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기형적으로 꼬여 있어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이런 비정상적인 환경은 처음이에요. 아니 이젠 인간이 멋대로 식물의 종을 만들어 내는 세상이니….”
칼미아는 팔짱을 끼며 중얼거리다 우리 파티의 신입인 로웰라를 인식하곤 흠칫 굳었다.
인공 개량에 대한 이야기는 이젠 대부분의 테라리움에 퍼졌을 테지만 아직까진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주제였다. 아무리 그 주제의 중심에 우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젠 최대한 엮이지 않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칼미아의 걱정과는 달리 로웰라는 입을 헤벌린 채 메스키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 보면 쟨 정말 드라이어드 덕후로 보여. 나도 드라이어드를 좋아하지만 로웰라는 뭔가 좀 더 광팬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드라이어드가 아니더라도 과한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음, 전 날개도 있어요.”
그런 로웰라를 보고 칼미아가 갑자기 딴 길로 샜다. 메스키트를 보고 넋이 나가 있는 로웰라의 관심을 끌고자 등을 보이고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여러 갈래로 엮인 꽃가지 날개의 연분홍색 꽃잎이 칼미아의 움직임을 따라 파르르 떨리면서 로웰라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우리와 함께하며 봐왔던 드라이어드들 중 날개가 있는 드라이어드는 칼미아가 유일했다.
로웰라는 사탕에 홀린 아이처럼 칼미아를 구경했다.
좀 전엔 칼미아 라티폴리아 포레스트의 우성종으로서 왕의 부재에 대해 메스키트와 심각하게 토론을 하더니…. 저쪽도 중심을 잡아 줄 벨라돈나의 부재가 큰 건가?
“드루이드의 존재를 지우는 드라이어드라….”
칼미아가 로웰라에게 기꺼이 날개를 만져 봐도 된다며 산만한 태도를 보이는 반면, 메스키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근본적으로 드루이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환경이라는 거군요.”
메스키트의 의미심장한 말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찼다. 드루이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왜 주위를 둘러보는 것만으로 그런 이야기를 한 거지?
드루이드는 세계수의 축복을 영혼에 담고 태어나는 존재. 그렇기에 드라이어드와 소통하여 다룰 수 있는 존재이다. 드루이드가 이 세계에서 각광받는 이유는…. 불의 침입 때문이다.
세계수를 위협하는 불은 평범한 물로는 끌 수 없고 세계수의 힘으로 태어난 드라이어드의 힘을 빌려 물리쳐야 한다. 그런 드라이어드들이 세계수와 멀리 떨어지더라도 온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드루이드는 영혼의 한쪽에 그들을 위한 자리를 빌려준다.
메스키트의 말을 곱씹다 보니 불현듯 확 떠올랐다.
“이 섬은 불의 침입이 없어. 맞아! 왜 그걸 바로 눈치채지 못했을까? 오면서 불을 하나도 본 적이 없었지?”
세계수의 가지가 뻗어 나와 축복의 힘으로 비호하는 테라리움이 아닌데도 섬은 불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다. 그 어디에도 불로 인한 피해를 볼 수 없었다.
“불을 상대할 필요가 없으니까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긴밀한 관계가 필요가 없는 거야.”
드루이드에겐 드라이어드가 필요하고, 드라이어드에게도 드루이드가 필요했다.
내 말에 메스키트가 기특하다는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요. 아이러니하게도… 드라이어드와 상극인 불이 없어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 같군요.”
만약 이 섬이 지속적으로 불의 침입을 받았다면 드라이어드에게 강력한 힘을 실어 줄 드루이드의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렇게 저주받은 자라고 낙인찍히는 존재가 아닌 환영받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도중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만약 세상에 모든 불이 사라진다면… 정말 드루이드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섬처럼 드루이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존재를 지우려 들까?
세계수는 불의 침입에 맞서지 않아도 되니 더 이상 열매를 통해 드라이어드들을 내보내지 않게 될까?
자연적으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은 순리에 따라 그저 그 자리에서 나고 자라다 때가 되면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릴 뿐, 드루이드와 영혼의 연결을 맺을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는 걸까?
아주 오래전부터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던 베스탈리스들이 떠올랐다. 드루이드가 세계수의 축복을 영혼에 심어 드루이드가 되는 것처럼 불씨를 영혼에 담고 태어나는 베스탈리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사람들.
그러나 세상이 바뀌니 그들은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이 생활하는 데 불은 필수적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런 세상이 닥치기 전엔 드루이드들만큼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만약 이 모험의 끝이 세상의 모든 불을 무찔러 세계수를 구원하는 거라면… 드루이드인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드루이드가 이루어야 할 모든 숙제를 끝내고 나면… 드루이드의 다음 역할은?
“오래 생각하지 마…. 깊게 생각하지 마….”
“네? 제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메스키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응? 내가 무슨 말을 했어?”
“…아니에요.”
뭐야, 나도 모르게 무슨 말을 중얼거린 거람. 방금 전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했는지 아리송했다. 이 나이에 벌써 치매가 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어째서 은둔자의 정원은 불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바다 위의 섬이라서 그럴까? 하지만 생태계의 최강을 모방할 줄 아는 불이라면 하늘을 나는 새로도 변신할 수 있었다. 사람의 눈을 속였듯 불을 속일 수 있는 걸까?
어린 드라이어드는 그 이후로도 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해 주었다.
