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5화 (205/604)

내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증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엘더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러곤 내 한 팔을 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엘더, 스태프를 이렇게 높이 들어 올려 봐.”

“갑자기 왜?”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잘한다. 엘더가 하얀 꽃이 수북하게 달린 스태프를 가볍게 치켜들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 신님께서 뭘 하시려는 걸까?”

“세상에…. 축복을 내려 주시려는 걸까?”

아, 역시나…. 신 노릇을 하고 있던 건 엘더 플라워 야생종이었나 보다.

엘더 플라워 드라이어드들은 하나 같이 다 특이한가? 뭘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저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건데? 더구나 신 노릇을 하는 자연 발생 엘더를 내가 영입해서 포레스트에 집어 넣어야 하다니. 어쩐지 두통이 올 것 같다.

드라이어드들의 반응들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엘더는 이젠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태프를 쥐지 않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치켜든 스태프와 내민 손, 흡사 사이비 교주 같은 꼴이다.

이 자식… 눈치챘구나. 숨어 있는 드라이어드들이 자신에게 열렬하게 관심을 표한다는 것을 알아챘나 보다.

우리 엘더는 관종인 데다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드라이어드였다.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오오오…!”

더욱 업그레이드된 함성이 터져 나온다 했더니 엘더가 기술을 시전하는 척하며 손에 빛을 두르고 있었다. 무대 체질이네. 빛이 나는 얼굴에 기꺼이 손에 빛도 뿜어 주는 무대 매너라니, 아주 톱스타 납셨네, 납셨어. 판 깔고 사인회라도 열지 그러니?

드라이어드들은 이젠 자신들이 숨어 있었다는 자각이 없는 듯 보였다. 아예 몸을 가린 장소에서 쭈뼛쭈뼛 나오며 엘더의 근처로 조금씩 몰려들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아주 어리거나 덜 자란 것처럼 보이는 드라이어드들로, 먼저 만났던 발레리안 아이들과 엇비슷한 또래들이었다.

엘더는 과장되게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며 드라이어드들에게서 함성을 이끌어 낼 때마다 콧대를 높이며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꼭 내게 ‘내가 이렇게 대단해.’라고 말하는 듯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네 허리 반밖에 안 오는 애들에게 추앙받으니 좋니? 모양새가 동네 골목대장 같잖아.

시들링과 로웰라에게 지금 일어나는 상황과 엘더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또한 이 섬에서 신 노릇을 하고 있는 드라이어드가 아무래도 엘더 플라워 야생종인 것 같다는 확신까지.

“와! 그럼 저렇게 멋진 드라이어드가 또 있다는 거야?”

로웰라의 순수한 감탄에 그렇지 않아도 높은 엘더의 콧대가 더욱 높아졌다. 이곳은 완전히 엘더의 자존감을 한계치 뚫어 가며 채워 주는 무대나 다름없었다.

엘더, 그렇게 좋으면 엘더는 여기 살아. 나는 갈 거야.

저렇게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다른 엘더를 만날 일이 두려워졌다.

“신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끝으로 갈수록 하얘지는 연보라색 머리를 가진 작은 드라이어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엘더에게 물었다.

“신?”

난 까치발을 딛고 엘더에게 귓속말을 했다.

“널 신으로 알고 있어. 조금만 맞춰 줘 봐.”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쟤들은 이 섬에 있는 다른 엘더 플라워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하필 너도 엘더 플라워라 착각한 것 같거든. 다른 엘더를 찾으러 갈 일이 조금 막막했는데 신이 둘이 되면 그쪽에서 먼저 찾으러 오지 않을까?”

“하, 어이가 없네. 포레스트의 왕이 될 나를 두고 신 노릇을 하고 있다고? 온실 속 화초로군. 세상 밖에 이렇게 진정 대단한 우성종 엘더 플라워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잖아? 그런 것보다 차라리 내가 진정한 신이라고 할 수 있지.”

물론 우리 엘더가 질 리가 없다고 맹신하고 있긴 하지만 왕이 되는 쪽이 둘 중 누구일지는 겨뤄 봐야 알 텐데, 엘더는 이미 자기가 왕이라도 된 것처럼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곤 한층 높아진 톤으로 분노를 담아 주절거렸다.

어디까지 하나 보고 있는데 말을 멈추더니 대뜸 날 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하지만… 내게 신은 너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정말 미워할 수 없는 꽃이다.

“어쨌든 신처럼 굴어 달라고? 글쎄,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야, 너희들 다 꿇어.”

“그건 양아치고!”

그런데 엘더의 어이없는 명령에 작은 드라이어드들이 속속 무릎을 꿇는다. 로웰라는 거기에 대고 대단하다며 손뼉을 깔짝깔짝 쳐 주고 있었다.

엘더를 위한 무대에 엘더를 위한 앞잡이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더구나 엘더를 제어할 메스키트도 이 자리에 없었다. 하다못해 엘더의 말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마거리트도 없었다. 나는 엘더의 예쁜 얼굴을 적극 찬양하는 뒷배였다. 모든 것이 엘더를 위한 자리였다.

“그러지 말고 섬을 안내해 달라고 해 봐. 여기가 소문으론 허브들의 지상 낙원이라고 불린다는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잖아. 아지트 같은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해 보자.”

“이런 거추장스러운 공간 말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안내해라.”

“너 말고 우린 아직 경계하는 것 같은데 같은 편이라는 인식도 들게 해 봐.”

“이들은 나와 가까운 자들이다.”

“은둔자의 정원이라는 멋있는 이름도 있더라. 섬에 대해 좀 듣고 싶기도 하네.”

