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닝이 월렛이 없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우릴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는 수많은 까만 드라이어드들을 상대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녀와 파티를 맺을 수 없다면 바곳이 활개 칠 수 없기 때문에 패널티가 컸다. 전체 공격에 바곳만 한 광역기 딜러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파필리온이 장악한 필드인데, 아무리 어닝이 유능한 드루이드일지라도 그녀의 사정까지 봐주며 싸워야 한다는 불리함 때문에 가슴속에 불안감이 솟구쳤다.
막 드라이어드들끼리 부딪히려 할 때, 괴이한 함성과 함께 가시 돋친 몽둥이가 묵직하게 대치 상황의 중앙 지면을 갈랐다.
“메스키트 님! 본받아서 제가 전선에 서겠습니다!”
까맣게 탄 피부와 삐죽삐죽 솟은 하얀 머리칼. 그리고 메스키트의 광팬처럼 행동하는 드라이어드는 아주 익숙한 자였다.
그러고 보니 벨라돈나의 검은 장막이 연금탑 뒤편의 동산에서 시작됐지!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이 속속 도착하며 까만 드라이어드들을 견제했다.
저 무뚝뚝한 얼굴이 무척이나 반가워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닝의 말을 듣고 생명력을 과다하게 소모했으면 어쩌나 했는데 걱정과 다르게 아주 멀쩡해 보였다. 고렙에겐 그 정돈 아무것도 아니란 건가.
“너에겐 벅찬 상대니 뒤로 물러서도록.”
검을 빼든 시들링은 날 뒤로 물리며 파필리온을 경계했다. 보통 때 같으면 무시하지 말라고 소리쳤겠지만 대인전에서 고렙의 등장은 쌍수 들고 환영이었다.
파이팅! 잘해 봐라! 거기다 쟤는 투기장을 제패한 경력이 있잖아. 내가 아무 말 없이 있는 것이 오히려 시들링에겐 예상외였는지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넌 파필리온이 너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호하라고 내게 명령했다. 그걸 수행할 뿐이다.”
“누가 뭐래? 잘 지켜 줘! 전투야 위험하면 나도 거들기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이 말은 안 했다.
“벨라돈나와의 그래프트로 도와줘서 고마워. 다이아를 역대급으로 쏟아부은 엘더의 비와 비등하게 힘을 발휘하다니. 제법 힘을 써 준 것 같아서 감동받았어.”
바곳과 호감도를 키우기 위해 바지런히 칭찬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이 습관이 됐다. 도움 줘서 고마운 일엔 확실히 표현해야지! 내 말에 시들링이 꽤나 놀란 눈으로 진득하니 날 바라보았다. 뭐야, 감사와 칭찬을 처음 들어 보는 사람처럼.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리하겠다.”
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시 파필리온을 경계했다.
“시들링, 16번째 테라리움에서 갈 곳 없는 골칫덩어리 같은 널 얼마나 잘 대해 줬는데 이렇게 척을 지다니.”
“야! 말은 바로 해! 얘 다른 테라리움에서 못 데려가게 온갖 수작 부린 거 아냐?”
파필리온은 내 외침에 기분 나쁜 미소로 답했다. 내가 질색하며 물러나자 시들링이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덩치로 날 완전히 가려 앞에 섰다.
“당신 아이언비스트와도 아는 사이였어?”
아, 어닝은 내가 시들링과 함께 있는 걸 처음 보는구나. 그런데 어닝 같은 유명인도 알아보는 정도라니. 시들링 진짜 유명하구나. 새삼 다시 깨닫는다.
“거칠기로 유명한 저 길드 수배범이 확실히 당신 편이 맞아? 그마저 등 돌리면 우리에게 승산은 없어.”
그녀는 굉장히 우려하는 목소리로 날 추궁했다. 아, 걱정 마세여. 쟤 우리 길드예여.
“여기선 네 장기인 다중 영역 선포도 못 할 텐데 어떻게 날 상대하려고?”
파필리온의 손짓에 검은 꽃의 드라이어드들이 일제히 이쪽을 향해 무기를 세우고 달려들었다.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은 보스전을 함께 겪었을 때 보았던 것처럼 정연한 팀플레이를 보여 주었다. 그 팀에서 부족한 건 힐러의 존재였으므로 우리 예쁜 천재 힐러로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다.
다만 큰 전력이 되는 벨라돈나는 어닝을 의식해서인지 출전하지 못했다.
“당신이 여기 있으면 시들링이 드라이어드를 다 못 꺼내!”
어닝을 데리고 좀 멀리 떨어지려고 했는데 검은 꽃의 드라이어드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틈을 주지 않았다.
아씨, 끝이 없네 진짜. 드루이드 하나가 이렇게 많은 드라이어드를 데리고 있는 것이 가능해? 수십 그루의 드라이어드들이 파필리온 혼자의 영혼에 묶여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검은 엉겅퀴는 한 방 한 방이 산꼭대기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처럼 파괴력이 대단했다. 메스키트처럼 큰 방패를 사용하는 드라이어드도 있었고 검과 창, 총, 채찍, 와이어 등 온갖 무기를 사용하는 공격형 드라이어드 무리는 군대를 보는 것 같았다.