어쨌든 엘더 야생종은 치유의 힘 덕에 드라이어드들은 물론 사람들에게도 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말라 죽는 일은 없었으나 농사를 지어 먹고살아야 하니, 그들에게도 엘더 야생종은 신과 같은 존재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엘더 야생종은 이 섬에 신으로 군림하자 공중 정원의 가장 꼭대기를 차지하고 웬만하면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지낸다고 했다. 드라이어드들이 엘더를 처음 보고 놀랐던 이유가 이해되었다.
엘더 야생종이 신 노릇을 한 뒤로 식물이 말라 죽는 일은 확 줄었다고 하니 오랫동안 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엘더 야생종은 드라이어드들은 물론 사람들에게까지 계속 자신에게 보호를 받고 싶다면 온갖 반짝이는 것들을 제물로 바치라 했다고 한다. 사람들과 말은 통하지 않아도 그들은 드라이어드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배웠다고 한다. 엘더 플라워답다고 해야 할지….
그런데 애초에 이 은둔자의 정원은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것인데 애꿎은 드라이어드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은둔자의 정원을 만든 그 주인이라는 사람에 대해 저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어린 드라이어드는 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 보였다.
“무언가 이상해.”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엘더가 그 예쁜 얼굴에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이고, 얼굴 펴라. 행여나 미모가 조금이라도 구겨지면 어떡하니.
“내 능력은 내가 잘 알아.”
엘더는 내가 그의 미간을 꾹꾹 누르는 걸 내버려 두며 마저 이야기를 했다. 오히려 녹음을 담은 녹빛 눈으로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이야기해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보면 볼수록 심장에 해로운 미모다.
“말라 가던 식물들을 구했다고? 식물뿐만 아니라 드라이어드도? 영혼의 연결도 되어 있지 않는 상태인데?”
“흐음….”
메스키트가 잔잔하게 웃으며 엘더를 바라보았다.
“내 능력은 회복의 힘이야. 기운을 북돋워 주고 다친 상처를 치유해 준 것은 그렇다 쳐도 원인 모를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힘은 아니야. 그건 나보다 저 드라이어드에게 더 가까운 힘이야.”
엘더가 스태프로 바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갑자기 자신이 지목당하자 바곳은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내게 달라붙었다. 안겨 오는 몸뚱이를 나도 얼떨결에 끌어안았다.
“엘더 플라워의 궁극의 힘도 그래프트를 사용했을 때 발휘할 수 있어. 영혼의 연결이란 한계까지 넘어서려면 너와 내가 사용하는 그래프트 수준이 되어야 해. 하지만 정말로 한계치를 넘어선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있는 엘더 플라워는 이 세상에 너의 드라이어드인 나밖에 없어.”
엘더의 단호한 목소리에 어쩐지 뿌듯함이 들었다. 그렇지. 범지역에 안개도 아닌 비를 뿌리려면 내 무한 다이아에서 난쟁이들이 만들어 놓은 수도꼭지 정돈 틀어 줘야지.
“그리고 그래프트의 능력도 앞서 말한 힘과 방향이 달라. 내 그래프트는 드라이어드를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힘이야. 병을 앓는 드라이어드를 최상의 상태로 돌려 봤자 병 걸린 채로 컨디션만 좋아질 뿐이야.”
“용케 이상함을 눈치챘구나.”
메스키트가 칭찬을 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엘더의 주둥이가 댓 발 튀어나왔다.
“내가 언제 눈치채나 지켜보고 있었지?”
엘더의 투덜거림에 메스키트는 그저 잔잔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믿고 있는 엘더 플라워의 힘이 허상이란 거야?”
“분명 그 자식 사기 치고 있을 거야. 철저하게 무너뜨려 주겠어. 그리고 내 발밑에 둘 거야.”
대체 어떻게 사기를 쳤길래 말라 죽은 식물들을 되살려 낸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더 이상 말라 죽지 않도록 막고 있는 걸까?
신 노릇을 하고 있는 엘더 야생종은 운이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쩌다 우리 엘더와 엮이게 되어서는….
만약 다른 종이었다면 우리가 이 섬을 굳이 방문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르고 죽을 때까지 안전하게 신 노릇을 했겠지. 하지만 나비는 귀신같이 엘더 야생종을 찾아냈고 난 기필코 그를 우리 엘더의 포레스트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뿌우우우….
그때였다. 갑자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날카로운 고동 소리에 가까웠다.
그 소리에 우리를 피해 숨었던 사람들도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우리의 기세에 눌려 벌벌 떨고 있던 어린 드라이어드들도 화색을 띠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소리야?”
우리도 황급히 따라 몸을 틀었다.
그곳엔 우리가 보고 있는 어린 드라이어드들보단 확연히 큰 드라이어드들 여럿이 줄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에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다. 발레리안 아이들과 모감주나무였다. 그들은 무려 선두에 서 있었다.
드라이어드들은 저마다 무엇이 가득 든 주머니나 상자를 들고 중앙의 거대한 공중 정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걷고 있었다.
“와! 섬 밖으로 제물을 구하러 나갔던 꽃들이 돌아왔나 봐!”
“발레리안도 있네…. 부럽다. 제물을 잔뜩 구해 왔나 봐.”
“나도 모감주나무가 배를 태워 줬으면 제물을 구해 올 수 있었을 텐데.”
“부럽다… 그럼 신님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겠네.”
저마다 떠들어 대던 아이들이 일시에 행동을 멈추었다. 그러곤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엘더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신님은 여기 계시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