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극적으로 4급 가드너인 시들링을 경호원 삼아 윈터의 의뢰를 수행하러 연금탑으로 향했다.
여관을 나가자마자 만약 파필리온과 마주치면 스토커 새끼라고 외치며 걷어차 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시들링과 함께하기 때문인가?
연금탑을 지나 윈터가 말한 동산을 올랐다. 동네 뒷동산 정도를 생각했는데 높이가 꽤 됐다. 나무가 우거진 숲도 있었다. 어떻게 단순 마을 단위라고 생각했던 테라리움 안에 이런 산이 있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시들링은 중무장을 하고도 전혀 거리낌 없이 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죽도록 부러웠다. 난 언제쯤 쟤처럼 대단한 체력을 가지게 될까? 딱히 노력은 하지 않지만 하루아침에 뚝딱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잡생각을 하며 오르니 훤한 낮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리쬐는 태양을 온몸으로 받는 것처럼 더위가 몰려왔다. 마치 한여름의 날씨처럼 무척 더웠다.
“여기 왜 이렇게 더워요?”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갈수록 더워지고 있습니다….”
목질화된 피부를 가리기 위해 옷을 잔뜩 껴입은 윈터가 제일 힘들어 보였다.
“저기… 저곳이 제가 말씀드린 알 수 없는 나뭇가지들로 가로막힌 곳입니다…. 저곳을 넘어야 드라이어드에게 갈 수 있어요.”
윈터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마치 나무로 만든 그물을 보는 것 같았다. 검게 반들거리는 나뭇가지가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닦인 길부터 그 주위를 죄다 막고 있었다.
높기도 하지만 동굴처럼 이쪽을 향해 둥굴게 굽어 있어서 위를 향해 넘어가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워낙 촘촘하기도 해서 틈을 통해 사람이 지나가는 것도 용이해 보이지 않았다.
“저게 정말 나무 맞아요?”
“네, 오셨던 드루이드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계수의 힘이 느껴지는, 드라이어드의 모체라고.”
“새까만 나무라니… 꼭 불에 탄 것처럼…. 어때? 이거 가까이 가면 위험할까?”
메스키트에게 의견을 묻기 위해 올려다봤는데 표정이 묘했다.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편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도 다들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딱히 위험하다고 하는 드라이어드가 없으니 시들링을 앞세워 나무에 다가가 보았다. 멀리서 보았을 땐 까맣기도 하고 주변이 후끈거려서 불에 탔나 싶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나무는 흑요석처럼 광이 나고 딱딱해 보였다. 꼭 보석으로 만든 나뭇가지 같았다.
“난 이거 아무리 봐도 나무는 아닌 거 같은데. 돌? 아니 산호 같은데?”
만져 봐도 될까? 슬쩍 나무에 손을 대 보았다. 피부가 살짝만 닿았을 뿐인데. 아주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주변이 한여름처럼 더운 이유는 이 나뭇가지에서 나는 열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불은 보이지 않았다. 활활 타는 보통의 불이나 몬스터 불, 그 어느 것도.
더구나 여긴 테라리움의 안이었다. 가막살나무 때처럼 불을 어딘가에 가둬 놓거나 숨겨두고 막아 둘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세계수 가지의 축복의 힘 덕에 불은 테라리움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거나 다가오더라도 축복의 힘에 억눌려 크기가 작았다.
그렇다면 이 주변을 이렇게 덥게 만드는 온기는 어디서 나오는 거지?
그때 나무 그물 틈 사이로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이 휙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눈으로 쫓았으나 금세 사라져 버려서 정체를 확인하진 못했다. 내가 뭘 본 거야?
“이건… 정말 세계수의 힘이 느껴지긴 하지만….”
“드라이어드의 모체는 아니에요.”
칼미아와 메스키트가 동시에 말했다. 세계수의 힘은 느껴지는데 그렇다고 드라이어드의 모체는 아닌, 돌로 만든 가짜 식물 같은 이것은 대체 뭘까?
쾅!
