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의 제안 모두 수락할 생각이었다. 다만 서로를 위한 선의의 경쟁은 좋지만 동업할 건데 계속 으르렁거리는 것은 싫었다.
“28번째 테라리움은 당장 식료품과 생필품이 부족하긴 해요. 자체 농사가 어려운 땅이라고 했으니 외부에서 들여오는 것이 좋겠네요. 차라리 제 테라리움에 분점을 내 주셨으면 해요.”
“역시 저희 황금 호박이…!”
“하지만! 당장 테라리움에 물자가 급하긴 하나 분점을 내더라도 이용할 고객이나 물품을 소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그레이트 빈에서 테라리움 재건에 도움이 되는 많은 인력을 확보하여 보내 준다면, 그 사람 수가 충당될 때마다 분점을 세우는 걸로 해요.”
“역시 저희 그레이트 빈이…!”
“그리고! 이 인력들에게 지급할 다이아는 주얼리 콘이 보석 재건 사업을 통해 만들어 내는 저의 수익으로 지급할 거예요. 그러니 제게 수익을 바로 주지 말고 그것을 그레이트 빈의 인력 고용으로 전달해 주세요. 28번째 테라리움에선 주얼리 콘의 전문 장인 외의 인력은 전부 그레이트 빈에서만 고용 가능합니다. 또한 당분간 식료품과 생필품은 오직 황금 호박의 것들을 이용하겠어요. 이외의 외부의 것들은 반입 불가입니다.”
셋 모두 말이 없어졌다. 간단하게 서로 상생하게 만들었다.
“제 보스는 불멸의 다이아몬드를 다시 생산하는 것을 무척이나 고대하고 있어요. 이미 실력 있는 주얼러도 영입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외에도 모든 태양의 보석들 중 상급 이상 액세서리 매물이 있다면 제게 보여 주세요. 특히나….”
드라이어드들이 전투 보너스를 받는 달이 잘 기억나지 않아 핸드폰을 꺼내 커닝했다.
“음… 3월부터 7월, 그리고 9월의 보석들은 가릴 것 없이 전부 매입할게요. 빚이 많다고 했던가? 이 정도면 사업 시작 자금은 충분하겠죠?”
옥수수 쪽 사람이 내 말에 경청하며 열심히 메모했다.
셋은 이제 마냥 서로를 견제하기만 해선 안 되게 되었다. 호박은 분점을 확장하고 수익을 늘리기 위해선 많은 고객을 유치해야만 했다. 그 고객은 그레이트 빈의 인력들이 주가 될 예정이기 때문에 그들이 테라리움에 많이 올수록 이득이었다.
그레이트 빈이 많은 인력을 제공하려면 주얼리 콘이 활약해야만 했다. 장인 외의 인력을 그레이트 빈에서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뜨내기들을 잔뜩 영입해서 질이 나쁘다는 호박의 평가로 말미암아 아주 신중히 인력을 골라내는 역할을 그들이 잘 해 줄 것이다.
또한 황금 호박 외의 교역품은 제한되어 있으니 교역 루트가 완전히 자리 잡도록 각자가 힘을 써 줘야 했다. 서로가 서로를 응원해 줘야 이익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59번째, 42번째, 그리고 18번째에서 28번째로 향하는 마차가 필요해요. 앞의 두 곳에선 사람들과 짐을 이송시킬 거고 18번째는 이제 행정 관리원님과 이야기해야겠네요.”
호박, 옥수수, 콩에 알짜배기를 다 빼앗긴 사람들이 그제야 마차 건이라도 물기 위해 열심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와 연줄을 만들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필라와 루프의 가족들이 이사할 때 필요한 마차가 마련되었다.
작물 트리오는 새로운 제안을 검토하기 위해 굉장히 바빴다. 마차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멀찍이 떨어져 앉았던 그들이 이제는 오손도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행정 관리원과 장비 상점의 거래 건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제이 님의 대책이 예상했던 것보다 대단하여 이번에도 중계 수수료를 놓치나 싶었는데 좋은 거래를 제안해 주시는군요.”
그는 장인 부모 쪽이 아닌 자식이 제작한 장비들을 모두 매입하는 것을 의아해했지만 성심성의껏 거래에 응해 주었다.
18번째에서 향할 마차도 마련되었다. 날 16번째 테라리움까지 배웅해 줄 이리스의 파티가 돌아오는 날짜로 일정을 잡았다.
회의는 밤늦게 끝났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기진맥진했다. 안내원에게 미리 말해두었던 드라이어드 영양제 한 상자와 설익은 열매를 두 상자 구매하고 나왔다. 양분 열매는 아쉽게도 재고가 없었다.
여관 앞에서 마침 귀환하던 이리스의 파티와 마주쳤다. 당이 떨어진 느낌이라 여관 식당에서 디저트를 먹기로 했다. 그녀는 벌을 마련한 이야기를, 나는 오늘 과수원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며 의뢰 일정을 조율했다.
그녀는 내게 말벌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몫의 꿀벌도 구해 왔다. 유심 칩 자리엔 이미 말벌의 칩이 꽂혀 있어서 사용할 때가 오면 갈아 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롬가토에게 제작 의뢰를 맡긴 총알을 수급 받는 대로 16번째 테라리움으로 떠나겠다고 했다. 빠르면 모레가 될 것이란 말에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했다.
오늘도 내 객실 문 앞은 아티팩트 공방에서 보낸 상자들로 가득했다. 엘더가 환장할 법한데 묘하게 조용했다. 주섬주섬 상자들을 챙기곤 있지만 아직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메스키트가 내버려 두면 된다곤 했지만 오죽 신경 쓰여야지.
