수채화처럼 늪지대를 연두색으로 가득 채우겠지.

하늘에서 퍼붓는 비를 놀란 눈으로 지켜보던 바곳 아이는, 흘러가던 개구리밥에 눈을 굴렸다가 이내 내가 쥐고 있는 엘더의 스태프를 바라보았다.

청보라색의 눈에 빙글 이채가 감돌았다. 무언가 깨달은 얼굴을 하고 나를 따라 자신의 가느다란 스태프를 뻗었다. 끝에 커다란 공 같은 것이 대롱 매달린 스태프는 맺힌 빗방울을 또르르 아래로 흘려보내며 청보랏빛을 냈다.

엘더 플라워의 달콤한 향기가 자욱하게 깔린 공기에 산약초와 같은 맑은 향이 가볍게 스며들었다. 곧이어 나와 주변에 선 드라이어드들을 상쾌한 기운이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미약하지만 엘더의 것과 비슷한 회복의 힘이었다.

엘더와의 그래프트에 자극받아 저도 모르게 회복의 힘을 일깨운 듯한데, 이거야 원, 그 힘이 미약하여 전투에선 쓰기 힘들 것으로 보였다.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작은 손이나마 거들게 해야 할 땐 또 모르지.

하지만 엘더의 회복의 힘이 너무 대단해서 그럴 일이 올까? 바곳은 턴 오버 형태로 회복의 힘은 있으나 힐링은 주특기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 귀여운 행동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집중력이 흐려졌다. 동시에 그래프트가 멈췄다.

내리던 비가 그치고 구름이 열리며,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볕은 막 완성한 수채화를 말리는 것처럼 곳곳에 따뜻한 기운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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