“너희들의 신 앞에 섬의 모든 일들을 낱낱이 고해라.”

자식… 잘하네? 엘더는 옆에서 내가 속삭이는 족족 명령하듯 드라이어드들에게 말했다. 내가 꼭 엘더의 곁에 붙어 그를 조종하는 비선실세처럼 느껴졌다.

드라이어드들은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지만 엘더의 명령을 착실히 수행해 주었다. 그들은 우리가 내린 지점으로부터 섬 안쪽으로 안내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온갖 꽃향기가 섞여 자욱하게 콧속을 파고들었다. 꼭 백화점 향수 코너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중엔 익숙한 향들도 많았다. 섬유 유연제나 보디 워시 등에서 자주 사용되는 로즈메리나 라벤더, 재스민 향 정돈 구분할 수 있었다. 와, 정말 허브들의 지상 낙원인가 봐….

꽃향기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었지만 이상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향기의 향연에 마음이 절로 차분해지고 온몸이 편안해졌다.

섬에 막 도착하여 본 잡초 풀밭은 허상이었다는 것처럼 주변이 빠르게 바뀌어 갔다.

다듬어진 길이 등장했다. 평평하지만 모양은 울퉁불퉁했는데, 크기와 색깔이 제각각인 돌들이 촘촘하게 가려는 앞길에 깔려 있었다.

높이가 일정하고 공들여 조각한 석등이 가로등을 대신하여 일정 간격으로 돌길을 따라 자리했다. 안엔 거미줄 하나 없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고 타들어 간 심지가 있는 걸로 보아 밤마다 등에 불을 붙이고 관리하는 듯했다.

마찬가지로 돌로 조각한 벤치와 용도를 모를 듬성듬성 끊긴 담장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앞으로 보게 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인에게 꽃이 정원으로 돌아왔음을 알려라.”

앞서가던 드라이어드가 허공에 대고 말하자 찬물을 확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정신이 확연히 맑아졌다.

“세상에… 말도 안 돼.”

“허어어어….”

로웰라는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놀랐다.

거대한 공중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웅장한 건축물을 멀리서 볼 수 없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테라리움마다 있는 거대한 과수원에서 볼 수 있었던 유리 돔보다 몇백 배나 큰 유리 돔 위로 햇빛이 내려와 부서졌다. 꼭대기부터 아래로 영롱한 무지갯빛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며 반짝거렸다.

스노 글로브 안에 든 모형처럼 그 안에 신전 유적지 같은 엄청난 크기의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3층 높이의 돌탑 위에 건물이 놓인 구조였다. 건물은 맨 아래 넓이가 큰 둥근 층이, 위로 갈수록 넓이가 줄어드는 둥근 층이 계단식으로 총 3층이 쌓여 있었다. 둥근 피라미드 혹은 케이크 모양처럼 생겼는데 맨 아래층이 돌탑 위에 세워졌기에 멀리서 보면 공중에 뜬 정원처럼 보였다.

맨 아래층에선 지상을 향해 여러 갈래의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어서 정말로 건축물이 떠오르고 있는 듯한 착시 현상에 요소를 더했다.

둥근 층마다 각양각색의 꽃과 푸른 초목이 가득 심어져 있었기에 그야말로 정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거대한 공중 정원을 중심으로 양옆에 모양은 똑같지만 크기가 더 작은 공중 정원이 2개 더 있었다.

은둔하면서 만들었다는 정원 맞아? 누가 봐도 존재감이 장난 아닌데. 은둔자의 정원이 아니라 관심 종자의 정원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정원을 만들었다는 대부호는 대체 얼마나 다이아를 썼을까? 나와 비견할 정도로 다이아가 많았던 거 아냐? 아니… 그 전에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건축물이 맞긴 해?

“나 혹시 죽은 거 아냐? 여기 천국인 거야?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대단한 광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

로웰라가 눈물을 그렁그렁 달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을 정도의 위용이었다. 정원이라고 해서 넓게 펼쳐진 꽃밭 정도를 상상했는데 3층짜리 건물을 공중에 띄우고 정원을 층마다 나눠서 때려 넣은 것일 줄이야.

세상의 모든 허브가 다 있다고? 다 있을 만한 크기였다.

“아니, 대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멀리서부터 저걸 발견할 수 없었던 거야? 바다 위에 있을 때부터 보였어야 하는 거 아냐?”

“섬에 들어설 때부터 우리에게 어떠한 강력한 힘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배 안에서 사람들이 당했던 것처럼?”

시들링이 저 놀라운 광경을 보고도 무덤덤한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넌 어째서 감탄도 하지 않는 거야? 로웰라는 울고 있는데?

섬에 내렸을 때부터 우릴 반기던 자욱한 꽃향기가 단순한 꽃향기가 아니었을 수도 있단 말인가?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섬 전체가 우리를 속이려 들었다니.

그렇다면 앞서간 드라이어드가 허공에 대고 말했던 것이 어쩌면 눈속임을 푸는 주문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의 보물섬이 맞았다. 저 공중 정원이야말로 정말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신님,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드라이어드들은 유리 돔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입구는 하나가 아니었다. 사방에 일정 간격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거대한 중앙 정원이 아니라 오른쪽의 좀 더 작은 정원인 듯했다.

“언니…. 저거 보여?”

묵묵히 내 옆을 걷고 있던 로웰라가 어느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언니… 저거 다… 금 아니야?”

둥근 층의 옆면마다 새겨져 있는 수려한 곡선의 노란 문양이 빛을 받으면 반짝거렸다.

“…….”

돈지랄의 절정이었다. 금이 맞는 듯했다. 슬쩍 본 엘더가 정신이 완전히 팔려 있는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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