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79/604)

열매 개화는 정말 오랜만이지. 조금 긴장되는 마음으로 열매로 손을 가져갔다.

비록 내가 여러 개의 열매 중 고심해서 뽑은 것도 아니고 마치 보상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마련된 열매이긴 했지만. 나도 피하면 어떡하지? 내게 온다면 정말 잘해 줄 텐데.

손끝에 염원을 담아 쓰러진 열매를 바로 세워 주었다. 열매가 파르르 떨렸다. 부정의 느낌이 아니었다. 잔잔하던 심장이 세차게 뛰고 따뜻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손끝으로 몰린 기운이 노크하듯 열매에 닿았다. 새싹이 한 번 잎을 흔드는 것에 순간 내게 손 인사를 하는 줄 알았다.

환한 빛이 온실을 가득 채웠다. 온몸을 차분하게 만드는 그윽하고 은은한 향기가 빠르지 않게 공간 속에 녹아들었다. 따뜻한 증기를 타고 향긋한 내음이 퍼지는 꽃차를 앞에 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와… 세상에.”

“개화 장면은 언제 봐도 아름다워.”

“결국… 마거리트의 선택은….”

환한 빛무리에 감싸인 새싹이 튼 열매는 허공에 붕 떠올랐고 점차 크기를 키웠다. 플로라에게서 보았던 한겨울에 내리는 눈과 같은 하얀 꽃비가 내 주위를 흩날렸다.

머리 위로 자꾸만 쌓여 가는 꽃잎에 꼭 내가 왕관을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머리를 흔들어 털어 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커져 가던 빛은 인간 형태가 되자 점차 옅어졌다. 그 안에서 화사한 모습의 여성형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전투에 직접 나서지 않는 회복형인 엘더에 버금가는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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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지색에 가까운 백발은 끝으로 갈수록 살구색을 띠었는데, 양 갈래로 땋아 내리고 군데군데 하얀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넓은 챙이 물결치는 하얀 플로피 해트(floppy hat)에 장식된 살구색 리본에는 계란을 닮은 작은 꽃들이 한가득 엮여 있었다. 꼭 나들이를 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상의는 턱 끝에 닿는 목 칼라 부분과 손등에 닿는 소매 부분 모두 꽃 모양이 새겨진 레이스로 감싸여 화려했고, 하얀색의 풍성한 스커트 위에는 녹색 뼈대가 얼기설기 얽힌 드레스를 입었다. 종아리까지 오는 드레스의 끝자락에는 꽃잎을 닮은 하얀 천이 겹겹이 달려 있었다.

토톡, 하고 가벼운 착지 음을 내는 굽이 낮은 단화의 코마저도 하얀 꽃으로 장식된, 온몸으로 자신이 어떤 꽃의 드라이어드인지 주장하고 있는 그 어떤 드라이어드들보다 독특한 드라이어드였다.

무척이나 발랄하고 통통 튀는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터져 나왔다.

“하하핫. 그런 얼빠진 얼굴을 하면 서운하잖아. 이렇게 사랑스러운 나를 다른 드루이드에게 보낼 생각이었어? 내 드루이드는 너무해. 내가 나의 ‘진리’에게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세계수를 괴롭혔는데. 너무 만나고 싶었어. 내가 정한 나의 ‘진리’.”

꽃향기가 진하게 콧속을 파고든다고 느꼈을 때,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마거리트가 날 힘 있게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그리곤 플로라의 마거리트가 그러했듯이 제 손안에 하얀 꽃잎을 가득 만들어 내더니 내 머리 위로 세례를 내리는 것처럼 쏟아 냈다.

텐션이 상당히 높은 드라이어드였다. 여태 보았던 드라이어드들 중 제퍼의 도깨비바늘에 버금가는 정도라고 생각됐다.

“일부러 내게 왔다고? 그래서 플로라의 손길을 피한 거야?”

마거리트는 내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이런 드라이어드가 다 있지? 아니 애초에 세계수 안에서 자신이 태어날 곳을 지정해서 오는 드라이어드도 있어? 더구나 세계수를 괴롭혔다니. 이 드라이어드는 진짜 정체가 뭘까? 정말 예사롭지 않은 꽃이다.

날 미리 알고 있는 데다 처음 만나자마자 스스럼없이 대할 정도면… 역시 세계수 안의 모든 드라이어드가 내 영혼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그 효과와 관련이 있겠지?

