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무얼 불안해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녀의 반응을 알아차린 건 나뿐인 듯했다.
엘더는 상대가 공격할 기미를 보인다면 금방이라도 전투를 벌일 것처럼 굴었고, 메스키트는 그런 엘더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데이지는 드라이어드들을 쓰러뜨리고 온 길을 슬픈 표정으로 살폈고, 바곳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라도 터질까 봐 엘더들을 바라보았다. 좀 전의 전투에서 수많은 멀티 킬을 따내는 데에 높은 공로를 세워 놓고도 약간 겁먹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내 얼굴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주변은 신경 쓰지 않고 나만 바라보고 있는 마거리트와, 전투를 끝냈으니 앞으로의 일은 자신들과 상관없다고 여기는지 팔짱을 끼고 방관하는 태도를 보이는 시들링과 그의 드라이어드들까지.
그렇다면 우연찮게 내가 발견하긴 했지만, 짭신 엘더는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을 능숙하게 숨길 수도 있다는 건데….
만약 그녀가 우리 엘더와의 전투에 불안감을 가졌다면 엘더는 ‘옳다구나’ 하고 덤볐을 거고, 감각이 날카로운 메스키트도 알아차리고 내게 이야기를 했을 것 같은데….
신 노릇을 하며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이었을까? 아니 조금 달라. 어쩌면….
“가까이에 있고,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된다거나….”
그렇다면 대체 누구에게?
“이…!”
짭신 엘더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우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거만함을 떨던 얼굴이 와장창 무너지기 시작했다. 잘 흉내 낸 가면이 벗겨지며 그 안의 불안을 넘어선 다급함이 드러났다.
결국 우리가 자신을 쓰러뜨리기 전까진 절대 떠날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위기를 느낀 것이다. 그건 자신이 지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안 돼요! 떠나야 해요!”
그 아슬아슬한 상황을 끊어낸 것은 놀랍게도 로웰라와 함께 사라졌던 레몬밤 드라이어드였다. 아이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신전 안쪽에서 우릴 향해 뛰어왔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건 로웰라도 무사하다는 거겠지? 하지만 어떻게 혼자서 빠져나온 거지?”
“어떻게 너 혼자서? 로웰라는?”
레몬밤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내게 달려와 단숨에 양손으로 내 팔을 쥐었다. 그러곤 반동을 이용해 뒤쪽으로 잡아끌었다. 날 당장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듯.
아마 아이에게 악의가 있었다면 도중에 내 드라이어드들에 의해 가로막혔겠지만, 아이는 오직 날 끌고 가야 한다는 일념뿐인 듯했다.
“잠깐 진정 좀 해. 로웰라도 같이 잡혀간 거지? 왜 너만 나온 거야? 아직 로웰라를 구하지도 못했는데 떠나라니?”
“일단 여기서 나가요! 아래로 내려가요. 그럼 설명해 줄게요. 정말 급해요! 저와 함께 있던 드루이드 분은 무사해요. 제가 도망 나올 수 있던 것도 그 드루이드 분이 바라셨기 때문이에요.”
짭신 엘더는 분명 자신의 옆을 무방비하게 지나치는 레몬밤을 봤다. 아마 그녀가 손만 뻗었다면 레몬밤은 쉽게 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잡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우리의 곁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자신을 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들을 구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전해야만 한다고 했어요!”
“로웰라를 두고 갈 순 없어. 더 많은 이들을 구해야 한다고? 그런 알 수도 없는 소리에 적진에 걔만 혼자 남겨 두고 가라는 거야?”
저길 다시 내려가라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사이에 로웰라가 잘못되면 어쩌라고?
“해치진 않는다. 그러니 당장 여기서 떠나.”
짭신 엘더는 레몬밤이 하던 이야기에 말을 보탰다.
“자꾸 떠나라는 말만 반복하는데 네가 전투에 질까 겁나서 피하는 거 아냐?”
엘더가 스태프로 짭신 엘더를 가리키며 비아냥거렸다.
“들키면 다 죽어요! 당신들은 강해서 안 죽겠지만 섬 안의 모든 생명들이 다 죽어요!”
“해일을 말하는 거야?”
“아뇨! 괴물이요. 섬에 사는 괴물이요!”
괴물?
“그럼 괴물을 불러오는 저주받은 자들을 말하는 거잖아?”
불현듯 드루이드에 대해 말할 때 어린 드라이어드들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섬에 괴물이 산다고? 설마 불을 이야기하는 걸까? 아니, 그렇다면 여기 있는 다른 이들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답답한 것들.”
그 순간 잠자코 있던 짭신 엘더가 스태프를 높이 들었다. 설마 공격인가? 데이지가 반사적으로 단도를 날렸다. 순식간이었다.
단도는 올곧게 날아가 짭신 엘더의 스태프를 든 팔에 명중했다. 하얀 로브가 간단히 찢기며 단도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스러운지 이를 악물면서도 팔을 움직였다.
“안심해. 네 곁을 떠날 생각은 없어. 난 여기에 있어.”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스태프 끝을 바닥에 꽂았다. 그러자 주변이 작게 진동했다.
“어? 무너진다.”
“뭐?”
갑자기 마거리트가 나를 번쩍 들었다. 반항할 틈도 없었다. 그녀는 내 의사를 묻지 않고 날 안아 든 상태로 계단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파른 계단을 한 번도 헛딛지 않고 폴짝폴짝 내려가는 폼이 절벽을 타는 산양이나 다름없었다.
“왜 이래? 이거 내려…!”
어이가 없어서 항의하듯 마거리트에게 소리치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올려다본 그녀의 샛노란 눈이 초점을 잃고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인형처럼 보였다.
