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루스 드라이어드는 우리를 안내하며 이동하던 중 모노클을 살짝 잡고 날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나는 손목에 있는 아티팩트를 숨기기 위해 등 뒤로 손을 감췄다.
“수많은 개량종들을 봐 왔지만 그래도 역시 당신 같은 드라이어드는 처음입니다. 드라이어드의 힘은 굉장히 미약하게 느껴지고… 오히려 작은 세계수에 가까운 느낌이군요. 대체 어떤 종들이 섞인 건지 궁금해집니다.”
감이 예리하다고 해야 할지, 이제야 집어내는 걸 정말 허술하다고 해야 할지.
“뭐… 릴리니까… 백합이랑 이것저것 섞였어.”
릴리… 백합꽃 맞지…? 웨딩드레스 입고 싸우는 애니메이션에서 분명 백합 부케를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군요. 최대 12종까지 섞인 종도 보았으니 당신도 여러 종의 혼합으로 인해 정체성을 많이 상실해 힘이 미약해진 걸 수도 있겠습니다. 본랜 소수 종의 장점만을 결합해 최고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면, 요즘은 그냥 이것저것 전부 섞어 시도해 보는 역사로 기록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아주 소중한 보물을 대하는 눈빛으로 내 옆에 찰싹 붙어서 따라가는 바곳을 바라보았다.
“이 각시투구꽃 개량종이 소수의 장점들을 잘 결합해 태어난 아주 좋은 사례지요. 각시투구꽃이란 맹독초와 뿌리에 강한 독이 있는 백부자를 결합해 살상 능력을 올렸지요. 갈풀은 노멀 필드보다 점유율이 떨어지는 스왐프 필드의 종이지만 생명력도 강하고 번식력이 뛰어나서 수를 늘리는 데 유용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갈풀을 사용하는 것에 많은 연금술사들이 우려를 표했다고 합니다. 갈풀은 특별할 것 없는, 딱히 장점이 없는 종이라 여겨졌지요. 갈풀이 개입함으로써 각시투구꽃의 정체성이 약화될 것을 걱정했습니다. 아, 이쪽입니다.”
드라이어드 포트가 수없이 많이 쌓인 선반들의 통로가 끝나고 유리 벽으로 둘러싸여 외따로 마련된 방에 도달했다. 잠시 이야기를 멈춘 그는 유리문을 왼쪽으로 밀어 열면서 우리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주의 사항을 말했다.
“맹독초들이 따로 보관된 방입니다. 독에 대한 저항력이 없다면 주위의 식물이나 물건들을 건들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그의 말에 실수로라도 만지지 않게 손을 모았다. 창고를 방불케 했던 장소와 다르게 이곳은 실험실이 섞인 작은 온실을 보는 것 같았다. 유리 벽 안의 형형색색 식물들은 다른 보관종들처럼 드라이어드 포트에 담겨 있지 않고 온실 속 화초처럼 재배되고 있었다.
“어쨌든 갈풀을 이용한 각시투구꽃 개량종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자 이 이후에 갈풀과 같은 종들을 섞는 방법들이 재조명되었습니다. 이 각시투구꽃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인 셈이지요.”
짙은 남색의 매끈한 돌바닥이 나오고 음각으로 파인 기이한 문양을 따라 맑고 투명한 물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흐르고 있었다.
이 기이한 문양은 26번째 테라리움의 온실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문양이 끝나는 곳에 허리까지 오는 높이의 유리 벽이 울타리처럼 세워진, 반듯한 텃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 우리 바곳을 닮은 꽃들이 고개를 숙인 채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꽃은 네 포기. 텃밭의 반 이상이 텅 빈 것으로 보아 아마도 26번째 테라리움으로 보내기 위해 차출되었던 꽃들의 자리가 아닌가 싶었다.
“그나저나 드라이어드로 태어나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 각시투구꽃 개량종들에 세계수의 축복을 담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딱 한 번을 제외하고 성공한 역사가 없거든요.”
아주 자랑스럽다는 눈길로 바곳을 내려다보는 파피루스 드라이어드가 꼭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 같았다.
“한 번…?”
한 번 성공했단 건 바곳과 같은 드라이어드가 하나 더 있다는 거야?
“자자, 드라이어드 데이터 확인은 이쪽입니다.”
파피루스는 바곳에게 정신이 팔려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바곳을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원통으로 끌고 갔다. 내가 바곳을 따라가려고 하자 그는 손을 펴 나를 막았다.
“그쪽 순서는 다음입니다. 여기 각시투구꽃 개량종에 대한 데이터를 빨리 확인해 봐야 합니다.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지만 유구한 역사의 흐름에선 찰나에 불과하니 차분히 기다려 주십시오.”