모처럼 엘더가 잔뜩 꾸민 아티팩트 안을 보고 호응이나 하며 기분을 풀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직접 마이 룸을 꾸미는 것도 즐거웠지만 남이 꾸민 것을 보는 것도 좋았다.
엘더는 센스가 좋았다. 노멀 필드는 데이지도 해당하건만 죄다 자기가 독점해 화려하게도 꾸며 놨다. 마침 어제 온 것 중에 노멀 필드의 하우스가 포함되어 있었는지 못 보던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생겨 있었다.
저 멀리 메스키트의 몫인 태양의 신전도 보였다. 무척이나 구경하고 싶었지만 엘더가 먼저였다.
“야, 엘더 잘해 놨다. 테마가 다른 것들도 용케 잘 조합했네. 모조 장미꽃 덤불과 황금 아이비 덩굴을 저택 기둥 속에 숨겨서 장미 덩굴이 기둥을 휘감은 것 같잖아? 안도 꾸몄어? 그리고 노멀 필드는 데이지도 좀 주고 그래라. 애가 이런 거에 욕심이 없어서 하나도 안 챙겼네.”
드라이어드들은 내가 객실에 도착하자마자 각자에게 배분해 준 영양제를 하나씩 들고 테이블에 둥글게 앉아 있었다.
내 말에 엘더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고민하더니 갑자기 데이지의 손을 잡고 아티팩트로 뿅 들어갔다.
뭐시여, 어디 가? 내가 칭찬하잖아.
아티팩트를 들여다보니 엘더가 제 아티팩트 가구들을 뜯어다가 데이지에게 안겨 주고 있었다. 쟤 갑자기 왜 저래? 안 하던 짓을 하고.
등 뒤에서 메스키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안하다. 노멀 등급이라고 무시해서.”
허얼, 동네 사람들! 엘더가, 저 싸가지가 사과를 했어요! 세상에! 쟤 내 드라이어드 맞나요? 어디서 잘못 바뀐 거 아닌가요?
아니 저 잘생긴 얼굴은 우리 엘더가 맞았다. 갑자기 엘더가 내 쪽을 불만 있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흰 피부의 귓바퀴가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헐, 뭐야. 저 감당하기 힘든 귀여움은? 광대가 하늘로 발사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태껏 내가 특별해서 강한 줄 알았다. 하지만 내 강함의 비밀이 단지 내 종이 적게 태어났기 때문일 줄은…. 그러니 너의 종은 많이 태어나서 약하기에 이런 거라도 챙겨서 더 강해져라. 그래도 난 특별하진 않지만 묘목 때부터 메스키트에게 단련받아 최고이며 위대하다. 날 따라오려면 너도 더 노력해.”
메스키트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그녀는 무척이나 즐겁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웃음이 전염되어 나도 비질비질, 하고 웃음이 나왔다.
데이지는 엘더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엘더가 잔뜩 안겨 준 아티팩트 가구들을 들고 배시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곧 그녀는 들고 있던 아티팩트 가구들을 죄다 내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저도 최고이며 위대해요! 왜냐면 전 제이 님의 드라이어드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더욱 노력할 거예요!”
그러면서 혼자 뿅 아티팩트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데이지는 테이블에 잔뜩 널브러진 영양제 병을 제 것은 물론 엘더 것까지 쓸어안고는 내 뒤로 숨었다. 그러곤 엘더에게 들킬세라 빠른 속도로 뚜껑을 따서 전부 마셔 버렸다. 그녀가 단검을 놀리는 속도만큼 아주 잽쌌다.
뒤늦게 아티팩트 밖으로 나온 엘더가 참상을 확인하곤 난리를 피웠다. 비로소 본래의 엘더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묘목들은 정말 빠르게 자라죠?”
메스키트가 마치 ‘애들은 참 빨리 커요.’ 하고 말하는 부모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공감하기 힘든 것이, 엘더와 데이지 둘 다 내 눈엔 아직 애들이었다. 덩치가 큰 엘더도 지금만큼은 애로 보였다.
데이지를 따라 하며 빠르게 영양제를 마시던 바곳이 캑캑거렸다. 데이지야 워낙 잘 먹는 애니까 그게 되는데….
한바탕 웃고 나니까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졸음에 쫓기듯 눈을 감지 않고 내 쪽에서 졸음을 청하며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내가 잠들려 하자 데이지와 엘더가 티격태격 싸우는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자장가처럼 들렸다.
***
롬가토에게 제작 의뢰를 맡긴 총알을 모두 받고 드디어 18번째 테라리움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총알도 받고 필라와 루프에게 인사도 할 겸 연금탑을 재방문했더니 롬가토의 연구실에서 시체처럼 누워 자고 있는 후임 연구원들이 보였다. 수량을 꽤 빨리 마련했다 싶었더니 논문에 갈려 들어간 대학원생들처럼 그들도 혹사당한 것처럼 보였다.
아티팩트 공방엔 여관의 사람을 통해 더 이상 가구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전했다. 작물 트리오가 보낸 사업 계획서를 훑어보고 데이지2에게 미리 언질도 넣어 놨다.
그는 가막살나무가 잘 도착했고 일꾼이 늘어 기쁘다며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레드 데이지 종이 워낙 잘 웃긴 해도 그에게선 정말 진실된 웃음이 보였다.
가막살나무는 테라리움 안이 아닌 밖에 심기로 합의를 봤고 민들레 아이들이 갑자기 뭔가에 꽂혔는지 몰래 테라리움 안에 민들레를 심고 다닌다는 소식도 들었다.
칼롱에게 확인 차 말벌을 보냈다.
오늘 여기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