너무나도 낯설고 언뜻 불쾌함이 섞인 신비로운 모습에 그녀를 멈춰 세울 말 한마디 내뱉지 못했다. 갑자기 마거리트가 왜…?
마거리트의 돌발 행동에 다들 우릴 따라 바삐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쟤 왜 저래? 멈춰! 야!”
“마거리트! 멋대로 행동하지 말라고…!”
그녀를 질책하는 엘더와 메스키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그 모든 소리를 묻어 버릴 만큼 어마어마한 굉음이 우리가 있었던 자리에서 터져 나왔다. 새하얀 광경이 시야를 어지럽히고 달콤함을 넘어서 지독할 정도로 독한 꽃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엄청난 수의 하얀 꽃나무가 동시다발적으로 짭신 엘더가 있던 자리에서 솟아오르고, 그 여파로 계단의 제일 윗부분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몇 개의 계단을 뛰어내리듯 건너뛰는 마거리트 덕에 우린 짧은 시간 만에 계단의 중간까지 내려온 참이었고 그 뒤를 급하게 쫓아오는 내 드라이어드들과 시들링의 일행도 바로 위쪽에 있었다.
계단은 아주 빠른 속도로 차례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뭉텅이로 떨어져 내린 잔해가 땅 아래서 뿌옇게 흙먼지를 일으켰다. 마치 산사태라도 일어난 듯한 여파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뛰어! 뒤도 보지 말고 뛰어!”
칼미아가 뛰어가던 레몬밤의 뒷덜미를 낚아채 어깨에 올리고 달렸다.
“차라리 굴러!”
페리윙클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기 팀의 드라이어드들에게 채찍질을 하며 소리쳤다. 흡사 경주마를 부리는 기수를 보는 듯했다.
“난… 못 뛰어….”
어기적거리며 뛰던 블루 멜로우가 잽싸게 시들링의 아티팩트로 돌아갔다.
“약삭빠른 놈! 도망가다니!”
“말할 시간에 뛰어!”
다급한 일행들의 목소리만큼 빠른 속도로 붕괴가 침식해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명 우리가 올라오며 쓰러뜨렸던 드라이어드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런 일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만약 정신을 잃은 채로 그대로 남겨졌다면 잔해들과 함께 떨어져 깔려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리 대피라도 했는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콰르릉!
붕괴는 어느새 우리 뒤로 바짝 따라붙었고 간발의 차로 발 디딜 공간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로브를 입어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린 바곳과 엘더의 뒤꿈치까지 따라와 무너져 내렸다.
위기의 순간, 메스키트는 아예 양 옆구리에 바곳과 엘더를 끼더니 계단에서 훌쩍 도약해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나와 마거리트의 옆으로 쏘아진 대포알처럼 거대한 묵색 갑옷이 훅 지나가더니 잠시 후 쿵 소리와 함께 땅에 넓은 크레이터를 남기고 착지했다.
동시에 메스키트가 뛰어내린 곳에서부터 거대한 모래 줄기가 솟아오르더니 무너져 내리는 계단 아래를 지탱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붕괴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메스키트의 조치 덕인지 계단 붕괴는 결국 멈췄다. 하지만 공중 정원의 꼭대기부터 이미 반 이상의 계단이 사라져 버렸다.
“세상에….”
그 참혹한 현장을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게 출발했다면 붕괴에 휩쓸릴 뻔했다.
마거리트가 이렇게 돌발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계단에 휩쓸렸을 수도 있었다. 내 드라이어드가 날 보호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높이의 공중에서 제대로 날 지켜 줄 수 있었을까?
마거리트는 안전지대에 들어섰지만 멈추지 않고 공중 정원을 완전히 내려갔다. 그러곤 태엽이 끊긴 인형처럼 우뚝 멈춰 섰다.
“…마거리트?”
그녀는 어쩐지 비 맞은 강아지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괜찮다고 내려 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한 번….”
파아앗.
마거리트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갑자기 그녀에게서 은은한 하얀 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플로피 해트에 장식된 하얀 꽃 두어 송이가 낙엽처럼 뚝 떨어졌다.
드라이어드를 상징하는 꽃은 드라이어드의 몸 어딘 가에 피어나거나 장식되어 정체성을 드러낸다. 아무리 격한 전투가 벌어져도 그 꽃이 떨어지거나 손상된 적은 없었다. 심지어 불길 속에서도 타지 않았다.
그런데 마거리트의 모자에서 꽃이 떨어져 내린다고?
“마거리트!”
마거리트에게 나타난 이상 현상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의 하얀 볼에 검은 얼룩이 멍처럼 생기더니 번지기 시작했다. 왼쪽 볼에서 시작된 검은 얼룩은 거미줄처럼 가늘게 갈라져 뻗어 나가 턱 끝과 귀까지 잠식해 손바닥만 한 크기가 되었다. 꼭 마거리트의 볼에 균열이라도 생긴 것처럼 보였다.
“마거리트! 괜찮아? 정신 좀 차려 봐!”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내 부름을 들은 것인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초점이 없는 그녀의 샛노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더니 점차 물기가 차올랐다. 맑은 눈물이 터진 샘처럼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진리… 살아 있어? 정말 살아 있어?”
울먹이는 목소리가 아프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왜 그러는 거야? 나 이렇게 잘 있잖아.”
“내 진리… 살아 있어…. 살아 있구나….”
마치 그녀는 날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보고 있었다. 뒤이어 그녀가 한 말은 내 심장이 멎을 뻔하게 만들었다.
“내 진리는… 한 번 죽었어.”
동시에 그녀의 모자에서 마거리트 꽃 한 송이가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