이 정도면 난 앞으로 개화시킬 드라이어드들에 대해 어느 정도 호감도 버프를 받고 시작하는 거 아냐? 첫 만남이 결코 좋지 않았던 엘더 개화 때를 떠올리니 정말 감개무량했다.

“설마 했는데 쟤가 올 줄이야.”

들으란 듯이 불쾌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등을 돌리니 엘더가 한 손으로 눈 주위를 꾹꾹 누른 채 굉장히 피곤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푼수랑 앞으로 같이 다녀야 한다면 나 시들어 죽을 거야.”

엘더가 내게 다가와 긴 팔로 한 번에 내 어깨를 끌어안고 마거리트와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 짐짓 어리광이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둘이 아는 사이니? 네가 시들어 죽는다니? 네 미모가 시들면 이건 범세계적인 손실이란다.

“세계수를 대체 얼마나 들들 볶은 거야? 진짜 오랜만에 봤어도 대책 없는 성격은 여전하네.”

“네 싹수 노란 성격도 여전하구나. 운도 좋지. 어떻게 내 진리와 그렇게 일찍 단번에 만난 거야? 행운의 부적이라더니, 네 평생의 행운을 내 진리와 영혼을 연결하는 데 다 썼을 거야. 넌 이제 꽃향기만 무성한 쓸모없는 꽃이야. 그러니 내 진리를 놓아줘!”

“나처럼 유능한 드라이어드 보고 쓸모없다니? 너야말로 꽃잎만 뜯을 줄 알면서.”

억 소리가 나도록 묵직한 힘이 내 허리에 와 닿았다. 척추부터 끌어당겨지는 기분이었다. 내 허리를 끌어안은 마거리트와 어깨를 끌어안은 엘더 간의 힘 싸움이 벌어졌다. 각기 다른 섞이기 힘든 두 꽃의 향이 멀미가 날 정도로 내 콧속을 괴롭혔다.

“그만.”

짧지만 강력한 어조가 담긴 목소리가 두 향기를 갈라내듯 내려앉았다. 메스키트의 목소리에 두 드라이어드는 어영부영 내게서 떨어졌다.

“행동이 과한 것은 여전하구나. 아직 세상에 나오는 건 이르다 생각하는데 어째서 세계수가 내 주인에게 기꺼이 널 보냈는지 그 판단이 믿기지 않는구나.”

“저 다 컸어요. 저도 이제 어엿한 성목이에요.”

마거리트는 날 대할 때와는 다르게 무척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로 메스키트를 대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엘더가 마거리트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듯 메스키트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메스키트도 알고 있네. 설마 엘더처럼 마거리트도 업어 키웠어?”

“역시 나의 진리. 어떻게 알았어? 내 진리도 나처럼 비밀을 밝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너무 능력이 많아도 안 돼. 모든 드라이어드가 내 진리를 탐할 거야. 앞으론 나만을 위한 작은 세계수가 되어 줘.”

아, 진짜? 메스키트가 세계수에서 엘더를 비롯한 어린 묘목들을 직접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마거리트가 그중 하나일 줄이야. 인연도 이런 인연이 없었다.

비록 영혼의 연결이 끊겨 어쩔 수 없이 어린 모습을 하고 있던 내 데이지보다도 더욱 어리게 느껴지는 마거리트였다. 키는 꽃나무 드라이어드들보단 작았지만 지금의 데이지와 비교하면 훨씬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영혼의 연결을 끊어 버려. 쟨 진짜 피곤한 꽃이야. 세계수도 착오가 있었을 거야. 멋대로 뛰쳐나온 저 녀석을 찾고 있을 수도 있으니 빨리 세계수의 품으로 보내버리자. 정 안 되겠으면 저 꽃을 원하는 저 드루이드에게 줘 버려.”

아무리 나를 더 우선시한다 하더라도 신적 존재와 다름없는 세계수에게 착오가 있을 거라 대하는 엘더의 태도는 참 할 말이 없게 만든다.

보통 드라이어드가 죽을 때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마거리트를 보고, 물론 뜻이야 조금 다를 테지만 그렇게 여과 없이 말해 버리다니. 둘이 어지간히 앙숙이구나 싶었다.

“나의 진리. 내게 그래선 안 돼. 내 진리를 위해선 정말 열심히 할 수 있어. 날 다른 곳에 보내지마. 내가 정말 잘할게. 노력할게.”

엘더의 말을 따라 정말 내가 영혼의 연결을 끊을까 봐 마거리트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내게 들러붙었다. 물론 끊을 생각은 없지만 엘더와 이렇게 사이가 나빠선 앞으로의 일이 너무 걱정되는데.

