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604)

5월의 태양을 담았다는 에메랄드 반지는 따스한 빛을 냈다. 봄의 싱그러움을 가득 담은 나무가 비친 호수처럼, 정오의 햇살이 내려앉아 따뜻하게 물을 데운 호수처럼. 넘실거리는 생명력을 담은 신비한 보석 반지였다.

“이건….”

반지를 알아본 가막살나무가 놀란 눈을 했다. 머뭇거리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검지에 반지를 밀어 넣었다. 노발대발하는 엘더가 금방이라도 반지를 가로챌 기세라 마음이 급했다.

“임자 있다! 엘더, 이거 임자 있어, 이제! 못 뺏어 간다!”

“이…!”

“넌 루비 끼고 있잖아! 이건 5월이라 넌 보너스도 못 받는데 그만 포기해!”

“그래도 어느 정도 힘은 받을 수 있어!”

앗, 전투 보너스 생기는 달이랑 딱 맞는 보석만 힘을 받는 것 아니었어? 지금 알았어도 무를 생각은 없다.

가막살나무가 반지를 낀 손을 들고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반지는 그의 손가락에 자리한 순간부터 환하게 빛을 냈다. 녹색의 옅은 빛 무리가 그의 전신을 감쌌다.

곧이어 그가 들고 있던 이가 다 빠진 가느다란 검이 강렬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점점 영역을 넓혀 가는 빛에 맞춰 검의 모양이 변하기 시작했다.

길이가 반 이상 길어지고 옆으로 넓어졌다. 두께도 두꺼워지고 빛의 밝기가 약해졌을 땐, 검 끝이 돛대를 닮은 기다란 직사각형의 모양이 되어 있었다.

꼭 에메랄드를 섞어 만든 것처럼 검신이 전체적으로 녹빛을 띠었다.

그는 모양이 변한 검을 모로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몸집만 한 거대한 검을 들고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어 보였다.

“검이 엄청 커졌어!”

“아… 이것이 본래 저의 검입니다. 힘이 약해지자 볼품없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려면 좀 더 시일이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검이… 꼭 방패처럼 생겼네? 그러고 보니 가막살나무는 방어형인데 방패는 없어?”

“이 검이 제 무기이자 방패입니다.”

그는 검을 세워 방패 막기를 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이 제법 멋있어서 박수가 절로 나왔다. 멋지게 변모한 그의 검과 달리 아직까지 여기저기 성한 곳이 없는 장비가 눈에 띄었다.

포션이 나설 차례였다. 주머니에서 두 병 꺼내 그에게 건네자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조심히 받아 들었다.

포션 처음 써 보는 티를 팍팍 내길래 친히 뚜껑을 따고 여기저기 부어 주었다. 액체가 닿는 곳곳의 고된 세월의 흔적을 지워 나갔다.

장비가 모두 복구된 그는 날렵한 성기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메스키트의 갑옷과 다르게 견갑도 없고 투구도 없었으며, 가막살나무의 문양이 은실로 새겨진 짙은 붉은색 외투가 길게 무릎까지 내려왔다. 좀 더 민첩을 찍은 탱커처럼 보였다.

말쑥해 보이고 좋네. 가볍게 손뼉을 치며 그를 감상했다. 그의 얼굴에 어린 티가 남은 것은 묘목이 되어 버린 데이지처럼 외형이 퇴화되던 중이었던 것일까?

오늘 하루 이리스 파티와 열심히 돌아다니긴 했지만 너무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다. 살짝 어지러운 느낌도 들고. 슬쩍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가막살나무를 바라보았다.

아, 이런. 저 묵직한 꽃나무와 영혼의 연결을 맺으며 COST가 아슬아슬하게 찼나 보다. 영혼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예전처럼 풀썩 쓰러질 정도는 아니지만 살짝 버거운 느낌이 들었다.

당분간 레벨 업을 하기 전까진 다른 드라이어드를 영입하는 것은 미뤄야겠다. 드라이어드 둘 셋 정도는 거뜬하게 영입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생각만큼 레벨 업을 많이 못 했거나… 저 가막살나무 영혼의 크기가 상당히 컸나 보다.

