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를 받아 아주 높은 층의 연구실까지 갔다. 필라의 연구실과는 문부터 달랐다. 고풍스럽고 광택이 나는 밤색 문에 무려 금테가 둘러져 있었다.
502호라고 숫자만 덜렁 있는 필라의 연구실과 다르게 이름이 적힌 명패도 달렸다.
롬가토
이 방 주인의 이름으로 보였다.
똑똑똑.
“연금술사님 방문자를 모셔왔습니다.”
“네, 들어오세요.”
“그럼 이만.”
들어갑니다. 안내를 맡은 사람이 내려가자 조심히 문을 열었다. <테라리움 어드벤처>의 또 다른 직업, 연금술사! 여기저기서 자주 언급되길래 보통의 직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연구원부터 시작해서 정점에 달해야 얻을 수 있는 직업!
연구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꽃향기가 풍겨 왔다. 우리 학교 실험실과 다를 바 없이 책상 몇 개와 선반만 있던 필라의 연구실과 다르게 롬가토의 연구실은 무척 거대한 집무실처럼 보였다.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한쪽 벽면을 덮었고 내가 대자로 누워도 남을 만큼 넓은 유려한 곡선의 책상도 자리했다. 발소리가 다른 걸 느껴 바닥을 보니 카펫도 깔려 있었다.
유일하게 연구실이라고 할 만한 특징은 힐끗 보이는 옆방에 잔뜩 놓인 도구들이었다. 바짝 말린 약초 같은 것들이 줄에 묶여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도 보였다.
“와, 필라랑 다르게 방을 두 개 쓰네.”
필라의 연구실이 학부생용이라면 이 방은 교수용이었다.
“소개를 받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큰 암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가 말했다. 그의 옆엔 드라이어드로 보이는 자가 서 있었다.
흰 꽃이 촘촘하게 박힌 어깨까지 오는 투명한 베일을 쓰고 반들반들한 타원형의 잎들이 등 뒤에 망토처럼 달린 붉은 머리의 남성형 드라이어드였다. 드라이어드가 있다는 건 롬가토는 연금술사이면서 드루이드라는 것을 뜻했다.
오, 투잡! 멋진데?
“네, 제가 이 총을 샀는데.”
총을 꺼내 그에게 다가가 보여 주었다.
“여기 들어가는 총알을 직접 제작하신다고 들어서요. 총알 비축분을 좀 많이 구매하고 싶어요.”
총알도 몇 개 꺼내 책상에 올려 두었다.
“아왜나무 드라이어드의 힘을 담은 소화기 탄환이군요. 여기 이 드라이어드가 아왜나무입니다.”
“오호….”
유니크 등급이군, 전투력 측정기 엘더가 비죽거리며 말했다. 아니, 유니크면 얻기 힘들잖아? 내게 아왜나무 드라이어드가 있으면 총알의 위력이 높아진댔는데. 헛된 기대였잖아.
“이 총알은 위급 시에 사용하도록 제작되어서 사용 빈도가 그렇게 높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소개서에 보면 상점의 물량을 모두 구매하셨다고….”
“아, 요긴하게 잘 썼습니다. 이게 제 무기임돠.”
“드루이드의 무기로 쓰신다고요? 이건 불에 그렇게 위력이 좋지 않은데.”
그런 용도로 만든 게 아니라니까, 그의 눈썹이 한데 모이며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 탄환의 가격은 상당합니다만….”
“넵, 쏠 때마다 이게 총알을 쏘는 건지 다이아를 쏘는 건지 애매한 느낌이 들 정도로 비싸긴 하더라고요.”
엘더가 앓는 소리를 했다.
“손님은 정말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이왕이면 대단하다고 해 주세여. 꺼냈던 총알을 모두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어제 너무 막무가내로 발사해서 남은 것이 많이 없었다.