자신이 데려갈 거라 강한 의지를 보이던 플로라는 이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져 그녀를 바라보니, 자신의 마거리트 드라이어드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그녀는 마거리트와 이야기를 멈추고 내게 말을 걸었다.

“제이 님, 역시 그 꽃잎은 저와 인연이 아닌 드라이어드였던 것 같습니다. 다만 제 마거리트의 꽃잎을 가진 드라이어드가 말하길… 정말 갓 성목이 된 지 얼마 안 된 꽃으로 보여 예언의 힘이 가다듬어지지 않았으니 섣불리 그녀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음… 예언이 단순히 맞고 틀린 것을 떠나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건가요?”

같은 종의 꽃이지만 닮은 듯 전혀 다른 두 마거리트 드라이어드가 각기 다른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염려가 가득 담긴 플로라의 마거리트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의 마거리트.

“전 폴리움텔러로서 제 마거리트 꽃잎을 단순히 사람들의 미래를 읽는 점지로만 사용하지만 제이 님은 전투에도 그 드라이어드를 출전시키실 거죠?”

벌써부터 단일 지원형 드라이어드의 전투 활약이 기대되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스의 지원형 드라이어드인 란타나의 7과 관련된 능력과 노토스의 지원형 드라이어드인 소나무들의 생명 연장 기술을 보면 단순 버프와 다르게 다들 아주 특별한 능력을 전투에서 발휘했다. 마거리트가 전투에서 사용하는 예언과 관련된 기술이 뭘까?

“마거리트의 꽃잎은 전투에서 예언을 통해 랜덤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예언의 정확성에 따라 양날의 칼이 되는 능력이죠. 만약 예언이 실패한다면 예언한 능력과는 반대되는 힘을 받게 될 거예요. 힘이 강한 마거리트는 예언의 정확도를 높이는 것도 있지만 예언의 반작용의 힘을 무효화할 수 있기도 해요.”

플로라가 우려가 담긴 목소리로 내게 마거리트의 능력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반대로 힘이 약하다면 예언의 반작용을 고스란히 전부 맞는다는 말이랍니다. 그저 꽝으로 끝나면 다행일 힘이 부케를 향해 부정적인 효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섣불리 마거리트의 힘을 전투에서 사용해선 안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넌 대체 무슨 힘을 사용하는 거니?”

“내 진리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어!”

“어? 아니 잠깐만!

플로라의 설명이 너무 위험하게 느껴져서 물은 것이지만 내 마거리트는 이를 달리 해석한 것 같았다. 그녀는 허공에 손을 들자 꽃잎이 휘몰아치면서 두꺼운 책이 나타났다. 금장을 두른 하얀 하드 커버의 책이 주르르 펼쳐지더니 랜덤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당장 엘더 플라워의 회복 능력은 2배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게 될 거야.”

“야!”

화가 난 엘더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능력은 발현되었다. 책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엘더의 주위를 감쌌다. 이내 플로라가 자신의 마거리트와 그래프트를 펼쳤을 때처럼, 엘더의 주위로 모서리가 둥근 하얀 카드들이 여러 장 꽃잎처럼 펼쳐졌다.

카드들이 한 장만 남기고 전부 사라졌을 때, 별안간 그 한 장이 까맣게 재가 되어 으스러졌다. 동시에 엘더의 주변에 먼지 뭉치 같은 재 가루가 둥둥 떠다녔다.

누가 봐도 능력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너 일부러 그랬지?”

엘더의 다그침에 마거리트는 모른 척 혀를 빼곤 고개를 돌렸다. 플로라가 약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거리트의 꽃잎이 2배의 회복 능력을 예언했으니 부작용으로 저 꽃의 회복 능력이 반으로 감소했을 거예요. 다만 아직 힘이 약하니 정말 그 정도까지 내려간 것은 아닐 겁니다. 부작용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곧 풀릴 것이지만 만약 정말 위험한 전투에선 큰 혼란이 생길 수도 있어요.”

이런 걸 말했구나. 분명 마거리트는 지원형이라 팀에 랜덤한 버프 효과를 줄 수 있는데 나처럼… 아니 나보다 쪼렙이라 성공 확률도 낮고 심지어 실패하면 부작용까지 얻는다니.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상당한 골칫덩어리를 껴안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마거리트는 능력이 실패했다고 질책하거나 혼낼 수도 없게 눈을 빛내며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 미워할 수가 없는 드라이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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