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 이건 또 뭐야?”
“코가 마비될 것 같아. 진짜 지독한 향기야.”
액체를 맞은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이 기겁하며 몸을 털어 냈다. 단순히 불쾌한 감각만 느꼈다면 다행이지만 사태는 심각해졌다.
털썩.
무언가 둔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놀랍게도 페리윙클이 손에서 무기를 놓친 것이었다.
“어… 손에 힘이 하나도….”
자신도 모르게 벌인 일인지 그의 얼굴엔 당혹감이 가득했다. 뒤이어 카돈이 양 무릎을 꿇고 무너지더니 이내 앞으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정신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닌지 부릅뜬 두 눈이 흉흉했다. 억지로 버티기 위해 이로 입술을 물어뜯는 모습이 악귀처럼 보였다.
몸이 제어가 되지 않으니 입술과 맞닿은 땅의 풀과 흙까지 입에 담을 정도로 처절했다.
로즈우드는 벌목당한 나무처럼 옆으로 기우뚱 쓰러졌다. 그 옆에서 칼미아가 자신보다 장신인 로즈우드의 몸뚱이를 어깨로 받치며 힘겨워했다. 그녀는 한 손을 지지대처럼 무릎에 대고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시들링 대신 온몸으로 액체를 맞은 벨라돈나는 스태프를 지팡이 삼아 겨우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이미 한 번 흡혈로 인해 비슷한 피해를 받았기에 쓰러질 법도 한데 엄청난 정신력으로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 중 그나마 멀쩡하다고 볼 수 있는 건 날개를 달고 있는 칼미아뿐이었다.
제때 바곳이 나서 줘야 했지만 벨라돈나처럼 이미 한 번 흡혈 능력에 당한 데다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가 나 대신 액체를 다 맞은 터라 애가 휘청거렸다.
애드너의 배 위에선 단순히 향기가 퍼진 정도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액체는 그 향기의 몇 배나 되는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데이지도 적잖게 영향을 받아 무릎이 살짝 꺾여 있었다. 다만 날 안은 메스키트는 겉으론 멀쩡해 보였는데 표정으로 보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또 아닌 것처럼 보였다. 방어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흐트러져선 안 된다. 전형적인 탱커의 자세였다.
정신을 일깨우는 찬물 같은 산약초 향이 일대를 휩쓸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바곳이 디버프 해제를 사용했을 땐, 이미 다들 한바탕 난리를 겪은 후였다.
“대체 뭐지?”
겨우 공격 한 번에 이 정도로 당한 것이 억울한 것처럼 칼미아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카돈은 턱에 잔뜩 묻은 흙과 풀떼기를 떼어 내지도 않고 연신 잡히면 죽여 버리겠다고 저주처럼 중얼거렸다.
칼미아의 의문이 이해가 갔다. 다들 실력이 대단한 드라이어드였다. 그들의 적수인 불을 상대론 고전할 수 있긴 해도, 이번엔 불도 아닌 누군가의 공격 한 번에 너무 큰 혼란을 겪었다.
‘공격은 한 번이지만….’
분명 눈 색과 함께 변한 내 시야는 투명한 액체에서 아지랑이처럼 움직이는 청록색 아우라를 잡아냈다. 매우 이질적인 모습이라 어쩌면 남들은 볼 수 없는, 나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광경이란 확신이 들었다.
액체는 아주 진하게 농축된 드라이어드의 어떠한 힘의 결정체였다. 단델리온의 파나케이아와 비슷했다.
그 힘은 섬의 허브 드라이어드가 가진, 향기로 남을 진정시키는 능력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진정 작용이 아주 강하게 발현되면 사람들의 기억이 휘발될 정도로 독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드라이어드만으론 이만큼의 힘을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만약 드루이드와 영혼의 연결을 한 드라이어드라면 등급과 레벨이 아주 높은, 최정상 스펙의 드라이어드일 것이다. 그러나 섬엔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뿐이고 그마저도 포레스트의 로드급 드라이어드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섬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농축되어 힘을 갖게 된 향기처럼, 아주 많은 수의 허브 드라이어드들의 힘을 모아 사용했다는 뜻이었다. 단순 여러 명으로 부릴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수십, 아니 수백은 되는 드라이어드들이 한꺼번에 힘을 사용해야 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섬엔 수백이라고 불릴 만큼의 드라이어드도 없었다. 모두 모였다는 드라이어드들의 수를 헤아려 봤을 때 마을 사람들보다 수가 적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은 것처럼 눈이 시렸다. 눈을 감았다 뜨니 나를 중심으로 무형의 기운이 파도치며 사방으로 번졌다.
그걸 인식했을 때 또다시 무형의 기운이 퍼져 나갔다. 호수에 돌을 던졌을 때 여러 차례 파문이 이는 것처럼, 나를 중심으로 여러 번 기운이 원형으로 퍼져 나갔다.
소리가 있는 것도, 빛이 나는 것도 아니라 남들이 알아차릴 수 없고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변화였다.
그리고 파문의 횟수가 늘어 갈 때마다 땅 아래쪽에서 희미한 하얀 빛을 볼 수 있었다. 구형의 빛은 기운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물감을 덧칠한 캔버스처럼 선명해졌다. 마침내 모든 빛이 선명해졌을 때, 내 발밑에 수백 개의 빛이 밤하늘의 별처럼 박혀 있었다.