“사실 상점에 납품한 것만으로도 한 달은 충분히 버틸 것이라 생각하여 여분을 제작해 둔 것이 없습니다. 테라리움에 화재가 발생할 땐 많이 공급되긴 하나 손님께서 전부 구매해 버린 것엔 비할 바가 못 되죠.”
“그럼 더 만들어 주실 순 없나요? 만드는 거 오래 걸리나요?”
“레시피가 있으니 상점에 공급할 만큼의 양은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다만 원하시는 양이 많아지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18번째 테라리움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오늘 과수원에서 볼일을 보면 빠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엔 떠날 생각이었다.
“그럼 이틀 치로 부탁드려요! 그리고 혹시 저 아왜나무 외에 다른 드라이어드의 힘을 총알로 만들 순 없나요?”
“일단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제약이 있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다란 책상을 빙 둘러 내게 다가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니크 등급 이상의 드라이어드의 경우만 가능하단 것입니다. 그 아래 등급의 드라이어드들로도 많은 실험을 해 보았으나 모두 헛수고였습니다.”
“앗… 왜 특별히 유니크 등급만 가능한 걸까요?”
그는 안경을 쓱 밀어 올리곤 답했다.
“저는 그것을 자연 발생 확률에 따른 것으로 가설을 세우고 있습니다. 저명한 드루이드 학자들 중 몇은 자연 발생 확률에 따른 드라이어드의 힘의 분배 이론을 믿고 있습니다. 왜 스페셜 등급과 노멀 등급 사이엔 커다란 힘의 차이가 있을까? 왜 노멀 등급이 거대한 포레스트를 형성하지 않는 한 스페셜 등급을 이길 수 없을까?”
나는 메스키트와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그냥 메스키트가 오래 살아서 짱 센 거 아니었어?
아니 고만고만한 크기인 데이지와 바곳 사이에도 힘의 차이가 존재했다. 생각해 보니 게임에선 당연한 등급의 차이에 따른 강함인데, 왜 다른 걸까?
“둘의 유일한 차이는 그저 자연 발생 확률 때문이란 것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자연 발생 확률이 낮은 드라이어드는 열매에서도 얻기 힘들죠. 이것을 학자들은 세계수 밖으로 나온 동종의 수가 적은 드라이어드일수록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모든 드라이어드는 세계수 안에서 단 하나의 종으로만 존재할 때 힘의 크기가 서로 동일하며, 세계수의 밖으로 나올 때 그 수만큼 힘이 분배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세계수 밖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노멀 등급이라도 포레스트를 형성하여 왕에게 영혼을 의탁하면 수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강해지는 것도 설명이 되죠.”
“와, 엄청 흥미롭네요!”
“하지만 이 이론의 반증은 세계 곳곳에 드라이어드는 계속 생겨나고 있으니 노멀 등급의 드라이어드는 힘이 갈수록 약해져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세계수 밖에서 태어날 수 있는 드라이어드의 수는 종에 따라 한정적이며 기존의 드라이어드가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새로운 드라이어드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설도 존재합니다. 다만 이건 확인이 불가하기에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은 단순한 증명되지 않은 이론일 뿐입니다.”
26번째 테라리움에서 나비를 얻었을 때, 메스키트가 자신에겐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가 없다고 했었다. 유일무이. 그녀가 그래서 강한 것이라면 롬가토가 믿고 있는 이론도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었다.
“메스키트는 어떻게 생각해?”
내 질문에 메스키트가 웃으며 답했다.
“후후, 여기서 이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녀는 어쩐지 그리움이 담긴 눈을 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은 듯 웃음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저 이야기가 시작된 곳을 알고 있어요. 그건 바로 제 전 주인이랍니다.”
“헐?”
“뭐라고?”
나와 롬가토가 동시에 놀라 소리쳤다. 메스키트가 전 주인을 언급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렇게 많은 정보를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학자들은 아주 오래전에 발굴된 고서에서 본 이론이라고 했습니다만….”
