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604)

작은 세계수인 드루이드를 공격하는 데 일말의 거리낌도 없는 드라이어드. 그건 하얀 드라이어드에게도 해당되었다. 데이지에게 여봐란듯이 세워진 단도가 내 가슴을 노리고 들어왔다. 순간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게임 속에 있는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찔려 죽는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는데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익숙한 꽃향기가 내 바로 앞에서 풍겼다.

작고 붉은 정수리가 턱 바로 밑에 보였다. 내가 칼을 맞았어야 할 곳을 대신하여 데이지가 서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목을 파고든 칼날을 양손으로 쥐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데이지…. 내 대신 공격을 제 몸으로 맞은 데이지. 마치 그날처럼.

바닥을 푸른빛의 투명한 액체가 적시고 있었다. 양이 너무 많았다. 데이지의 몸에서 희미한 하얀 빛이 아우라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빛은 보석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안 돼, 또 한 번 그날의 악몽이 오버랩된다. 이렇게 또 데이지를 잃을 순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쉽네. 거름으로 쓰기엔 너무 치명상이야. 세계수로 가 버리겠네. 버틴다고 되겠어? 너 이미 목이 뚫렸는데.”

“잡힌 건…. 저뿐만이 아니에요….”

데이지가 색색 바람이 새 나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동시에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하얀 드라이어드가 휘청거렸다.

“너….”

그가 데이지를 공격할 때 사용했던 것처럼, 줄기에 묶인 데이지의 단도가 그의 등에 꽂혔다. 그에게서 푸른빛을 띠는 투명한 액체가 터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데이지는 등의 힘으로 강하게 날 밀어냈다.

내가 밀려나 벽에 부딪히자 데이지는 제 목을 뚫은 칼날을 붙잡는 것을 멈추고 하얀 드라이어드를 힘 있게 끌어안았다. 동시에 데이지가 뿜은 줄기가 그를 자신과 함께 꽁꽁 동여매었다.

드드득. 무언가 짓이기고 찢는 소리가 나며 하얀 드라이어드에게서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너, 이….”

데이지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다만 그를 끌어안고 있는 것에 온 힘을 다하고 있는지 끔찍한 파열음이 계속 이어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하얀 드라이어드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데이지의 줄기를 잘라 냈다. 그리곤 데이지의 멱살을 잡고 덜렁 들어 올렸다. 힘을 다한 것인지 속절없이 끌려 올라간 데이지는 이내 저 멀리 짐짝처럼 내던져졌다.

“데이지!”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데이지를 보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달려가려는데 하얀 놈에게 퍽 소리가 나도록 걷어차였다.

눈앞이 플래시가 터진 것처럼 반짝거렸다. 차에 정면으로 치인 줄 알았다. 거대한 잔해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는 드라이어드의 힘으로 직접 얻어맞는 것은 처음이었고 상상도 못 할 고통을 동반했다.

목에서 시큼한 맛이 올라왔다. 그와 대적하며 오뚝이처럼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났던 데이지와 달리 난 땅에 엎드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너무 아파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장비를 갖춰 입지 않은 상태였다면 한 큐에 즉사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최소 갈비뼈가 부러져 나갔을 거야.

“후… 개량종 따위가….”

간신히 달달 떨며 고개를 들어 하얀 놈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 등에 박힌 것을 힘을 주어 뽑아내곤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이 멀리 던져 버렸다. 텅텅 소리가 나며 데이지의 단도가 주인처럼 바닥을 굴렀다.

내가… 내가 시들링처럼 힘이 있었다면…. 저 드라이어드의 목을 따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데이지를 도와 뭐든 할 수 있었을 텐데….

쓰러진 데이지에게선 좀 전보다 더 눈부신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이가 죽어 열매로 돌아가던 때처럼. 말도 안 돼.

