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604)

“뿌리를 내릴까요?”

“으응…. 아, 엘더, 이번엔 그 행운 버프 쓰지 마. 아껴 두자.”

“만약 쓰면 네가 안 좋은 상황을 빗겨 갈 수 있는 행운이 발동할 수도 있는데?”

“그건 솔깃한데?”

아니, 그래도 아껴 두자.

메스키트가 랜스 끝을 땅에 꽂고 힘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 곧은 뿌리는 세계수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이라면 모두 유전 정보를 토대로 찾아낼 수 있죠. 지금부터 이곳의 땅을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들쑤셔서 카나비스 드라이어드의 행적을 찾아낼게요.”

쿠르릉!

예전에 데이지를 찾으려 했을 때처럼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 데이지는 이젠 이 정도 지진은 일도 아니란 것처럼 버티는 것이 평온해 보였다. 반면 난 갓 태어난 아기 고라니처럼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엘더를 붙잡아야만 했다.

물론 바곳도 나처럼 겁먹은 햄스터 꼴을 하고 내게 매달렸다. 같은 풀꽃 모체 출신이라 하더라도 성장한 데이지는 메스키트의 지진을 버티는 반면에 바곳은 금방이라도 화분에서 쏟아질 것 같은 화초의 모습을 했다.

요란하게 수색을 끝낸 메스키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날 바라보며 이야기를 해 줄지 말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지?

“…어때?”

“그 드루이드의 말대로예요. 멀지 않은 곳에 카나비스 드라이어드가 있어요.”

“그… 그리고?”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많이 있답니다. 아마도 우리의 적이 되겠죠.”

드라이어드들이 많이 있다면 드루이드들도 많이 있겠지. 역시나 마약 조직 같은 것이 있나 보다. 미국 드라마처럼 특수 기동대 같은 것을 출동시킬 것이 아니라면 이제 난 선택을 해야만 했다.

***

“두렵다고 하지 않았어?”

우리는 현재 18번째 테라리움으로 가는 길이 아닌, 메스키트가 알려 준 위치로 착실히 걷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메스키트의 많은 염려와 엘더의 잦은 꾸중이 함께했지만 발이 향하는 것을 어쩌랴. 이게 다 내 맘이 편하자고 하는 것임을.

“살짝만 보고 올 거야. 진짜 멀리서 살짝만.”

신고할 때 적의 규모도 알려 주면 좋잖아? 적은 한 몇십 명 있는데 신고 받고 출동한 사람이 두세 명밖에 안 되면 어떡해? 영화처럼 주먹 한 번으로 건물을 날려 버리는 슈퍼히어로가 아닌 이상 수세로 밀릴 수도 있잖아?

그리고 사실 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일당백 스페셜급 메스키트. 메스키트의 감지 능력은 뛰어나서 적들보다 이쪽이 먼저 알아차릴 거라 자신했다. 그래서 진짜 멀리서 들키지 않게 살짝만 보고 올 생각이었다.

솔직히 이 세계는 총과 칼로 하는 싸움이 아니라 드라이어드들끼리 싸움하는 세계잖아? 그럼 총이 아니라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이쪽이 좀 더 유리하지 않을까? 여차하면 메스키트가 지진으로….

“근처에 기운이 느껴져요. 수는 적고 모여 있지 않네요.”

보초를 서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여기 나무가 적당히 우거지고 거대한 동굴 같은 거도 멀리 보이잖아. 적들의 본거지일 수도 있겠네. 테라리움들의 중간 지점에 외부인의 시선을 피하기 좋은 지역에.

완전 던전 같은 느낌인데? 몬스터가 아니라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들이 잔뜩 포진한 곳이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근처 바위에 몸을 숨기며 조금씩 다가갔다. 메스키트의 올곧은 시선이 향한 곳에 하품을 하며 주위를 대강 둘러보는 사람이 보였다. 주위엔 드라이어드로 보이는 인형들이 둘 있었다.

“자, 정말로 제이의 말대로 멀리서 봤어요. 이제 가는 게 어때요?”

“야, 전투력 측정기. 쟤네 등급 어때?”