다들 선뜻 의견을 내지 못하고 불쾌한 표정을 짓고만 있을 때, 시들링이 다짜고짜 검을 꺼내더니 나뭇가지를 향해 내리쳤다. 깜짝 놀라서 메스키트의 곁으로 물러났다. 양해는 구해야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매우 단단해 보였던 나뭇가지는 의외로 쉽게 잘려 나갔다. 시들링의 힘이 센 것인지, 생각했던 것보다 나뭇가지의 강도가 약했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쟤가 검만 몇 번 휘두르면 길을 쉽게 뚫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들링은 갑자기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잘려 나간 나뭇가지의 단면들에서 흰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꾸물꾸물 뾰족한 것이 솟아나더니 순식간에 길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잘려 나간 나뭇가지가 재생되는 것처럼 보였다.
“잘라 내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있지만….”
윈터가 시들링의 검을 흘긋 보고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잘라 내면 이렇게 다시 재생을 합니다…. 그래서 길을 뚫기가 힘듭니다….”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의 잔해에서도 수증기가 일어났다. 그러더니 얼음처럼 사르르 사라져 버렸다.
“일단 식물이긴 한 거 맞아? 아무리 봐도 난 식물처럼 안 보이는데….”
내 말에 윈터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드라이어드들이 뭐라고 하나요? 식물이 아니라고 하나요? 그… 왔던 드루이드 중에서도 드라이어드들이 식물이라고 확신은 못 하나 분명 세계수의 축복은 느껴진다고 하신 분이 계시긴 했습니다….”
나는 윈터에게 멀어져 슬쩍 메스키트의 곁에 붙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거… 설마 연금탑에서 바곳처럼 만들어 낸 인공 개량종 같은 거 아닐까? 그래서 드라이어드들이 못 알아보는 거 아냐?”
“내 주인, 제이. 그렇다면 개량에 섞인 종의 특징이 하나라도 보여야 하는데, 이건 여태 제가 본 종의 어떠한 특징도 보이지 않는답니다. 마치… 새로운 종을 창조해 낸 것처럼 말이죠.”
메스키트는 날 보며 표정을 잠깐 풀었지만 다시 나뭇가지를 바라볼 땐 무척이나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심지어 항상 웃고 있는 데이지마저 무척이나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을 했다.
“뭐 안 좋은 기운이라도 느껴져? 다들 표정이… 엄청 험악한데.”
“굉장히 역겨워요. 이건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불쾌함이에요. 저 검은 가지를 보면 볼수록 속이 뒤틀릴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난… 화가 나서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칼미아와 블루 멜로우가 대신 답하였다. 드라이어드들의 상태가 굉장히 이상했다.
“멀리 떨어져라. 벨라돈나를 부르겠다.”
시들링의 말에 윈터가 뛰다시피 우리와 멀리 떨어졌다. 시들링의 아티팩트에서 보라색 꽃잎이 휘날리며 벨라돈나가 나타났다. 그녀는 필드에 나오자마자 입을 가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벨라돈나, 너의 독으로 이걸 전부 없애 버릴 수 있겠나? 너의 독이라면 어떠한 생명도 살아남지 못할 텐데.”
시들링이 벨라돈나에게 물었다. 검은 후드가 그녀를 완전히 덮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시들링, 미안하구나. 굉장히 나쁜 기분이 드는데… 저 이상한 가지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단다.”
“어… 데이지, 저 나무를 잘라 볼래?”
“드루이드님… 죄송해요. 저도 가지를 상대로 무기를 꺼낼 수가 없어요.”
데이지는 실망시켜 드려 죄송하다며 울상이 되었다. 어? 다들 왜 이러지?
“메스키트도? 엘더도? 바곳, 넌?”
주저 없이 검을 휘둘렀던 시들링과 달리 가지를 공격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벨라돈나처럼 기분은 나쁜데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했다.
윈터에게 소리쳐 그가 데려왔던 다른 드루이드의 드라이어드들의 이전 경위를 물었다. 그들도 똑같이 나무를 공격하지 못했는지. 그러자 그가 그렇다고 답했다. 아니 그런 건 미리 알려 줬어야지!
“그럼 여기서 저 나무를 공격할 수 있는 건 시들링밖에 없는데 잘라 내도 바로 재생되어 버리니 쓸데없이 힘만 빼게 되는 거잖아. 드라이어드의 특수한 힘을 사용하지 못하면 가망 없는 거 아냐?”