눈이 마주친 메스키트는 모든 걸 예상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굳건한 손길이 등에 와 닿았다. 과하게 걱정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 날 믿어 줘서 고마웠다. 어차피 메스키트가 말려도 가막살나무와의 영혼의 연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갑자기 엘더가 가볍게 내 어깨를 끌어 어딘가를 보게 했다. 좀 전까지 하늘 높이 불의 차폐막이 솟아 있던 곳이었는데, 별안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설마 전투가 끝났나? 가막살나무와 영혼의 연결을 맺어 이리스의 파티가 드디어 불을 해치운 건가?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그곳으로 달려갔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이리스 파티의 상태는 나름대로 괜찮아 보였다. 여기저기 탄 자국을 달고도 의젓하게 서 있는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주인 되는 드루이드들이 상당히 지쳐 보였지만.

사방에 재 가루가 흩날리고 있었는데 유독 한 곳에 집중적으로 모여 크게 회오리치고 있었다. 불 보스를 물리친 것이 아니었어?

“계속 공격이 먹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소모전만 지속됐는데….”

이리스는 불과 몇십 분 전에 모체를 치우지 않는 가막살나무에게 악쓰던 것에 비해 아주 많이 지쳐 보였다. 그녀 역시 전투에 가담했는지 무기를 든 팔의 장비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겨우 공격이 통하나 싶더니 저 상태예요. 예감이 안 좋아요.”

이리스는 재 가루가 휘몰아치는 회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안에 불 보스가 있다고? 갑자기 메스키트가 방패를 들고 엘더의 큰 손이 내 코와 입을 막았다. 동시에 한데 몰려 있던 재 가루가 폭탄처럼 터지며 주위를 무시무시한 기세로 휩쓸고 갔다.

마이 아이즈! 악! 눈에 들어갔어!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며 두 눈을 뜨기 힘들었다. 불로 지진 것처럼 너무 뜨거웠다.

피해를 입은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여기저기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콜록콜록 기침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고 나처럼 비명을 지른 사람도 있었다.

엘더의 손을 호흡기 삼아 급하게 주머니에서 물병을 찾았다. 병에 든 물을 눈에 전부 쏟아 내니 검은 물이 얼굴에서 줄줄 흘러내렸다.

메스키트와 엘더처럼 발 빠르게 비호를 나선 드라이어드 덕에 이리스는 비교적 멀쩡해 보였지만 제퍼는 제 드라이어드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힐링을 부어 달라며 애원하고 있었다.

그 역시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노토스와 헤르마는 가슴을 치며 주저앉아 있는 것이 재 가루를 정통으로 들이마신 것 같았다.

우린 불의 차폐막이 아닌 거대한 재 가루의 회오리 안에 있었다. 재 가루 장막이 걷어지고 그 안에 거대한 불의 모습이 드러났다.

불은 기괴한 기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 방향에 거대한 톱을 달고 있었으며 몸체를 회전하며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불은 그 생태계 최강자의 모습을 흉내 낸다고 했던가. 가막살나무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상인이 끌고 왔다던 벌목 기계가 틀림없었다.

“세상에! 아깐 그냥 불 덩어리의 모습이었잖아요. 저건 대체 무슨… 아니 저거… 목공소에서 본 것 같은데? 어째서 불이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요?”

이리스는 재 바람의 위협에서 벗어나자 급하게 자신의 파티원들을 챙기며 말했다. 나도 이리스를 도와 움직이고 싶었지만 제자리에서 나를 붙들고 있는 엘더의 손아귀 힘이 너무 셌다. 드라이어드들은 내가 이 자리를 이동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드루이드님, 바곳과 민들레 묘목들의 상태가 이상해요.”

그때 데이지가 내 옷자락을 붙들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작은 아이들이 저마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힘들어하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쩨이 님… 앞이 보이지 않아요.”

“무서워요, 눈이 너무 아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어떡해요? 이렇게 영영 아무것도 안 보이면….”

“왜 이러지? 아까 재 가루 때문에 그러니? 어디 좀 보자. 물을 좀 부어 주면….”

메스키트가 방패를 물리지 않은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 쳐 다가왔다.

“이런… 다른 드라이어드들의 상태는 괜찮나요? 눈이 보이지 않는 드라이어드가 또 있나요?”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한 메스키트가 이리스의 파티를 향해 소리쳤다.

“앗, 나의 란타나가! 노토스의 소나무들도 이상해!”

