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화 (196/604)

“데이지, 괜찮아?”

마치 몸이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데이지가 걱정되었다.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았을 뿐인데 벼락 맞은 것처럼 파드득 몸을 떨며 놀랐다.

“어… 드루이드님… 아니, 제이 님. 전 괜찮아요. 제가 걱정을 끼쳐드렸나 봐요….”

“무슨 일인데 그래? 저쪽에 아는 얼굴이라도 있어? 네가 아는 얼굴이면 26번째 테라리움 사람일 텐데….”

응? 설마? 26번째 테라리움에서 데이지가 만났던 사람이면서 이렇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만한 인물이면…. 데이지가 노멀 등급이란 이유로 영혼의 연결을 끊고 홀대한 전주인?

“설마 저 중에 널 버린 전주인이 있어?”

“…….”

데이지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으로 긍정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우연도 없었다. 만나면 정말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던 그 사람과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데이지가 고생해 왔던 지난 시간들이 떠오른다.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등급에 대한 열등감을 심어준 끔찍한 사람. 노멀 등급이란 이유로 영혼을 일방적으로 끊어 버려서 끔찍한 고통을 감내해 왔던 데이지.

그 고통에 결국 이렇게 멋진 성목의 모습에서 작은 묘목의 모습까지 줄어들어 죽을 날만을 기다려 왔던 나의 소중한 데이지.

“정확히 누구야?”

“저기… 회색 머리요….”

데이지가 가리킨 인물은 좀 전부터 주구장창 동료가 업적을 떠들어 준 남자였다. 사설 투기장에서 2위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남자. 데이지를 버리고 얼마나 강하고 좋은 드라이어드를 구했길래 그 자리까지 오르셨나? 아니꼽게 느껴진다.

당연하다는 듯이 노멀 등급을 하대하는 둘, 그리고 데이지를 버렸다는 한 명. 끼리끼리 노는구나. 어쩐지 셋 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전 드라이어드 결투를 그쪽과 하고 싶은데요.”

데이지가 말한 회색 머리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진심이세요? 이러면 내기를 건 저희들도 조금 죄송스러워지는데요. 너무 뻔한….”

“너무 뻔한 승부가 될 거 같나요? 겨뤄 보지 않고는 모르지 않을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저 녀석은….”

“네, 투기장 2위 했다는 소리는 좀 전까지 질리도록 들었어요.”

드라이어드 결투도 이기고 싶지만 반드시 데이지를 내보낸 결투에서 데이지를 버린 전주인을 이기고 싶었다. 솔직히 확실하게 이길 거란 보장은 없었다. 어쩌면 내가 질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보란 듯이 데이지의 강함을 내보이고 싶었다. 노멀 등급이라고 내쫓긴 애가 사실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뭐, 정점에 선 드루이드와 겨뤄 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2위라면서 정점? 비록 같은 경기를 치르진 않았더라도 연속으로 진짜 1위를 먹은 시들링도 못 알아보면서.

“야, 사실 엄청 강한 거 아냐?”

“내보낸 드라이어드에 날개도 없잖아. 더쉬맨한테 상대도 안 될 것 같은데. 그러지 마시고 저희 둘 중 하나와….”

난 본인이 직접 느끼길 원한다.

“전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제이예요. 단순한 치기가 아닌 한 테라리움의 ‘정점’으로서 당신과 드라이어드 결투를 하길 원해요. 굳이 당신을 고르는 건 제 꽃을 위해 당신을 본보기의 제물로 삼고 싶어서고요.”

말투가 곱게 나오질 않았다.

“오, 행정 관리원이라. 그런 귀하신 분이 이런 곳에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

“본보기의 제물?”

자신이 화두에 올라도 시종일관 나서지 않던 그가 이제야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만난 적 있던가요? 꼭 저를 원수처럼 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니지만 제 꽃은 당신을 기억하네요. 아니, 원수라기보단 어찌 보면 고마워해야 할 은인일까요? 당신이 버린 덕에 내게로 오게 되었으니.”

그는 내 말에 데이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데이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더 이상 크게 놀란다거나 몸을 떨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버렸다라…. 더쉬맨, 저 레드 데이지가 네가 솎아 내기 한 꽃들 중 하나인가 본데?”

“글쎄, 솎아 낸 꽃 중에 레드 데이지는 한둘이 아니다 보니….”

세상에. 데이지 말고도 버려진 꽃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거기다 같은 레드 데이지 종이 여럿이라니.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뽑아다 버린 적 없어?”

“28번째는 간 적이 없는데. 26번째라면 모를까.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 몇 날 며칠을 밤새워 겨우 얻은 열매에서 노멀 등급 따위를 뽑아서 열받았던 적이 있었지.”

그의 눈이 기분 나쁘게 데이지를 훑었다.

“회복형이라면 써먹을 데라도 있지, 공격형 무기를 쥐고 나타난 드라이어드를 본 순간 머리에 열이 확 솟는데…. 가만, 낯이 익네? 그때 너구나?”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그가 데이지를 알은체했다.

“이야, 레드 데이지가 성장하면 저런 모습도 하는구나. 매번 갓 열매에서 나온 애들만 봤지, 저만큼 키워 낸 사람을 본 적이 있어야지.”

드라이어드를 버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나로서는 최악인 사람이었다.

“어떻게 단지 노멀 등급이란 이유로 드라이어드를 버릴 수 있어요?”