나는 없는 전력으로 쳐야지. 나뭇가지에 다이아를 던져서 공격할 순 없잖아. 이건 내가 아무리 행정 관리원이라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싶었다.
그나저나 파필리온은 알고 있을까? 자신의 테라리움에 이런 기괴한 나무가 자라나고 있다는 걸. 아니, 치밀한 놈이라 했으니 알면서도 방치한 거 아닐까? 대체 왜?
땅에 떨어진 돌을 주워 나뭇가지를 힘 있게 두드려 보았다.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나무를 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목소리로, 듣는 사람이 머리가 아플 정도로 비명을 질러 댔다.
“그만! 그만! 누가 지르는 거야?”
귀를 아무리 막아도 소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마치 귀 안쪽에서 나는 소리처럼.
“제이! 무슨 일이에요?”
“누가 비명을 지르는 거야? 다들 안 들려? 왜 나만….”
다들 내게 몰려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귀를 막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나에게만 이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시들링조차도 몹시 당황한 얼굴로 날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메스키트가 보호하듯 날 감싸 안았지만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그만 좀 해! 고막이 찢어지겠어! 어떤 새끼야?”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곧이어 삐, 하는 이명과 함께 시야가 훅 낮아졌다. 주변이 좀 먹듯 시야가 좁아지고 뿌옇게 흐려졌다.
내 이름을 다급하게 외치는 드라이어드들의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을 열면 토할 것 같았다.
두 다리로 딛고 서는 것이 힘들어 주저앉아 버렸다. 지독한 빈혈이 몰려오고 있었다. 드문드문 초 단위로 기억이 끊기고 이마에 차가운 금속이 닿는 느낌과 함께 무거워진 몸을 겨눌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눈을 뜨니 날 괴롭히던 비명은 없었다. 다만 주변이 온통 까만 어둠이었다.
화르륵 무언가 타는 소리가 들렸다. 내 주변이 불붙인 담배꽁초처럼 둥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뭐야, 다들 어디 가고 나만 있어? 여긴 어디야?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건 꿈인가? 나 기절했나?
갑자기 등 뒤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온통 깜깜한 어둠에 빛이 생기니 비로소 주변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길을 막고 있던 검은 나뭇가지가 이곳에서도 울타리처럼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뒤를 보니 새하얀 빛의 정체는 신비로운 하얀 나뭇가지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계수의 가지였다. 그것도 내 28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의 가지.
다른 수없이 많은 테라리움의 과수원에도 세계수의 가지가 있지만 저기서 빛을 내고 있는 가지는 분명히 28번째 테라리움의 가지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기억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검은 나뭇가지, 이것도 비슷한 걸 본 적 있었다. 똑같이 꿈속에서. 비록 그때는 메마르고 앙상한 나뭇가지였지만. 내게 바곳의 영혼이 담길 설익은 열매를 줬었지.
내 꿈속에서 울타리처럼 둘러진 이것들도 길을 막고 있던 그 검은 것들도, 전부 세계수의 가지였다. 도저히 세계수의 가지처럼 보이지 않는, 돌로 만들어진 가지처럼 보여도 세계수의 가지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자 그럴 리 없을 텐데도 검은 나뭇가지가 내게 알아 줘서 고맙다고 말해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드라이어드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메스키트마저도. 알아보지는 못했으나 아무도 가지를 공격할 수도 없었던 건 세계수의 가지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서일까?
대체 세계수의 가지가 어쩌다가 저런 상태가 된 거야?
뭐? 뜨겁다고? 뜨거워서 괴롭다고? 도와 달라고?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하얀 나뭇가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28번째 테라리움이 불에 완전히 박살 났을 때 내게 말을 걸어왔던 세계수의 가지가 떠올랐다. 마치 그때처럼 또다시 내게 말을 거는 느낌이었다.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검은 나뭇가지가 세계수의 가지가 맞다면, 쟤는 16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담당이라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지 않아? 그런데 왜 16번째 세계수의 가지는 과수원이 아니라 이런 밖에 있는 거야?
그러자 다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검은 나뭇가지였다. 검은 나뭇가지는 비명을 지르며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