날 안심시켰던 데이지의 은은한 꽃향기도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빛을 좀먹는 어둠처럼 불쾌한 하얀 드라이어드의 꽃향기가 공간 가득히 잠식해 오며 영역 표시를 했다.

데이지에게 다가간 하얀 드라이어드는 거칠게 제 검을 회수하곤 날 향해 겨누었다. 단도에선 투명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비척비척 날 향해 걸어왔다.

“남의 드루이드는 쓸데가 없는데…. 거름으로도 못 쓰고.”

아주 천천히 날 피 말려 죽이려는 것처럼 발소리를 크게 냈다.

“애초에 여기에 드루이드가 왜 온 거야? 성능 테스트를 드루이드가 받진 않잖아? 응?”

“개새끼….”

하얀 데이지 드라이어드는 다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등 뒤로 피를 줄줄 흘리는 놈이 뭐가 그리 좋다고 웃고 지랄이야.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일 수 없는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다시 보니 연금탑 놈들은 아닌데. 침입자인가? 그렇다면 죽여도 상관없겠군.”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단숨에 내 머리를 뚫어 버릴 것처럼 단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상하게도… 좀 전과 달리 당장 내가 여기서 죽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긴장과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를 지켜 줄 드라이어드 하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고통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된 와중인데도 그런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 직감에 화답하듯 눈부신 금빛이 하얀 드라이어드의 너머에서 터져 나왔다. 분명 죽어갔던 데이지가 장비는 너덜너덜해도 상처 하나 없이 공중에 떠 있었다.

소리 없이 뛰어오른 그녀는 두 손으로 단도를 쥐어 높이 들고 하얀 드라이어드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항상 따뜻한 기운을 머금고 있던 데이지의 밤색 눈에 시리도록 차가운 살기가 서려 있었다. 일순 푸른 안광이 보인 것 같았다.

그는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몸을 돌리기도 전에 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퍽 깨지는 소리와 함께 철벅, 하고 얼굴에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뜨거운 액체가 끼얹어졌다. 정말 현실감 없는 온도였다.

방 안 가득히 진득하게 자기주장을 하던 불쾌한 꽃향기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벽에 떠올라 어스름을 걷어 내는 태양처럼, 사라질 뻔했던 그 향기가 짙어지며 날 안도시켰다.

“어떻게….”

머리 정중앙에 데이지의 단도가 꽂히고도 말을 하는 것이 신기했다. 괜히 왕이 아니라는 건가?

그냥 꽂힌 것도 아니었다. 하얀 놈의 어깨에 두 발을 딛고 올라타 온 힘을 다해 꽂아 넣은 것이었다. 그 모습이 끔찍해서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푹 숙인 시야로 걸음마를 막 뗀 애처럼 휘청거리는 하얀 드라이어드의 발이 보였다.

“분명 죽었….”

레드 데이지가 개량종이 되며 영혼에 새겨진 특별한 힘.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 번 더 피어날 기회를 주는 힘. ‘부활’이 발현된 것이었다. 이미 한 번 사용했지만 데이지2를 포레스트로 영입하며 추가로 얻은 기회.

열매 상태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살아난 점에 대해선 우리의 영혼의 연결 외에 이전과 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열매로 돌아가 내가 다시 싹을 틔워 내는 과정을 겪었다면, 단도를 머리에 꽂고 있는 것은 하얀 놈이 아니라 나였을 것이다.

게임에서 리타이어 된 캐릭터가 특수 스킬로 다시 부활해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시 살아난 데이지가 눈물 나게 반가워도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었다. 결국 또다시 데이지가 죽었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활이라는 특수한 힘 때문에 데이지가 방심한 그에게 결정타를 날릴 수 있었다.

“거름은 당신이 되어야겠어.”

항상 존댓말을 사용하는 데이지가 무뚝뚝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데이지의 그런 말투는 처음이라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감히….”

등에 큰 부상을 입고 머리에 치명타까지 입은 그는 마음처럼 움직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아이가 먹이를 낚은 맹금류의 발톱처럼 목을 움켜쥘 때도 벼락 맞은 나무처럼 달달 떨 뿐이었다.

