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2에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유랑 점술단에게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테라리움 내부 구경은 머무는 동안 충분히 할 수 있으니 그들을 만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낯선 사람들이 몇이 내게 다가오자 말을 걸어서 멈춰 서야만 했다.
그들은 각각 작물 트리오에서 파견된 매니저 직책의 사람들이었다. 행정 관리원인 내가 테라리움으로 돌아왔기에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했다.
“이렇게 오래 부재중이신 행정 관리원은 처음이라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 제가 행정 관리원 직책보단 드루이드로서 여행을 조금 더 우선시해서…. 본의 아니게 죄송합니다. 하지만 용건이 있으시다면 여기 데이지 드라이어드에게 말씀 주시면 제게 바로 전달해 줄 거예요.”
“그렇다면 드라이어드와 소통이 가능한 드루이드를 대동하고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하긴 데이지2와 이야기를 하려면 드루이드가 필요하겠구나.
“먼 길을 와 주셔서 감사해요. 모쪼록 제 테라리움의 재건을 잘 부탁드립니다.”
“보수는 두둑이 받고 있으니 오히려 이쪽이 일자리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다만….”
그레이트 빈 연합의 명찰을 달고 있는 사람이 말끝을 흐리다 조심히 말을 이었다.
“큰 화재를 겪은 테라리움인지라 문제가 좀 있습니다. 얼마나 큰 화재를 겪었는지 테라리움 아래의 수맥이 말라 버려서 어지간해선 찾기가 힘듭니다. 더욱 깊숙한 곳을 뒤져 봐야 하는데 무작정 땅을 다 뒤엎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고용된 사람 중엔 드루이드들도 제법 있지만 수맥을 찾는 데 용이한 드라이어드들이 없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앗… 내 테라리움에 물이 없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에 머릿속이 띵 울렸다.
“식수는 황금 호박 상회에서 조달해 오는 걸 쓸 수 있지만 딱 식수로만 쓸 수 있는 양입니다. 그 밖에 물이 필요한 부분들, 예를 들면 당장 사람들이 씻을 때나 더러워진 자재들을 씻어 낼 때 쓸 물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외부의 냇가에서 물을 길어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인력도 낭비되고 있어서 테라리움 내에 물길을 트는 것이 시급해 보입니다.”
“테라리움 곳곳에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서나 볼 수 있는 수액 분수가 터져 나오는 것은 보았습니다만…. 아시다시피 그 물은 드라이어드들이나 사용할 수 있는 물이지요.”
세 명의 매니저는 서로의 말에 동조하며 내게 현재 테라리움 내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고 보니 16번째 테라리움에서 노토스의 소나무들이 수맥을 찾지 않았어요? 혹시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길드원들에게 16번째 테라리움을 뜨겁게 만들기 위해 지하수와 검은 나뭇가지를 연결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그들은 내 부탁을 성공적으로 완수해 주었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그 방법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리스는 내 눈치를 보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때 소나무 드라이어드들의 주인인 노토스가 이리스 대신 무거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이 님. 제 소나무들은 돕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주변에… 그런 드라이어드들이 즐비하면… 더구나 주인을 공격한 이력이 있기 때문에 소나무들은 부름에 응답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이 위기 상황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 때문에 소나무들이 소환을 거부한다고? 노토스가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을 ‘그런’ 드라이어드들이라고 표현한 신중함에 뜨끔했다.
16번째 테라리움의 일을 모르는 외부인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대놓고 인공 개량이란 단어를 언급할 뻔했다.
검은색을 털어 낸 드라이어드들은 일반 드라이어드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제3자가 보기엔 저 드라이어드들이 1번째 테라리움에서 눈에 불을 켜고 폐기하려 드는 연구물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제이 님… 전에 제가 말씀드렸죠.”
이리스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헤르마의 월계수와 더불어 노토스의 소나무들은 무척이나 고지식해서 제이 님의 바곳이 필드에 있을 경우, 그 드라이어드들은 필드에 나오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고…. 더구나 바곳과 같은 드라이어드들이 사방에 있으니 아무리 노토스가 명령해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무리해서 그들을 불러냈다간 호감도가 낮아질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주인들이 28번째 테라리움에 머무는 한 그들의 얼굴을 보는 건 어렵겠구나. 그럼 우리 테라리움은 어떡하지? 물 부족 테라리움이 되는 거야?
어쩐지 주변의 불의 영향이 강해 물이 비싼 편이었다는 26번째 테라리움이 떠올랐다. 당장 필요한데 외부에서 적절한 인력을 찾아 데려오려면 또 얼마나 걸릴까?
“그… 행정 관리원님도 별다른 수가 없으시다면 곤란하군요. 아시다시피 이렇게 불이 들끓는 곳에선 물과 관련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과 드라이어드가 무척이나 귀하지 않습니까? 이미 불려 다니는 곳도 많아서 당장 찾는 것도 시일이 걸릴 것 같은데.”
역시나 오래 걸리는구나. 소나무 드라이어드는 알기론 노멀 등급이라 찾고자 하면 찾을 수 있는 드라이어드이긴 하다. 하지만 노토스처럼 아티팩트에 소나무 한 종만 두고 연리지까지 발휘해 가며 20년의 땅의 기억을 읽는 수준의 히든 스킬을 발휘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하지.
