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졌습니다. 정말 예상도 못 했군요…. 개량종 노멀이 그런 힘을 일깨울 수 있을 줄이야.”
더쉬맨은 적들을 꺾고 고고하게 서 있는 데이지를 아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화관이면 왕의 자질…. 보통은 날개가 먼저 돋는데 화관을 먼저 쓸 정도면 엄청난 재목이군요. 전설의 힘을 일깨운 데다 포레스트까지 형성하면 정말 강해지겠지요. 더구나 노멀은 포레스트를 형성하기도 쉬울 테니….”
그는 데이지를 하나하나 품평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 태도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마치 지금이라도 언제든지 손을 뻗으면 데이지를 다시 데려올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데이지를 세상에 개화시킨 전주인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때의 데이지와 내게 온 데이지는 이젠 달랐다.
데이지가 전설의 힘을 일깨우며 어쩌면 전주인이 포함된 지난 과거는 완전히 끊어 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겨 냈다 생각했지만 그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다시 떠올라 버린 아픈 과거. 데이지의 영혼 깊숙한 곳에 뿌리 박혀 알게 모르게 그녀를 옥죄던 열등감이 이젠 비로소 완전히 뽑혀 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클 줄 알았다면….”
“이렇게 클 줄 알았다면, 뭐요? 데이지를 버린 것을 이제 와서 후회하시나요? 키워 볼 생각은 하지도 않고 데이지를 있는 그대로 봐 주지도 않았으면서. 눈앞에 보이는 잣대만으로 데이지를 판단해 매몰차게 버렸으면서 이제야 눈이 좀 트이신 건가요?”
그는 내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투가 끝난 후 드라이어드들이 제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더쉬맨이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가자니아와 참옻나무는 패배의 흔적을 온몸에 덕지덕지 달고 있었다.
“제가 이기면 원하는 대로 따른다고 했죠?”
정말로 더쉬맨이 질 줄 몰랐는지 그의 일행들의 표정도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무엇을 시킬지 걱정된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당신의 자랑스러운 드라이어드들과 지금 당장 영혼의 연결을 끊으라고 하면 들을 건가요?”
“네?”
더쉬맨은 크게 놀라며 불쾌하단 표정을 지었다.
“왜요? 데이지와의 영혼의 연결을 끊는 건 그렇게 쉬웠으면서, 무책임하게 제약도 제대로 걸지 않은 내기의 조건으로 영혼의 연결을 끊는 건 용납할 수 없는 건가요?”
“그래도 그건….”
그의 드라이어드들 앞에서 자신의 주인이 강함을 좇아 눈앞의 드라이어드와 영혼의 연결을 일방적으로 끊어 냈단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드라이어드들은 자체적으로 충성할 드루이드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평가한다고 했다. 그러니….
“됐어요. 어차피 그쪽에서 영혼의 연결을 끊는다 해도 제가 이득 볼 건 없으니 그냥 해 본 말이에요. 하지만 얕보았던 그 ‘노멀 등급’의 드라이어드에게 철저하게 패배했으니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내 말로 인해 더쉬맨과 그의 드라이어드들 사이의 신뢰에 금이 간다면, 데이지를 내내 노멀이라고 무시해 왔던 그의 태도에 대한 작은 복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뭐 시키는 대로 한댔으니 무엇을 시킬지는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딱히 그들에게 뭘 시켜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쪽에서 궁한 것이 있어 일방적으로 제시한 내기였으니. 그들을 내버려 두고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하게 돌아온 데이지를 맞이했다.
“화관 멋지다, 데이지….”
데이지를 보고 무슨 말을 할지 어떤 칭찬을 해 줄지 고르고 골랐는데 막상 나온 말이 이따위였다. 내게 다가온 그녀를 보자마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더 말을 하기 힘들었다. 이놈의 주책바가지. 센 척 다 해 놓고 남들 앞에서 우는 모습은 보이기 싫은데.
데이지는 내 말에 머리 위의 화관을 가볍게 만져 보다가 해맑게 웃었다.
“어헝….”
그 모습에 결국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는데 타이밍 좋게 로웰라가 왁 소리를 지르며 끼어들었다. 놀라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진짜 멋있어! 나 화관 쓴 드라이어드는 생전 처음 봤어! 우와… 우와…. 우리 엉겅퀴도 언젠가 데이지 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데이지 님?
“주변 지역에서 전설이 탄생하려 한다고 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니까? 그런데 막 하늘에 글자가 우수수 생기는 거야. 놀라서 말도 안 나오는데, 막… 금빛이 반짝이고…!”
로웰라는 두 팔을 날갯짓하듯 팔딱거리며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갑자기 역전의 전설이 탄생했다고 하고. 저쪽 드라이어드들한테 푸슉! 하고 공격이 터지고 갑자기 파바박! 하고 가만히 있는데 공격들이….”
“그… 그래, 네가 보기에도 대단했지? 좀 진정해.”
“진짜 멋있어…. 드라이어드의 신이 내려왔다고 착각할 만큼 대단한 광경이었어. 나 오늘 본 걸 평생 잊지 않을 거야. 자랑도 할 거야. 대단한 드라이어드와 같이 여행했다고.”
로웰라는 얼마나 흥분했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와, 뭔가 막 속에서 끓어올라서 참을 수가 없어! 지금 당장 우리 엉겅퀴와 전설이 되기 위한 전투를 하러 떠나고 싶어! 주변의 불이라도 후려 패고 와야겠어!”
