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됐네요.”
“그렇죠? 듣기론 어떤 드루이드가 26번째 테라리움 주변을 기꺼이 정리해 줘서 그렇다는 말도 있고, 세계수의 기운이 갑자기 강해져서 그렇다는 말도 있어요. 그 정리한 드루이드 이름이 뭐였더라? 26번째 테라리움 주민들이 엄청 친근하게 부르던데. 알파벳이었던 것 같은데. 에이? 케이?”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저거 내 이야기 같은데? 낯부끄러워 콧김이 나올 것 같았다. 엘더의 눈이 ‘너네.’ 하고 말하고 있었다.
“엄청 강한 드루이드겠죠? 저도 우리 엉겅퀴랑 따라 해 보려고 여기 주변을 돌아다녀 봤는데, 방금처럼 불 하나 잡는 것도 조금 버거웠어요. 며칠 전만 해도 몇 배나 큰 불들이 돌아다녔는데, 그걸 다 잡고 다닌 그 드루이드는 얼마나 강한 걸까요? 완전 롤 모델이에요!”
그만해 줘…. 얼굴이 터질 것 같아.
“그런데 당신도 엄청 세 보이네요! 드라이어드들도 다 등급이 엄청 높아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얻은 거예요? 설마 다 과수원에서 얻은 건가요? 와, 운도 좋다….”
내 운이 좋은 건지, 데이지 운이 좋은 건지….
“오! 그 드라이어드는 아는 종이예요! 데이지 맞죠? 자주 보이는 드라이어드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엄청 강해 보이네요. 제가 알기론 우리 엉겅퀴랑 같은 노멀 등급인데.”
“그렇죠? 우리 애가 강해요. 참 강해요. 완전 강함. 현존하는 데이지 드라이어드 중 제일 강할 걸요?”
좀 더 자세히 봐 달라며 데이지를 끌어다 무기도 보여 주고 업그레이드된 장비들도 자랑해 보였다. 날 때부터 강한 메스키트나 엘더와 다르게 밑바닥부터 여기까지 성장한 데이지는, 어쩌면 레벨 1부터 성장한 나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데이지에 대한 칭찬은 그에 투영된 내 모습을 칭찬하는 것 같아서 두 배로 기뻤다.
그녀가 생소하게 느끼는 종의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소개해 주고 가볍게 담소를 끝낸 후 헤어졌다.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내게 딱히 도움을 바라지도 않았기에 (속된 말로 버스를 태워 준다거나) 간단히 전투 팁만 몇 개 전해 주었을 뿐이었다.
좋은 자세야. 선의로 다이아를 좀 줄까 싶다가도 어쩐지 좋지 않은 감이 들었기에 대신 주머니를 털어 비상식량과 포션을 쥐여 주었다. 비상식량은 맛이 엄청 없다는 것을 사전에 강조했어도 너무 좋아하며 받길래 양심이 아팠다.
자신의 드라이어드에 대해서나 전투, 모험 등 모든 면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보여서 초고속으로 성장할 것 같은 잠재력이 느껴졌다. 쑥쑥 성장해서 왠지 다음에 다시 만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물어봤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난 26번째 테라리움에 거의 도착한 후였다. 뭐 그쪽에서 알려 주면 나도 알려 줬어야 했으니. 그럼 내 얼굴은 부끄러워서 터졌을지도 몰라.
자, 퀘스트 완료하러 행정 관리원을 찾아가 보자!
확실히 균형이 깨져 오랜 가뭄을 겪었던 26번째 테라리움은, 회복 후 전보다 더 활기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웃는 얼굴들이 많이 보이고 각박했던 인심들도 좀 누그러든 것 같고. 테라리움들이 돌아가는 생리를 어렴풋이 알게 된 후라서 더 자세히 보이는 것 같았다.
26번째 테라리움의 5급 가드너가 되었었지. 그래서인지 이곳 주민들은 용케 나를 알아보고 친근하게 대했다. 막상 퀘스트를 완료하러 가려는데 행정 관리인이 어디 있는지 몰라 헤매는 내게 먼저 다가와 무척이나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었다.
“지금 시간이면 과수원에서 행정을 보고 계시지 않을까요? 테라리움을 도와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상황이 많이 좋아졌답니다.”
물이 부족하지 않아 밀가룻값을 내려도 될 것 같아요. 문을 닫았던 가게들도 다시 열고 있죠. 다른 테라리움으로 떠나려 했던 드루이드들이 더 머물게 되었답니다.
이젠 가게들이 서로 눈에 불을 켜고 경쟁하지 않아도 돼요. 외곽 지역의 경계가 해제되어 주민들이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었죠. 하지만 세금이 오른 건 조금 슬프군요.
이러다 10번대 테라리움들의 세금과 근접해질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드루이드들을 유치하기 쉬워졌으니 금방 벌 수 있을 거예요. 이게 다….
“제이, 당신 덕분이에요.”