롬가토의 콧대에서 안경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내 주인, 제이.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해 준 것도 바로 저랍니다. 비밀로 하겠다더니 결국 책으로 써서 남겼나 보군요. 제 전 주인은 뭐든지 글로 남기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 특성을 알고서도 이야기해 준 제 잘못이 크죠.”
갑자기 메스키트가 랜스를 들어 롬가토에게 겨누었다. 그의 드라이어드가 당황하여 자신의 주인을 감쌌다. 좀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매서운 눈을 했다. 기세가 달라졌다.
“하지만 당신은 여기서 제가 한 모든 이야기를 잊어야 합니다. 저 이야기는 단순히 증명 불가한 것으로 남아야만 해요.”
“그… 그 이유라면 알고 있다네. 다만 드라이어드에게서 이론의 진실을 증명받으니 당황스러울 뿐이지.”
아왜나무 드라이어드가 메스키트의 랜스 끝에 손을 대며 두려움에 떠는 얼굴을 했다.
“부디 무기를 거둬 주세요. 전 당신에게 맞설 자신이 없습니다.”
“당신의 작은 세계수가 비밀을 지키지 못하겠다고 하면 죽이는 것만이 세상을 위한 일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메스키트는 무척이나 무섭게 보였다.
“왜… 왜 죽이려고 해? 그렇게까지 해야 해?”
“만약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의 드라이어드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다른 드라이어드들을 죽일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욕심이니까 그렇습니다.”
대답은 위협받고 있던 롬가토에게서 나왔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메스키트를 말려 보라는 것처럼 날 바라보았다.
“제 주인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부디 믿어 주세요. 저의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라도 제가 주인을 감시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메스키트가 랜스를 거두자 아왜나무가 울먹이며 그의 주인을 껴안았다.
“나는 처음 듣는 사실인데….”
엘더가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준 적이 없지 않니? 너의 모든 지식은 나로부터 흡수된 것이니 입을 다문 내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단다, 꼬맹아.”
“난 당신 말고도 많은 성목들에게 배웠어!”
엘더가 반항적인 목소리로 메스키트에게 소리쳤다.
“물론 그 진실을 알고 있는 드라이어드 수도 적단다. 손에 꼽을 정도지. 내가 아니라면 넌 이 이야기를 절대 알 기회가 없었을 거란다.”
엘더는 꽤 충격이 커 보였다. 축 늘어진 어깨가 무척이나 애처로워 보였다.
“맹세하겠네. 절대 오늘 들은 사실을 누설하지 않겠네.”
“이런 감당하기 힘든 진실이라면 알려 주지 않으면 좋았잖아요. 당신 같은 높은 분이 왜 제 주인님께 시련을 주시는 거죠? 당신의 주인도 같은 사람이잖아요? 아무리 주인이라도 그녀는 믿는 건가요?”
아왜나무가 메스키트를 향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자신의 주인이 하마터면 죽을 뻔하고 이를 막을 능력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충격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그렇지. 나도 실수로 막 내뱉으면 어떡해? 앗, 그럼 나도 죽는 거야? 하지만 메스키트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주인, 제이의 결정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제이, 당신이 사실을 말해야 된다고 판단하면 그렇게 하세요. 그것이 당신이 내린 결정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전부 옳은 것입니다.”
“헐! 아냐, 아냐! 절대 안 말해. 그렇게 되면 많은 죄 없는 드라이어드들이 죽을 수도 있다며. 절대 말 안 해! 아니 못 해!”
내가 기겁하여 소리치자 메스키트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거면 됐어요.”
그러자 아까까지 이 방을 무겁게 짓누르던 위압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렇지. 하여튼 이러한 이유로… 탄환에 드라이어드의 힘을 응축시키려면 농도가 아주 높은 것이어야만 합니다. 어쩌면 노멀 등급도 가능할 수 있으나 아주 큰 포레스트를 이룬 상태여야만 하겠군요.”
롬가토가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내가 가진 드라이어드들의 힘을 탄환에 응축시키려 했던 꿈이 반 정돈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