듣고 있던 로웰라가 화를 내며 말했다. 항상 쾌활한 그녀가 불과의 전투 때도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로웰라가 소중하게 키우는 엉겅퀴 드라이어드 역시 노멀 등급 드라이어드였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제게 저 데이지의 복수를 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당신의 드라이어드를 버린 것도 아니고 엄연히 제가 버린 것이 먼저, 당신이 주운 것은 그 뒤인데요? 말 그대로 제가 버렸기 때문에 당신이 데려갈 수 있었고 그걸 고마워한다면서요?”

“복수라뇨? 우리 데이지는 제게 자신을 버린 전주인을 원망한다거나 복수하고 싶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그런 데이지를 등 떠밀어 복수하라고 할 생각도 없어요. 말했잖아요? 본보기의 제물이라고. 저는 당신에게 자랑하려는 거예요. 당신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꽃을 멍청하게 내다 버렸는지 보여 주려는 거죠.”

“말씀이… 거슬리는군요. 멍청하다니.”

그는 느린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행정 관리원이나 되시는 분이 단순히 객기 부리는 말을 할 리는 없고. 좋습니다. 상대해 드리죠. 하지만 이번 결투로 밉보인다고 당신의 테라리움이 앞으로 제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개인 대 개인으로 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내 테라리움들에 다시는 발도 못 붙이게 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아티팩트에서 드라이어드들을 불러왔다. 환한 빛 무리가 두 인형을 빚어냈다.

둘 다 남성형이었고, 하나는 샛노란 머리에 주홍색의 선명한 세로줄이 규칙적으로 자리한 데다 눈가와 입술에 진하게 검은색 화장을 한 것 때문에 무척 인상적인 드라이어드였다.

움직이기 편해 보이는 무늬가 요란한 주홍색 점프 슈트에 거대한 낫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공격형 드라이어드로 추정되었다.

다른 하나는 떡고물 같은 누런 꽃을 망토 술에 장식한 갑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탱커로 추정되는 드라이어드였다.

“노멀로 상대를 하시니 저 역시도 수준에 맞춰 주고 싶지만 죄송하게도 전 노멀은 안 키워서요.”

저 두 드라이어드는 최소한 레어 등급 이상이란 말이네? 어쩌면 메스키트나 엘더, 바곳을 부르는 것으로 결투가 쉽게 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등급으로 찍어 누르는 거지 온전히 데이지의 실력을 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못할 것이다.

저쪽이 방어형과 공격형이라면 나도 같은 포메이션으로 맞서 주지. 아티팩트로 가막살나무를 불러왔다. 바람에 흩날리는 깨끗한 은발, 나부끼는 은실이 새겨진 짙은 붉은색 외투, 거대한 검을 두 손에 쥐고 땅에 꽂은 수문장 같은 드라이어드가 내 부름에 답하였다.

전 가막살나무 군락지의 왕, 거대한 불을 단신으로 가둔 불사의 탱커라면 날아다니며 속공을 펼치는 데이지를 지키는데 제격이었다. 데이지와 가막살나무가 단둘이 짝을 이뤄 전투를 해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잘할 수 있겠지?

“테라리움을 지키고 있는데 불러서 미안하긴 한데….”

“드라이어드라면 본디 주인 되는 자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 먼저다.”

각자의 드라이어드가 어둠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점프 슈트를 입은 드라이어드는 짝다리를 짚으며 어깨에 걸친 거대한 낫을 까닥거렸다. 그 모습이 매우 불량스러운 양아치처럼 보였다.

이리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떤 드라이어드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면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고 했던가.

“하지만 막상 드라이어드를 봐도 무슨 꽃인지도 모르겠고…. 어떤 능력을 쓰는지도 모르는데. 식물도감이라도 하나 사야 하나….”

내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시들링이 무심하게 툭 답을 알려 주었다. 내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더니.

“가자니아 꽃과 참옻나무다. 둘 다 레어 등급의 드라이어드다.”

“존경한다, 진짜.”

고렙은 괜히 고렙이 아니었다. 저렇게 보기만 해도 드라이어드 종이 툭 튀어나와야 고렙인 것이다.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다. 투기장 싸움은 강해서 이기는 것도 있으나 예기치 못한 변수가 승패를 가르는 경우도 있다. 내가 출전 금지당한 이후부터 룰이 바뀌었다고 들었다. 철저하게 강함을 증명하는 것보다 더 다양한 배팅이 이루어지도록, 변수가 만들어 내는 승패에 힘을 싣는 룰이라고 했으니 저자의 드라이어드는 그러한 변수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을 것이다.”

강한 것보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플레이를 하는 드라이어드.

“준비는 되셨습니까? 이 경기는 드루이드의 참전 없이 오직 드라이어드끼리 펼치는 전투입니다. 어두운 밤에 섣불리 드루이드가 나섰다가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요. 드루이드가 무기를 사용해 개입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전투 도중 포션을 사용할 수도 없고 영역 선포도 할 수 없습니다. 아시겠죠?”

“알겠어요.”

“그럼 애들아. 적당히 수준 차이를 보여 주고 와.”

“데이지, 네가 얼마나 강한 지 제대로 보여 주고 와.”

드라이어드들이 공터를 향해 걸어갔다. 데이지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반드시 이겨서 증명해 보일게요!”

그 외침에 쉽사리 지지 않을 거란 의지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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