“…….”
“내 주인, 제이. 괜찮아요? 얼굴이….”
“터질 것 같은데? 열이라도 나는 거야? 아픈 것 같진 않은데 치유의 힘이라도 흘려 줄까?”
“드루이드님 아프신 거예요?”
사방에서 제이, 제이 하니까 쪽팔려 죽을 것 같아. 심지어 쪼렙 때 가게 앞에 서 있지 말라고 성질내던 사람들도 180도 태도를 바꾸고 상냥하게 제이, 제이 하고 있어.
주민들이 극진히 대하니까 드루이드들도 뭔가 하고 저렇게 이쪽을 구경하잖아. 난 낯짝이 두껍지 않아서 이런 관심들은 못 버티겠어. 연예인 체질은 아니군. 5급 가드너가 된다는 건 이 정도의 의미였구나.
내 드라이어드들 중 사람이 많은 곳이 낯선 바곳만 나와 같이 웅크린 햄스터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메스키트가 큰 방패로 날 가려 다른 이들의 시선과 관심을 차단시켰고, 그제야 좀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과수원의 안내원은 VVIP인 내 얼굴을 잊지 않았다. 난 그에게 잊지 않고 설익은 열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26번째 테라리움의 경우, 다들 일반 열매에만 관심이 있고 좀처럼 설익은 열매를 찾지 않기 때문에 재고가 꽤 많은 듯했다.
난 그래서 내가 들고 갈 수 있을 정도면 개수에 상관없이 다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안내원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그를 따라 사라졌다. 몇 개를 들고 오게…?
안내원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벗어나 행정 관리원에게 향했다.
안녕하세요, 제이입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조용)
행정 관리원은 굉장히 바빠 보였다. 내 등장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핸드폰처럼 생긴 월렛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오, 자네. 기다리고 있었지. 난 자네도 다른 드루이드들처럼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잘못됐을까 봐 걱정했다네. 보내 놓은 드루이드들마다 죄다 감감무소식이니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자네는 영혼이 무척이나 미성숙한 드루이드였으니까.”
그야 그 퀘스트는 S급, 존나 어려운 퀘스트였으니까요. 가는 길 곳곳이 지옥이었을뿐더러 그 끝에선 거대한 불 벌레와 보스 레이드도 벌였어야 했는데, 누가 그걸 완수할 수 있었겠습니까.
스페셜 등급의 메스키트와 다이아로 비를 내리는 엘더, 의지의 전투 드라이어드 데이지가 없었으면 절대 못 깰 퀘스트였죠. 물론 무한 다이아를 소유한 저도 있었기에…. 이건 좀 콧대를 세워도 될 것 같은 느낌이야.
나는 감춰야 될 사항들은 최대한 감춘 후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일어났던 비극을 알렸고, 내가 임시 행정 관리원이 됨으로써 일을 마무리했음을 알렸다.
내가 26번째 테라리움 주변을 청소한 것은 금방 알아차리고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냈으면서도, 28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퀘스트는 내가 입으로 말하기 전까진 행정 관리원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어떻게 되어 먹은 시스템이야?
“임시 행정 관리원이라니. 굉장히 대단한 일을 해냈군.”
그리고 그가 날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같은 행정 관리원을 대하는 것처럼 좀 더 정중해진 느낌이었다.
난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퀘스트 두루마리를 꺼냈다. ‘세계수의 26번째 테라리움의 안위를 위하여, 귀하에게 28번째 테라리움의 진실을 조사할 것을 요청드립니다.’ 그 끝에 ‘임무 완료’ 도장이 덧대어 찍히며 비로소 기나긴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곧 도착할 걸세.”
동시에 핸드폰이 띠링, 하고 알람을 울렸다. 핸드폰 화면엔 익숙한 봉투가 도착해 있었다.
세계수의 26번째 테라리움의 은인에게.
드루이드 네임: 제이
26번째 테라리움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도움으로 테라리움이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주민들은 더 이상 불의 위협으로 불안에 떨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달성 조건: 28번째 테라리움에 관한 행정 관리원의 의뢰를 완수
★당신의 이름이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애틋’하게 불리게 됩니다.
세계수의 26번째 테라리움 내 당신의 지위: 4급 가드너
(4급 이상부터 해당 테라리움의 일정 지분을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9급 미만부터 해당 테라리움과 적대 관계가 되어 입장이 불가해집니다.)
귀하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혜택을 드립니다.
- 세계수 26번째 테라리움 내 상점 구매가 30% 할인
- 세계수 26번째 테라리움 내 모든 여관 무료 이용 가능
- 세계수 26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에서 다이아 무보증 대출 가능
- 세계수의 열매 무상 지급 상시 우선권
- 20번대 테라리움 방문 시 26번째 테라리움이 당신의 신분을 보장합니다.
세계수의 26번째 행정 관리원 및 과수원이 본 증명서를 인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