엘더를 팔꿈치로 툭툭 치며 물었다. 툭하면 노멀 등급이라든가 지 아래 등급이라고 하대하는 녀석이니 왠지 보기만 해도 드라이어드들의 등급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엘더는 노멀 하나에 레어 하나라고 말하며 역시나 별거 아닌 녀석들이라고 덧붙였다.

“제이.”

메스키트가 좀 더 단호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자꾸 딴생각을 하려는 날 걱정하며 꾸짖는 투였다.

그래, 난 할 만큼 했어. 다음은 좀 더 많은 머릿수에 맡기자. 본거지도 찾았고 주위에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 많은 정보가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그럴 순 없어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크흡, 가슴께를 움켜쥐며 약한 마음이 들려는 날 보며 엘더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보초들 전력을 보니 어쩌면 상대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고 힘이 있는데 저렇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듣고도 무시하고 갈 수가 없었다.

“보초만… 보초만 치우고 카나비스 아이의 생사만 확인하고 가자….”

모든 상황에서 내 안전이 최우선이며, 설령 카나비스가 위험한 상황이라도 내가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자리를 뜨겠다는 다짐을 수차례 하고 나서야 내 드라이어드들이 행동해 주었다.

드라이어드들끼리의 첫 전투를 겪었던 날, 메스키트는 내게 본래 드라이어드들은 세계수에서 다 함께 태어난 형제들 같아서 동족끼리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공격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물며 존재 자체로 작은 세계수가 되는 드루이드들에게도.

하지만 결코 길지만은 않은 날들을 함께하는 동안 내 드라이어드들은 많이 바뀌었다.

작은 세계수는 물론 그들이 태어난 세계수들을 모두 제외하고 오직 나만 중요하게 여겼으며, 내게 작은 위험이라도 될 수 있다면 주저 없이 무기를 꺼낼 수 있게 되었다.

벨라돈나가 주인에게 과한 충성심을 보이는 드라이어드는 쉽게 불문율을 깰 수 있다고 했던가. 정말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저쪽 등급이 낮더라도 레벨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내가 저 보초병보다 레벨이 훨씬 낮아서 발리면 어떡하지?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드라이어드들은 소란은 일으키지 말라는 내 부탁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순식간에 보초들을 해치워 버렸다.

메스키트가 이목을 집중시키며 적들이 정신 차리기도 전에 데이지와 협공하며 정말 쏜살같이 해치워 버린 것이다. 게임이라고 해도 사람 죽는 걸 눈앞에서 보는 건 여전히 익숙지 않아서 엘더가 시체를 없앨 때까지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의외로 너무 쉽지 않나? 이쪽 드라이어드가 등급이 월등히 높긴 한데. 마약 조직이니까 마피아나 갱단 같은 거 아녔어? 엄청 격렬한 싸움이 오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원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보초 서는 애들이 전투력이 제일 약했고….

보초들이 있던 곳은 안쪽의 상황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는 자리였다.

“주인도 잃은 새끼가 도통 고분고분하지 않네.”

“그래도 그런 옳지 못한 곳에 제 힘을 사용할 순 없어요! 드루이드님과 약속했어요!”

“좋게 가자니까? 우리는 그저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일 뿐이라니까? 마음이 병들었다고. 안쓰럽지 않냐? 응? 이제 네가 환상적인 힘을 써서 치료해 줘야지!”

“제 힘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에요! 하물며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힘은 없어요! 그리고 치료 행위는 오직 제 드루이드님이 옆에 계실 때만…!”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소리가 들리는 곳엔 끔찍한 폭력 행위가 난무하고 있었다. 그 중심엔 데이지보다 키가 조금 클 뿐인 작은 드라이어드가 있었다.

몸이 성한 곳이 없는데도 반항 한 번 하지 않은 채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고개를 돌렸다. 어린 드라이어드들은 아티팩트로 돌려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떡하지….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사람은 많았다. 폭력을 쓰고 있는 사람도, 지켜보며 낄낄대는 사람도, 그리고 그 주위를 지키며 서 있는 드라이어드들도 많았다.