“히아신스… 너도 안 보이는 거 아냐? 얼굴 좀 보자!”

“가까이 오지 말아 주세요.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눈을 못 뜨고 있잖아?”

“손대지 말아 주세요. 작은 세계수님의 몸이나 챙기세요.”

터져 나오는 웅성거림만 들어도 무언가 드라이어드들에게 이상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대체….”

“저 불의 능력이군요. 앞을 볼 수 없도록 수를 썼어요. 그것도 특정 드라이어드만.”

이런 실명 디버프를 걸 수 있는 불이라니! 정말 성가신 능력을 가졌잖아?

“메스키트의 말이 맞아요, 제이 님. 피해를 입은 건 지원형 드라이어드들이에요.”

“민들레 아이들은 회복형인데…. 이런, 어려서 저항을 못 한 거구나.”

하지만 바곳은 지원형인 한편 회복형이기도 했다. 지원형이 서브로 붙은 메스키트와 엘더도 멀쩡한데 왜 바곳이 얻어 걸렸지?

“이런…! 큰일이에요! 아티팩트로 피해를 입은 드라이어드들을 돌려보낼 수 없어요!”

이리스의 외침에 내 손목의 아티팩트도 확인해 보았다. 까만 재가 가득 묻어 있었다. 아무리 문질러도 닦이지 않는 것이 단순히 재를 덮어쓴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큰일이었다. 민들레 아이들은 아직 이런 전투에 나서기엔 너무 어렸다. 빨리 아티팩트로 돌려보내야 하는데 이리스의 말처럼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아티팩트의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아깐 이렇게 변칙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는디….”

헤르마가 잔기침을 하곤 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단순히 불덩이만 쐈는디, 하면서 동의를 구하듯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까다로워졌지?”

이거 설마… 가막살나무와 묶인 금제가 해금되면서 진정한 보스전으로 돌입한 건가? 게임 중에 이것처럼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보스전을 치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이젠 가막살나무의 존재로 무적 상태를 유지하던 불이 공격 가능해지자 지지 않기 위해 다양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저기요, 실명 디버프 해제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 없나요? 바곳과 민들레가 쓸 수 있긴 한데 아직 스킬 습득을 못 했어요!

하지만 가능했다면 진작 했을 것이다. 이리스의 파티에도 힐러가 둘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못 쓰고 있었다.

“보통 저의 란타나와 헤르마의 아네모네가 저항력이 각각 상당히 높고 두 꽃의 인연 효과 덕분에, 둘이 필드에 나오면 영향을 받은 팀의 드라이어드들이 이런 능력에 잘 당하지 않는데…. 이렇게 확정적으로 능력에 걸리는 것은 처음 봤어요.”

즉, 저쪽은 저항력 스탯 믿고 팀 내에 디버프 해제가 가능한 드라이어드를 따로 두지 않은 것이다. 큰일 날 소리! 우리 날 것 그대로의 바곳을 만났다면 저쪽도 전멸 각이었다. 디버프 해제가 얼마나 중요한데!

갑자기 오토바이 배기음이 들리며 벌목 기계를 닮은 불 보스가 미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보스전의 시작이었다.

메스키트가 한발 앞서 나가며 방패를 세웠다. 전과 같이 그녀가 메인으로 탱킹을 하려는 것 같았다.

도깨비불처럼 생긴 세 개의 불꽃이 불 보스로부터 뿜어져 나오더니 메스키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동시에 회전하는 톱에 방패를 얻어맞은 메스키트가 바닥에 긴 자국을 남기며 뒤로 주룩 밀려났다.

엘더가 급하게 스태프를 들고 능력을 사용했다. 하얀 꽃잎이 엘더를 중심으로 훅 퍼지며 달콤한 향기가 풍겨 왔다. 꽃잎처럼 하얀 빛이 바닥을 넘실넘실 가득 채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메스키트까지 도달한 흰빛이 별안간 벽을 만난 듯이 튕겨 나온 것이었다.

“메스키트에게 회복의 힘을 사용할 수 없어.”

엘더가 찌푸린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말했다.

환장할 노릇이다. 회복 불가 디버프도 걸 수 있다니! 지금까지 만난 적은 모두 단순한 놈들뿐이었다는 듯이 불이 상당히 지능적으로 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