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팩트를 통해 작게 봤을 때와 다르게 가까이서 보니 그들은 하나같이 더욱 신비하게 보였다.
곤충의 날개처럼 얇은 실크 재질의 천을 여러 겹 겹쳐 만든 하늘하늘한 보랏빛 로브에 심플한 둥근 꽃문양이 은실로 작게 여기저기 수놓아져 있었다.
걸을 때마다 주변에 은빛 별이 뜬 보랏빛 밤의 장막이 하늘하늘 녹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검붉은 실을 여러 가닥 꼬아 만든 허리띠에 저마다 푸른색의 각진 보석들이 엮인 장식을 매달고 있었다.
그중 작은 체구의 여성이 앞으로 나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작지만 큰 힘을 품은 세계수님. 만나서 반가워요. 저흰 테라리움 각지를 떠돌며 크고 작은 운명을 점치는 유랑 점술단입니다.”
하얀 머리가 군데군데 섞인 윤기 나는 흑발이 허리까지 굽이치고 있었다. 잔잔하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마치 ASMR처럼 다가왔다. 내가 여태 들은 목소리 중 당연 으뜸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웠다.
이 세계에도 라디오 콘텐츠가 있다면 구독자를 100만 명은 거뜬히 모을 수 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목소리에 넋 놓고 감탄한 나머지 반응이 조금 늦었다.
“어… 안녕하세요. 데이지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요. 저를 꼭 만나고 싶어 하셨다고…. 아, 혹시 작은 세계수라고 부르는 건… 드라이어드인가요?”
“후후, 아뇨. 저는 작은 세계수님과 마찬가지로 드루이드입니다. 하지만 당신과 같이 진실로 작은 세계수라고 불릴 수 있는 드루이드는 아니랍니다. 그저 운명처럼 세계수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을 뿐, 그 이상은 아니지요.”
목소리가 마치 작게 허밍하여 부르는 자장가처럼 리듬 쳤다.
“세계수의 28번째 테라리움에 꼭 방문을 해야 한다는 강한 운명의 이끌림이 있었어요. 그 중심에 작은 세계수님이 계셨기에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이끌림이요?”
타로 카드 정도는 재미로 보는 걸 좋아하지만 하도 길거리에서 사이비에 많이 당해서인지 대놓고 운명이라고 하니 살짝 미심쩍었다. 드라이어드도 있고 마법도 있는 세상이니 이들이 보는 점술도 마냥 허구적인 건 아닐 텐데.
“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자리를 옮길까요? 그런데 테라리움에 마땅히 앉아서 이야기할 만한 곳이….”
그나마 상태가 나았던 과수원도 집무실을 제외하곤 폐가나 다름없을 터였다.
“그럼 저희가 임시로 묵고 있는 천막으로 가시는 게 어떠세요? 저흰 세상 곳곳을 유랑하며 노점상을 열기 때문에 언제든지 설치할 수 있는 천막을 마차에 싣고 다닌답니다.”
아티팩트를 통해서 봤던, 그들의 로브와 같은 색의 거대한 천막을 실은 마차가 떠올랐다. 처음 보자마자 서커스단을 떠올렸었지. 안내를 받아 이동하고 있는데 답지 않게 조용하다 싶었던 이리스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아! 기억났어요. 자신들을 ‘폴리움텔러’라고 부르는, 드루이드들 사이에서 유명한 유랑 점술단이 있다는 이야기요. 미래를 엄청 잘 점지한대요. 그래서 다들 정말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 무슨 짓을 해서라도 폴리움텔러를 찾으러 다닌다고 해요. 절대 한곳에 오래 정착하는 법이 없고 예정된 이동 경로가 없어서 운이 좋아야 겨우 만날 수 있다고 하던데….”
“난 진작 기억은 났는데 그 단어가 기억이 안 났어. 폴리움텔러, 꽃잎을 읽는 사람들이랬던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이리스 말 그대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만나고 싶어 하는데… 마스터님께는 저 사람들이 직접 찾아왔네요?”
제퍼가 이리스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둘의 이야기에 앞서가던 사람들이 작게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 그리고 더 있어요. 아무나 점을 안 봐 준대요. 한 번 점을 봐 주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에겐 수천의 다이아를 바쳐도 절대 봐 주지 않는다고 했어요.”
“오오….”
하지만 수억의 다이아를 바친다면 어떨까? 물론 점 한 번 보자고 그런 미친 짓을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다이아 앞에 흔들렸던 사람을 봤기에 엄청난 다이아를 대가로 준다 해도 정말 봐주지 않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유랑 점술단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공터엔 거대한 보라색 천막이 자리하고 있었다. 활짝 열린 입구로 단촐한 식탁과 등받이가 없는 의자 여러 개가 보였다.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들어가기엔 비좁아서 드라이어드들과 점술단의 사람 몇 명은 밖에 남기로 했다.
“오면서 들어서 아시겠지만 저흰 유랑 점술단이면서 폴리움텔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은 플로라입니다. 폴리움텔러를 최초로 창설한 분의 이름이죠. 대대로 점술단의 리더가 옛 이름을 지우고 그 이름을 받아서 사용한답니다.”
“음, 저는 제이예요. 아시다시피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며 저 사람들은 제 테라리움 소속 길드원들이에요.”
“제이 님이셨군요. 작은 세계수님의 영혼과 어딘가 살짝 맞지 않는 이름처럼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아주 이질적인 이름은 아니네요. 혹시 제이 님께서도 본명을 버리고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계신 건가요?”
플로라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난 이 세계로 넘어오며 본명 공제희를 버리고 게임에서 자주 사용하는 닉네임인 제이를 본명처럼 사용했다.