“내 주인, 제이. 굳이 도움을 받지 않아도 이 일은 제이가 혼자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맞아. 왜 굳이 다른 드라이어드의 도움을 받으려는 거야? 더 강하고 확실한 존재를 네가 다룰 수 있잖아.”
잠자코 있던 메스키트와 엘더가 불쑥 이야기했다. 응? 내가 수맥을 찾을 수 있다고? 제가요?
“만물의 땅을 관리하는 위대한 세계수가 물길 하나 못 찾겠어? 세계수 가지를 이용해서 뚫어 달라고 해 봐.”
세계수가 내 친구니? 급할 때 전화해서 도와 달라고 하게. 그래도 뭘 뜻하는지는 알겠다. 가드닝 스킬을 이용해 보라는 거겠지.
16번째 테라리움에선 과수원에서 뛰쳐나온 세계수 가지를 조종해 보았지만 여기는 어떨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불의 피해로 과수원 건물이 튼튼하지 않은데 혹시라도 무너져 내리면 어떡하지?
나무줄기 문신이 자리한 왼팔을 들었다. 황금빛 문양이 떠오르며 느리게 회전했다. 그리고 내 팔을 향해 느껴지는 시선들의 명백한 차이를 느꼈다.
아무런 반응 없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과 신기하고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는 드라이어드들. 심지어 주위에 자리하고 있던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도 일제히 내게 시선을 주었다.
“혹시… 시들링, 내 팔에 이거 보여? 금빛으로 빛나는 거.”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에게 문양이 찬찬히 회전하고 있는 팔을 들어 보였다. 시들링은 무뚝뚝한 얼굴로 금빛은 보이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데이지, 넌 보이니?”
내 말에 데이지들이 동시에 답했다. 하긴, 둘 다 데이지였지.
“네, 제이 님! 무척 아름다운 세계수 가지의 모습이에요.”
“드루이드님, 마치 전 행정 관리원님께서 제게 능력을 사용하셨을 때 보였던 모습과 닮아 보입니다. 설마 그분과 같은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신 건가요? 제 드루이드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구나. 내 팔과 핸드폰에 자리한 나무줄기 문양은 드라이어드들에게만 보이는 것이었구나. 마법사처럼 반짝거리고 화려한 이펙트의 스킬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남들 눈엔 팔만 휘적거리는 걸로 보이겠네. 이거 좀 쪽팔린 건 아니겠지?
그러나 28번째 테라리움의 세계수 가지를 향해 의지를 전달하자마자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는 엄청난 변화가 생겨났다. 한순간 터져 나온 환한 빛에 다들 눈을 질끈 감은 것을 보면 분명했다.
땅이 가볍게 진동했다. 다 소화하지 못한 다이아가 몸에서 터져 나올 만큼 양껏 먹고 있는데 밥값 좀 해 주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테라리움에 분수 터져 나오는 만큼만 물이 솟아오르면….
콰르르!
“더도 말고라고 했잖아! 악! 물 샌다!”
사방에서 지반을 뚫고 백옥처럼 새하얗고 신성한 가지가 큰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동시에 우렁찬 굉음과 함께 가는 물줄기가 튀어 오르더니 곧이어 가지 주변을 흙탕물이 메우기 시작했다.
탁한 흙탕물 위로 금빛이 일렁거렸다. 꼭 칭찬해 달라는 것처럼 가지에서 나는 금빛이 번쩍번쩍 점멸했다. 주변을 물바다로 만들어 놓고!
갑작스러운 소란에 모든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대피하기에 바빴다.
“모두 침착하세요! 일단 흐르는 물을 가두는 작업을 먼저 진행하십시오!”
곁에 서 있던 매니저들이 인부들을 향해 뛰쳐나갔다. 멀리까지 시끌벅적한 것을 보니 당장 보이는 곳 외에도 물구멍을 뚫어 놓은 곳이 한둘이 아닌 듯했다.
“봐, 네가 혼자 처리할 수 있다고 했잖아.”
엘더가 시큰둥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걸 내가 해냈다고 해야 할지 사고를 쳤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흙을 가득 담은 포대들이 차곡차곡 물이 터져 나오는 곳 주변에 쌓이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지나 흙먼지가 가라앉으면 윗물부터 퍼다 쓸 수 있겠다며 그레이트 빈 연합의 매니저가 경과보고 후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잘됐으니까… 됐지, 뭐.
일을 끝낸 가지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팔을 맴돌던 황금빛 문양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제퍼가 날 바라보며 경박하게 손뼉을 쳤다.
“이야, 역시 마스터! 가이아 길드의 마스터! 세계수의 가지를 지배하는 자! 테라리움을 뒤집어 놓으셨네요.”
순수하게 날 추켜세우는 것 같은데 묘하게 거슬렸다.
“어, 드루이드님. 저 사람들입니다. 유랑 점술단.”
데이지2가 보랏빛 로브를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내가 일으킨 소란에 내 위치가 저들에게 알려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찾아가는 수고 없이 손수 날 찾아온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