지금은 죽은 눈을 하고 있는 드라이어드들이라 할지라도 전투가 일어난다면 기꺼이 자신들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난 이 전투가 불과의 전투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징한 새끼…”

“어이, 힘 빼지 말고 그걸 해 보자고.”

지켜보던 사람 중 하나 침을 뱉으며 말했다.

“뭐? 이거 재미 좀 보고 팔려던 거 아녔어?”

“지금 봐선 재미는커녕 모체도 보기 전에 뒈질 것 같은데. 이왕 죽을 거면 이득은 보고 죽여야지.”

“뭔데 그래?”

뭔진 몰라도 듣고 싶지 않았다.

“엉? 불에 던져 주려고. 이런 드라이어드들은 불에 타는 부분에서 다른 연기가 나는데….”

“그 연기가 아주 죽여주지.”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환청이라도 들은 것처럼 이명이 길게 울렸다.

“그럼 죽일 필요 있어? 조금씩 잘라서 태워. 안 죽게 손가락부터 잘라서 던져 주면 되겠네.”

“이 새끼 똑똑한 거 봐라. 그래, 네놈이 엘리트다.”

“원래 배운 놈들이 다르다잖아.”

시답잖은 농담들을 낄낄거릴 동안, 곧 자기에게 일어날 일을 알게 된 카나비스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럼 혹시 모르니 치유형 드라이어드도 대기시켜 놔. 다 쓰기 전에 죽어 버리면 곤란하니까.”

“드루이드님… 살려 주세요… 보고 싶어요….”

“입이나 혀부터 잘라 버릴까? 시끄러우니까?”

“누가 좀 도와주세요….”

“일단 불 좀 구하러 가자.”

“작은 놈으로 데려와. 이거 삼키고 능력 강해지면 큰일이니까.”

“그래. 감당할 수 있는 놈으로 데려와.”

많은 인원이 우르르 빠지고 둘만 남아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제이….”

내 모든 감정을 여실히 느꼈을 드라이어드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날 바라보았다. 불이라는 몬스터를 해치우는 평범한 카드 게임 치고 너무 추악한 인간 세계가 곁들어져 있었다.

아직 어린 드라이어드가 내가 자리를 떠난 사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도 알게 되니 소름이 끼쳤다.

“지금… 지금 둘밖에 없으니까 빨리 데리고 튀어 버릴까? 드라이어드들도 넷뿐이고….”

“소란이 생길 거야.”

엘더가 조금 조심스러운 말투로 날 설득하려 했다.

“제이, 당신이 다정하고 친절한 건 알지만 당신과 인연이 없는 드라이어드예요. 그래도 위험을 감수할 건가요?”

“물론 저 묘목 아이가 추악한 짓을 당할 걸 알아. 같은 드라이어드로서 자신의 주인을 지키다 죽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이용당하다 불명예스럽게 죽는 것에 어떤 고통이 따를지도 느껴져.”

엘더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느끼는 건 불명예와는 조금 다른 거야.”

내게는 저 애가 드라이어드 자체가 아닌 그냥 같은 인간 어린아이로 느껴졌다. 그래서 모든 상황이 너무 끔찍하고 절망스러웠다.

메스키트는 아무 말 없이 날 한참 바라보았다.

“내 주인, 제이.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러곤 카나비스에게 장난식으로 발길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대신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어요. 나머진 저희들이 알아서 할게요. 그리 어렵지도 않아 보이는 상대들이에요. 만일을 위해서 엘더와 바곳이 남고, 저와 데이지 아이가 다녀오도록 하죠.”

“힐러가 필요하지 않을까?”

“데이지 아이를 데려가는 건, 그 아이가 줄기를 써서 저 가엾은 드라이어드를 낚아 올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엘더는 멀리서도 지원이 가능하니 오히려 당신의 곁에 있는 게 가장 낫죠.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곧바로 당신 곁으로 돌아올게요.”

메스키트와 데이지는 짧게 작전을 주고받은 후 자리를 떴다. 하지만 모든 일이 녹록지는 않았다.

메스키트가 무서운 표정으로 다시 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엘더가 두 눈을 가리며 무릎을 꿇고, 내 목에 차가운 금속이 닿고 나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함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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