닉네임스러운 이름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내 이름 역시 잘 융화되었기에 이상함을 눈치채는 사람은 여태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님 닉변(닉네임 변경) 하신 거 아닌가요?’ 묻는 사람이라니. 용하다, 용해!
다들 플로라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을 기다리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닉변 내역을 깔 수도 없고.
“어, 제이 맞아요.”
‘이’와 ‘희’ 그 중간의 발음을 흐려 말하며 답했다. 그냥 양심에 조금 찔렸다. 플로라는 내 답에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나 점을 봐 주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여기까지 와서 절 찾으신 거면… 제 점을 봐 주시려는 건가요?”
“꼭 제이 님의 점을 보기 위해 온 것은 아니랍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기꺼이 봐 드리고 싶네요. 혹시 궁금한 미래가 있으신가요?”
미래를 엄청 잘 점지한다고 했지. 그럼 물어보는 족족 맞힌다는 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이 세계에 핸드폰 하나만 들고 덜렁 떨어진 나는 온갖 미래가 궁금한 것투성이었다.
“음, 그것보다 저는 점을 봐 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어떤 기준으로 저는 되고 어떤 사람들은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뭘 물어볼 줄 아시고….”
“저흰 사람을 가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물어보고자 하는 미래를 가린답니다. 결코 말할 수 없는, 말해선 안 되는 미래도 존재하기 마련이에요. 그건 선대 플로라부터 이어져 온 관습이랍니다. 여기 테라리움을 통째로 준다고 해도 절대 말할 수 없답니다.”
플로라가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헉, 테라리움을 줘도 안 말해 준다고?
“정말 궁금하시다면 시험해 보시겠어요? 저에게 소리 내어 질문하실 필요 없이 머릿속으로 묻고 싶은 미래를 떠올려 보세요. ‘예, 아니요’로 이분법적인 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어야 한답니다.”
“정말 그래도 돼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그냥 점을 보고 말해 주신다고요? 와… 완전 신기해.”
감탄하는 내 뒤로 이리스와 제퍼가 자신들도 점을 봐 보고 싶다며 아우성이었다.
뭘 물어볼까? 음… 혹시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때 플로라의 뒤에 시립한 키가 큰 자가 성큼 그녀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자가 허리를 숙이자 푹 씌워진 후드 밖으로 선명한 금발이 힐끔 모습을 보였다. 작은 구슬들이 차르르, 하고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기다란 로브의 소매에서 가늘고 긴 검지가 툭 튀어나왔다. 검지는 후드 안의 굳게 다문 입술 위치로 자리했다.
“그렇구나. 안타깝게도 지금 제이 님이 원하시는 점은 봐 드릴 수 없습니다.”
당장 내 앞으로의 운명에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수 있다는 걸까? 없다는 걸까?
“아쉽네요. 그런데 모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대체 어떤 원리인가요?”
“혹시 다른 미래에 대한 질문도 떠올려 보시겠어요?”
음, 이번엔 뭘 물어보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가야 하는데 50번 이상의 테라리움을 가야 하는 걸까?
이번엔 플로라의 뒤에 선 사람 중 키가 가장 큰 자가 그녀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앞서 나선 자와 다르게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건 답해 드릴 수 있는 질문이네요. 자, 이제 후드를 벗어 보련? 작은 세계수님께서 너희들의 정체를 궁금해하시는 것 같구나.”
플로라의 말에 양옆의 둘이 각자 후드를 벗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장식된 꽃, 특이한 의상이라면… 설마 둘 다 드라이어드?
오른쪽에 선 키가 상대적으로 작은 자는 샛노란 금발이 볼을 가볍게 감싸는 보브 컷의 남자였다. 머리 위엔 봉오리가 필락 말락 한 노랗고 작은 꽃들이 머리를 두르는 주홍색 망사 천에 싸여 한데 뭉쳐 족두리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쌀알만 한 금붙이가 알알이 매달린 금줄을 여러 줄 나란히 늘어뜨려 둔 문발처럼 생긴 기묘한 마스크를 콧대까지 써 입을 가리고 있었다. 금줄은 작은 움직임에도 차르르, 하는 소리를 내었다.
“이쪽은 금난초의 꽃잎을 가진 드라이어드.”
왼쪽에 선 키가 아주 큰 자는 라임색에 끝으로 갈수록 붉은 빛을 내는 투톤의 곱슬머리를 한 남자였다. 마치 졸린 것처럼 반쯤 감긴 눈이 인상적이었다. 알알이 열매 같은 꽃이 넥타이 중앙에 한가득 장식되어 있었다.
“이쪽은 느티나무의 꽃잎을 가진 드라이어드입니다. 둘 다 선대 플로라가 고안한 폴리움텔러가 꼭 갖춰야 할 부케의 조건에 해당하는 꽃들이에요. 금난초는 꽃말의 힘을 사용해서 말해선 안 되는 미래에 대해 느낄 때 제게 주의와 경고를 해 준답니다. 반대로 느티나무는 꽃말의 힘을 사용해 질문자와 저 사이의 미래에 대한 운명을 느낄 수 있어요. 금난초의 꽃잎이 나선다면 폴리움텔러는 그 어떤 질문에도 절대 답해 드릴 수 없답니다.”
“오… 신기하네요. 그렇다면 제 방금 질문에 느티나무가 나섰으니 답을 들을 수 있는 거죠?”
“네, 한번 그 미래에 대한 질문에 답을 드려 볼까요?”
플로라의 뒤에 시립한 마지막 사람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후드 안으로 새하얀 백발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