유리 원통 옆에는 온실에서 보았던, 드라이어드의 정보를 읽어 주는 푸른빛 석판이 있었다. 파피루스는 늘 해 왔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바곳을 원통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문을 잠그는 걸쇠도 없고 딱히 가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바곳은 유리 벽에 작은 손바닥을 대고 언제든 뛰쳐나올 준비를 하며 날 올망졸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몸집은 훌쩍 자랐어도 내가 행여 두고 갈까 봐 걱정하는 몸짓이 아직 애 같았다.
“아아, 그나저나 당신이 ‘블랙’이면 역시 그걸 했겠죠? 굉장한 고통 아니었습니까? 아무리 영혼의 그릇을 키우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 하더라도 너무 잔인한 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건 인간들이 말하는 고문에 해당했어요.”
석판이 바곳의 정보를 읽을 동안 파피루스는 날 바라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고문…?”
“당신이 불량품이란 건 역시 그 단계에서 뭐가 잘못된 거겠죠? 행정 관리원 산하 전투 드라이어드로 키워지려면 어련히 좋은 품종만 골라 섞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모노클을 살짝 잡고 내 이곳저곳을 살피며 말했다. 고문이라니? 대체 무슨 잔인한 짓을 하기에 고문이라는 단어가 나와?
“저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상상도 하기 싫군요.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면 생생하게 모든 것을 보고 들어야 하는데, 그 방법에 대해서만큼은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검은 머리칼은 그 여파로 검게 타 버린 것이겠지요? 자부심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아름다운 꽃잎 색을 버리면서까지, 나비도 벌도 새도 꾀어내기 힘든 검은색을 택한 것은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난 높게 올려 묶은 내 머리를 만지며 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머리가 까만색인 건 태어날 때부터 이런 건데. 타 버렸다니? 설마 여기 연금탑은 식물들을 불에 태우는 고문이라도 하는 거야? 미친 거 아냐?
“음…. 난 그때 충격이 커서 기억이 없어.”
“아,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말이 그렇다는 건… 그건 정말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는 거겠지요. 충격으로 기억을 잃을 정도라니.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을 온몸으로 이겨 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긴 하죠.”
벼락… 이라고? 강제로 벼락을 맞는다니. 그건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왜 벼락을 맞아?
“내가 벼락을 맞았다고? 기억이 안 나서 그래. 왜 그런 걸 처맞고 그랬을까.”
“벼락을 맞고 이겨 낸 나무는 역사적으로도 상서로운 것이라 여겨지지 않습니까? 재해를 이겨 낸 행운과 고통을 견뎌 낸 인내, 세계수의 축복이 담길 만한 그릇임이 증명되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포레스트의 왕이 될 그릇도 되지요.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수많은 꽃과 나무가 이겨 내지 못하고 죽어 갔지만, 속까지 번개로 태워 쉽게 부러지지 않는 매우 강인한 드라이어드로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까? 행정 관리원님께서 계속 벼락 아래로 식물들을 내모시는 것은 다 그런 큰 듯을 위해서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행운의 상징이라 부적으로 사용하거나 매우 단단해서 도장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는데. 이걸 공장처럼 강제로 벼락을 내려서 양산하는 놈들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식물을 강한 드라이어드로 만들기 위해.
답도 없는 파필리온의 잔인성과 이 세계의 기상천외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당신의 꽃잎이 검게 타 버려 ‘블랙’이 되어 버렸지만 동종의 나무들에게 배척받을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 때가 되어 깨어나면, 당신이 벼락을 이겨 낸 ‘블랙’이라는 점만으로도 다들 우러러 바라볼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당신이 안타깝게도 불량품으로 판정받은 부분을 고쳐 낼 수 있는 방법도 개발되어 있을 것이니 먼 미래의 역사를 꿈꾸며 달콤한 잠에 빠지시면 됩니다.”
그는 “다들 기약 없이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곤 하지요.” 하고 덧붙이면서 이제 막 문구가 떠오르기 시작한 환하게 빛을 내는 석판을 바라보았다.
레포르마 각시투구꽃 (Reformar Alpine Monkshood) N.03
바곳의 이름이 ‘각시투구꽃 (근접)’에서 달라져 있었다. 레포르마? 무슨 뜻이지? 왜 바곳을 영입했을 때 내 핸드폰에 도착한 정보와 다른 걸까?
푸른빛은 천에 수를 놓는 바늘처럼 석판에 문구를 한 자 한 자 새겨 냈다.
레포르마 각시투구꽃 (Reformar Alpine Monkshood) N.03
칭호: 운명을 결정하는 자
꽃말: 반드시 빛나는 아침은 온다
자생지: 스왐프 필드 (★★★☆☆)
필드 발생 확률: low (★★★★★)
가치: 독, 약재 (★★★★★)
특성: 공격형(잠금) / 지원형, 회복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