힐러 역할을 하는 드라이어드는 물론 아군의 사기를 증진시키는 버프 특화 지원형 드라이어드들도 보였다.
아무리 고렙인 시들링이라 하더라도 수세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벨라돈나라도 출전하면 좀 나아질 텐데.
“메스키트, 세계수 가지의 축복은 아직이야?”
메스키트는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과 전선에 뛰어들기보단 날 지키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공세에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아직이라고 답했다.
이쯤 되니 가슴이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세계수의 가지님! 님이 죽여 달라면서요!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빨리 히든 퀘스트 좀 띄워 주면 안 될까요?
물론 명색이 세계의 신인 세계수의 일부인데 축복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사라지면 더 이상하긴 하지.
하지만 우리 편은 도통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계속 밀리고 있고 이미 인페르노의 수장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테라리움에 도착했다는데 시간이 촉박했다. 이젠 세계수의 가지를 죽여야 한다는 찝찝함은 사라지고 빨리 리타이어 되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급작스럽게 난잡한 전장 속에서 이상한 기류가 느껴졌다.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우리를 공격하던 검은 꽃의 드라이어드들도 멈칫하고 심지어 시종일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우위를 점한 자의 여유를 부리던 파필리온도 티 나게 표정을 굳혔다.
엘더의 생명의 비로 잠재워 놓은 열기가 미친 듯이 들끓기 시작했다. 우리가 서 있는 동산이 용암 안에 천천히 잠겨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전에 왔을 때 느꼈던 한여름의 무더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열기가 잠식해 왔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수분기 하나 없는 텁텁한 더위가 온몸을 덮쳤다.
“와 씨… 이게 무슨….”
단순 열기를 뿜어내는 검은 나뭇가지만의 위력이라기엔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인내가 끝났군.”
파필리온이 눈을 가리며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아아… 안 돼….”
어닝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홀린 듯한 행동에 나도 모르게 절로 뒷걸음질 칠 정도였다.
등을 찌르는 검은 나뭇가지가 느껴졌다. 더 물러설 곳도 없었다.
“아직 내 꽃도 다 찾지 못하고…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엄청난 것이 온다.”
시들링이 파필리온을 상대할 때보다 더욱 경계를 하며 말했다. 그의 태도에 드라이어드들이 전투를 멈추고 시들링의 주위를 둘러싸며 방어 대형을 갖추었다.
뭐야, 뭔데? 분위기가 왜 이러는데? 설마…. 그 보스급 인페르노의 수장이 결국 여기로 행차하신다는 거야? 미친, 이거 진짜 큰일 난 거 아냐? 내 편의를 봐주겠다던 크레아시온의 장담은 여기서 보스를 맞닥뜨리면 전부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사고를 감당 가능한 스케일로 쳤어야지, 그대. 결국 인내심이 끊어진 우리의 주인이 손수 처형하러 오고 있잖아. 아, 그럼 나도 위험한데.”
파필리온이 한숨을 쉬며 날 바라보았다. 저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열기가 위력을 더해 가자 이건 인간의 범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절망적인 판단까지 들었다.
어닝이 걸어 다니는 화마라고 표현했던 것이 전혀 가감 없는 사실임을, 모습은 보이지도 않고 뿜어내는 기운만으로도 납득할 수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때였다.
“지금이에요!”
낯선 목소리가 내게 외쳤다. 뭐가 지금인데? 상황을 살필 새도 없이 뜨거운 것이 내 손목을 옭아맸다. 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홧홧한 열기가 손목을 괴롭혔다. 두꺼운 소매와 로브 자락이 감싸였기에 망정이지 맨살에 닿았으면 바로 화상을 입었을 정도였다.
날 붙든 것은 덩굴처럼 흐느적거리는 검은 나뭇가지였다. 그것이 노리는 것은 묶인 손에 들고 있는 내 핸드폰이었다.
“제이!”
내 비명에 놀란 메스키트가 단박에 날 끌어당겼다. 하지만 이에 지지 않고 검은 나뭇가지 역시 필사적으로 내 손목을 붙들어 당겼다.
“감히…!”
급기야 메스키트는 그것이 세계수의 가지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살내 버릴 것처럼 손을 들었다.
“메스키트, 잠깐만!”
그녀를 멈춰 세운 것은 줄기 끝의 모양이 꾸물꾸물 변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네모 납작한 그 모양은 영락없는 USB 케이블이었다.
USB 모양으로 변한 줄기는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다급하게 내 핸드폰의 충전 단자에 줄기 끝을 꽂아 넣었다.
미친, 좀 곱게 미리 알려 주면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니….
“웩.”
갑자기 심한 멀미를 겪는 것처럼 구토감이 밀려왔다. 머릿속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눈앞이 검게 변했다.
몸속에 커다란 바위가 가득 차는 듯했다. 여태 겪어 보지 못한 엄청난 중압감이 날 짓눌렀다. 거대한 기운이 한계치까지 내 몸속에 차올라 온몸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무너져 내리는 내 몸뚱이를 붙잡고 내 이름을 외치는 드라이어드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 안쪽이 화끈거리며 톡, 하고 비눗방울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 뜨거운 액체가 인중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내가 살면서 날밤을 연이어 새워도 코피 한 번 흘린 적 없는 건강한 몸이었는데….
28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에서 느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