엉겅퀴는 개량종이 아닐 테니 이미 모체 신화가 있지 않을까? 로웰라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발을 쿵쿵 굴리며 걸어갔다. 엉겅퀴가 제 주인처럼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뒤따라가고 있었다. 해가 뜨고 있다고 해도 아직 어두우니 말려야겠지. 그 전에….
“데이지, 잘했어. 넌 정말 최고야. 언제나처럼 네가 자랑스러워.”
“저도 제이 님의 믿음에 보답할 수 있어서 기뻐요.”
어쩜 이렇게 모든 것이 사랑스러울까. 우리 꼭 신화가 되자.
“어? 제이 언니, 여기 좀 와 봐!”
데이지와 눈을 마주한 채 좀 전의 광경을 곱씹으며 여운을 즐기고 있는데 로웰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그녀가 엉겅퀴와 함께 씩씩대며 걸어간 곳으로 가 보았다.
“언니, 여기에 아까 다이아랑 비상식량 올려 두지 않았어? 왜 없지?”
로웰라의 말처럼 내가 물건들을 올려놨던 평평한 바위 위가 텅 비어 있었다.
전투에 신경 쓰느라 미처 몰랐다. 모든 이들은 공터 근처에 있었고 그나마 떨어져 있던 저 세 남자들도 멀찍이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소란에 그제야 이쪽을 바라보았다.
“죽고 싶지 않다면 그곳에서 움직이지 말거나 더 멀어져라.”
느린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던 시들링이 세 남자를 향해 말했다.
“아직 근처에 있다. 몸을 숨기고 있다.”
“훔쳐 간 도둑들이 근처에 있다고?”
“벨라돈나.”
시들링의 부름에 포도주색 꽃잎이 휘날리며 아티팩트에서 벨라돈나가 나타났다. 그녀는 필드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이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 가까이에 있다면 길드나 파티로 묶인 자들이 아니면 모두 위험했다.
“굉장한 위엄이 느껴지는구나, 레드 데이지여.”
벨라돈나는 데이지를 보며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붙잡아라.”
“그렇다면 시들링, 저자들은 더 멀리 떨어지는 것이 좋겠구나.”
“상관없다.”
시들링의 말에 벨라돈나는 작게 혀를 쯧쯧 차더니 창을 닮은 기다란 스태프를 땅에 꽂았다. 그녀의 발밑에서부터 주위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퍼져 나갔다.
스태프에선 검고 둥근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검은 연기와 물방울은 한데 섞여 끈적거리는 슬라임처럼 꾸역꾸역 땅바닥을 기어 스르르 땅 아래로 스며들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느껴질 정도로 기이한 모습이었다.
“벨라돈나가 필드에 영향을 끼치는 범위를 늘리고 있으니 곧 반응이 올 것이다.”
시들링의 말처럼 잠시 뒤, 멀지 않은 곳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꾸엑!”
“악! 살려 줘!”
두 괴성은 어린아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였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죽을 수도 있단다. 정말 멈추지 않아도 괜찮겠니?”
“목소리가 너무 어린데. 정말 어린아이면 어떡해? 죽이진 말아 줘.”
“그 정도면 됐다.”
시들링의 말에 벨라돈나는 창을 쥐지 않은 손을 펼쳐 가볍게 쥐는 시늉을 했다. 갑자기 땅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꾸물꾸물 그녀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벨라돈나가 쥔 손 안으로 그녀가 피워 냈던 모든 것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잡아 올게!”
로웰라가 호기롭게 외치며 괴성이 들렸던 곳으로 뛰어갔다.
“저거 벨라돈나 아니야?”
“벨라돈나라고…?”
멀리 있던 남자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벨라돈나와 시들링을 번갈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가만… 저 드루이드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어?”
“네가 말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그 사람이 설마 이곳에 있겠어?”
“하지만 그 유명한 페어인 벨라돈나 드라이어드가 같이 있고 은빛 갑옷에….”
“진짜 저 드루이드가 길드 수배범 아이언비스트라고?”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이쪽을 바라보는 그들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시들링을 보며 공포를 느낀다는 것을 온몸으로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시들링을 대하는 태도는 정말 모든 이들이 비슷비슷하구나. 알아차리기 전까진 모닥불에 같이 모여 앉아 밥도 먹었으면서 지금은 철저하게 벽을 세우고 있었다.
“언니! 이것 봐. 묘목 드라이어드들이야!”
로웰라가 양손으로 질질 끌고 온 자들은 작은 드라이어드들이었다. 민들레 아이들보단 훌쩍 컸고 청소년기로 추정되는 바곳보단 약간 작아 보였다.
“근데 곧 죽을 것 같은데….”
“괴물… 괴물이 보인다….”
“숨이… 컥….”
철퍼덕 땅에 놓인 드라이어드들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거나 목을 쥐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벨라돈나의 독에 중독되어 환각과 경련이 일어나는 거다. 살리고 싶다면 지금 회복시켜야 할 거다.”
“넌 진짜 위험한 벨라돈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어째서 회복형 드라이어드를 하나도 데려오지 않은 거야?”
회복이라고 해 봤자 쓸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내 드라이어드들뿐이잖아?
시들링의 말에 디버프를 해제시킬 수 있는 바곳을 불러왔다. 일단 살려야 어린 묘목 드라이어드면서 도둑질을 한 연유라도 들어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