아니, 별은 아름답기라도 하지, 땅 아래 빛은 어딘가 기괴함이 느껴졌다. 속을 울렁거리게 할 정도로 징그럽고 섬뜩한 기분이 들게 했다.
“빛이… 하얀 빛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이상을 느낀 메스키트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내 정신이 밑도 끝도 없이 아래로 끌려갔다.
영혼만 붕 떠 땅 아래를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굴삭기처럼 땅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는 동안 수많은 빛이 내 주위를 지나쳐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빛들과 같은 공간에 있게 되었을 때,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빛은 빠르게 형태를 갖췄다. 팔다리가 자라고 머리가 생겼다. 곧이어 온전히 사람의 형태가 되었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빛들이 그렇게 변화했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살아생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광경이었다.
수많은 드라이어드들이 거대한 석벽으로 둘러싸인 땅굴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땅 위를 뛰어다니는 드라이어드들보다 땅굴 속의 드라이어드들이 더 많았다.
드라이어드들은 식물의 줄기에 전신이 칭칭 감겨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니 가을을 맞아 바짝 마른 낙엽처럼 자연스레 굽어진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바곳이나 덜 자란 데이지 크기의 드라이어드들이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노인처럼 비쩍 말라 주름지고 생기는 없는 상태로 허덕이고 있었다. 노란 줄기에 벌레의 고치처럼 칭칭 감겨서….
덩이 식물인 고구마나 감자처럼 다들 하나의 덩이가 되어 땅굴 곳곳의 벽에 붙어 있었다.
아니 덩이 식물들은 뿌리에 양분을 저장하지, 지금 보는 것들은 반대로 양분을 빨리고 있었다.
여기 오기 전 보았던 드라이어드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외형이 무척 아름다웠다. 제퍼의 히아신스가 말하길 드라이어드들은 드루이드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현란한 겉모습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던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모습들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숨만 살아 붙어 있는 미라들이었다.
드러난 뼈마디, 벌레의 피막처럼 탄력 없는 얇은 거죽, 죽은 생선처럼 빛을 잃은 눈….
형형색색의 장비와 장식된 꽃이 아니었다면 그 근본이 드라이어드였음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기괴한 살아 있는 시체들이었다.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흐르자 그제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겨우 알아차렸다.
징그럽다, 끔찍하다, 소름 끼친다 등 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감정 속에서 정작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슬프고 괴롭고 안타깝다는 감정들이었다.
난 대체 무슨 ‘눈’을 뜨게 된 걸까? 이런 걸 보게 되는 눈이라면 차라리 뜨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제이!”
메스키트가 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급격한 속도로 지상으로 끌어 올려졌다.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정말 토할 것 같았다. 메스키트에게 내려 달라고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막았다. 쓰고 화끈한 위액이 식도 깊숙한 곳에서 응어리지고 있었다.
하지만 메스키트는 힘을 주어 끌어안으면 안았지, 절대 내려 주지 않았다.
“제이, 정신 차려요!”
“제이 님! 공격을 당하신 건가요?”
아니, 난 내 드라이어드들이 자진해서 날 가리며 대신 액체를 뒤집어썼기 때문에 한 방울도 맞지 않았다. 최강의 탱커가 날 지키고 있었다. 그녀에게 틈은 없었다.
내 모든 이상은 달라진 시야가 포착한 괴이한 광경들 때문이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 턱 끝에 맺혔다 떨어졌다. 데이지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보다 더 서럽게, 내 생에 이렇게 울어 본 날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온갖 감정이 담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 감정은 나 하나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감정들까지 맡겨진 것처럼 밀도가 높았다.
정신 차려야 한다. 여긴 아직 전투가 벌어지는 위험한 전장 속이다.
다행히 제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토할 것 같던 속도 간신히 진정되었다. 온몸이 잔뜩 긴장한 탓에 숨이 가빠졌다.
“저 새끼… 저 새끼….”
“제이, 내 주인, 제이. 어딘가 좋지 않다면 내게 말해 줘요. 당장 여길 떠날게요. 제이가 잘못되는 걸 절대 볼 수 없어요.”
강렬한 스모크 향이 내 모든 후각을 뒤엎는다. 덕분에 아직까지 땅굴 속의 광경에 사로잡혀 있던 시야가 완전히 돌아왔다. 날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모두가 한눈에 담긴다.
“저 새끼…. 저거 드라이어드였어.”
어떻게 수많은 드라이어드의 힘이 농축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는가?
그걸 방금 보고 왔다. 수많은 드라이어드가 땅굴 속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빨리고 있었다.
섬에 드라이어드들에게 비정상적인 환경이 구축되어 있다는 점, 왕의 자질을 갖춘 드라이어드가 없어서 엘더 플라워가 쉽게 구심점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 외부보다 비교적 성장이 덜 된 드라이어드들만 보였던 점…. 그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광경을 보고 왔다.
괴물? 아니 이 모든 것이 괴물 같은 짓을 벌이는 드라이어드의 소행이었다.
수십? 어쩌면 내가 헤아리지 못했을 엄청난 수의 드라이어드가 땅굴 속에 묻혀 링거 팩처럼 흡혈당하고 있었다.
생명은 물론 능력까지 빨려 가며.
대체 어떤 드라이어드가 이런 기괴한 일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