데이지의 주위로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 꽃들이 피어나는 환상이 보였다. 곧이어 그물처럼 얼기설기 얽힌 금빛 뿌리의 형상이 하얀 데이지 드라이어드를 덮쳤다.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낚아채는 거미처럼 거침없고 난폭했다. 뿌리에 뒤덮인 그는 제 꽃잎처럼 하얀 빛무리에 휩싸였다. 그리곤 점점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녹아내린 사탕처럼 그가 사라져 버리자 텅, 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에 꽂혀 있던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물웅덩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단도만이 하얀 데이지 드라이어드의 존재를 대변하고 있었다. 정말 데이지는 그녀의 선언처럼 하얀 드라이어드를 거름으로 사용한 것 같았다.

드라이어드가 다른 드라이어드를 거름으로 사용하는 것도 처음 보았다. 마치 잡아먹는 듯한 느낌이었지.

데이지가 찬란한 금빛으로 휩싸였다. 상태 안 좋은 놈을 잘못 먹고 탈이라도 났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햇빛에 녹는 눈사람처럼 사라졌던 하얀 드라이어드와 달리, 데이지는 봄에 기지개를 켜는 식물처럼 크기가 커졌다.

늘 나보다 작았던 키가 자라나고 팔다리도 길쭉해졌다. 젖살처럼 통통한 볼이 남아 있어 어린 티가 나던 얼굴이 유려하게 변했다.

장비도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허리까지 오던 진녹색 재킷은 하얀 드라이어드의 것처럼 길어져 더욱 두꺼운 재질이 되었고 언밸런스하게 한쪽 어깨에만 짧은 케이프가 자리했다. 맨살이 드러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던 목도 버클이 달린 재킷 깃으로 턱끝까지 채워져 있었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붉은 단발과 따뜻함을 가득 품은 밤색 눈을 제외하곤 아이였던 데이지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얀 데이지 드라이어드를 해치우고 비로소 데이지가 성장한 것이었다. 늘 묘목이라 오해받던 그녀는 이제 어엿한 성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이 님.”

데이지는 이제 나를 드루이드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애틋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한달음에 달려와 날 끌어안았다. 죽다 살아났다고 믿기기 힘들 정도로 여상한 태도였다.

내내 일어날 엄두도 못 내던 난, 데이지의 부축을 받아 꼭 안겨 있었다. 그녀의 성장을 방방 뛰며 축하하고 싶었지만 숨만 쉬어도 고통으로 조여 오는 배에 겨우 허덕이고 있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더 빨리 해치우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게… 어떻게 네 잘못이야. 아무 도움도 못 된 내 잘못이지. 다음부턴 그렇게… 나 대신 죽고 그러지 마. 두 번이나 보는 건 너무 힘들다 야.”

좀 전에 심장이 몇 번이나 멈출 뻔했던지. 천국과 지옥을 수도 없이 오간 기분이다. 멘탈이 너덜너덜해졌다.

“네! 이제 기회를 다 썼으니 안 죽게 노력해 볼게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

“하지만 제게 기회가 없었어도 아까와 같은 상황이라면 주저 없이 똑같이 행동했을 거예요!”

데이지는 그렇게 말하며 더욱 더 힘껏 날 안아 왔다. 이대로 놓으면 내가 흩어져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숨을 쉬며 이젠 제법 넓어진 데이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성장 축하해.”라고 온 힘을 짜내 최대한 밝게 말했다. 그러자 데이지가 “이게 제 본 모습이에요!”라고 기쁘게 말했다.

완전히 자란 데이지는 멋있네. 이렇게 멋있는 꽃이 한때 아이의 모습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데이지와 함께 전투 승리의 여운을 잠깐 즐기고 있는데 난데없이 지진 소리와 함께 우리가 있는 방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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