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8화 (258/604)

“괜찮아요. 저 혼자 해결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이 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는 폭력을 행사할 확률도 높습니다. 저 남자도 드루이드죠? 제이 님께서 아직 겪어 보지 않으셨을 수도 있지만 드루이드에게 과하게 충성하는 드라이어드는 남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가 드라이어드의 힘을 사용해서 제이 님께 협박이라도 하려고 한다면….”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에게 미움을 산 적이 있긴 하지만 그 드라이어드들은 여태까지 내게 과하게 대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제 주인을 잘 부탁한다고 알랑거리면 모를까. 아니 내가 지금 이걸 진심으로 고민할 필요가 없는데.

“그 과한 드라이어드들을 제가 데리고 있어서요.”

메스키트를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메스키트는 물론 내 드라이어드들이라면 실제라도 내가 그런 일을 겪는 날이 올 때, 상대가 온전히 걸어다니지도 못하게 만들 것 같았다.

“정말 괜찮아요. 여태 저 남자가 제게 접근하지 못하고 겉돌며 지켜보기만 했던 건 제 드라이어드들이 극성이기 때문이랍니다. 제 드라이어드들은 저의 안전에 관한 거라면 자비를 두지 않아요.”

“오, 어떤 드라이어드들을 데리고 있나요?”

벤에플이 끼어들었다. 드루이드끼리 통하는 주제가 있다 이거지. 그러고 보니 일레이디아는 드루이드가 아닌 일반인인 것 같네.

“음, 비밀이에요. 아시잖아요? 남들에게 쉽게 드라이어드의 종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숙련된 드루이드의 방식이잖아요.”

기껏 평범해 보이려고 초보자 장비까지 맞춰 입었는데, 스페셜이나 유니크 등급의 드라이어드들을 가지고 있다 말하기엔 노력이 헛수고가 될 터였다.

“그렇긴 하지만 그건 모험에 중점을 둔 드루이드들이나 그렇죠. 절 보세요. 이 애들을 거리낌 없이 내보이고 있잖아요? 거기다 우리가 남인가요? 저흰 한 조잖아요.”

벤에플은 광대 복장을 한 드라이어드들을 비롯해 둘을 더 필드에 꺼내 두고 있었다.

“그럼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알려 드릴게요.”

우리 조가 조원 모집과는 상관없는 대화로 시간을 보낼 동안 벌써 합격한 조가 둘 더 나왔다.

1차 시험 성적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사람들끼리 조를 이루겠다며, 초반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응시자들이 포함된 조도 있었다. 하지만 의아하게도 그 조에 1등을 했던 사람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정작 그런 의견을 냈던 건 1등이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며 그를 찾으니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한 얼굴로 몸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 누군가 지적을 통해 심어 준 치터에 대한 불안을 결국 이겨 내지 못한 건가?

“완벽주의잔가? 마음먹었던 대로 상위권들과 조를 이뤘다면 합격했을 텐데.”

내가 보고 있는 곳을 함께 본 벤에플이 입을 열었다.

“정작 치터로 의심했던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조를 이루고 합격한 걸 보면 속 꽤나 쓰리겠어요.”

“그쪽이 보기엔 어떠세요? 저 1등한 사람이 치터로 보이세요?”

“아뇨, 전 만약 치터라면 굳이 1등을 해서 눈에 띄는 일을 벌이진 않았을 거란 입장입니다.”

“그럼 매지컬 레이디의 조원으로 저분을 섭외해 보는 건 어때요?”

“하지만 레이디가 아니잖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매지컬 레이디란 조의 이름에 걸맞게 직업이 마술사거나 레이디를 섭외해야죠. 한번 시작한 컨셉은 쭉 유지해야 뒷말이 없습니다.”

“대체 시험에서 누가 그런 걸 신경 쓴다고 그래요? 그렇게 따지면 저도 레이디가 아니잖아요!”

“그럼 이름에 레이디가 들어가는 분까지 포함하죠.”

일레이디아는 숫제 입에 거품이라도 물 것처럼 분노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쩐지 지켜보는 내가 다 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가 가서 물어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벤에플은 빠른 걸음으로 1등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름에 레이디가 들어가시나요?”

대뜸 꺼내는 벤에플의 말에 일레이디아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쫓아갔다.

“그만 놀리라고!”

“하하하.”

벤에플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구호 활동을 하는 단체에 소속될 정도면 참 심성이 곱고 바른 사람일 텐데…. 그런 일레이디아를 성난 황소처럼 홀 안을 뛰어다니게 만들다니.

일레이디아가 쫓아오는 바람에 말만 건네고 수습은커녕 도망 다니느라 바쁜 벤에플 대신 내가 1등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그는 손을 들어 마른 세수를 한 번 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날 바라보았다. 지친 눈빛이었다.

“안녕하세요. 조원 모집 때문에 오신 건가요?”

“네, 저흰 이미 3명이서 조를 이루고 있는데 저희와 함께하시는 건 어떠세요?”

“…하지만 세 명 중 치터가 있을 수도 있고 카드의 글자가 겹칠 수도 있고…. 그러니 우선 확률적으로 접근해 봐야….”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계속 의심만 하다가 언제 시험 문제를 풀려고 그러세요? 벌써 합격한 조가 3개나 있는데. 다른 응시자들도 활발하게 움직이는 걸로 봐선 다른 합격 조도 금방 또 나올 거예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하나의 조가 문제를 풀고 홀을 나갔다.

“그렇겠죠.”

“확률 따지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하지만 확률적으로 접근해 보세요. 안전한 사람들은 합격할수록 계속 줄어들고 있어요. 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적을수록 위험 부담이 커지지 않을까요? 처음엔 자신을 제외한 100명 중에 1명의 확률이었는데, 보세요. 이젠 85명 중에 1명이 됐어요.”

“맞는 말이긴 하지만 솔직히…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꾸만 사람들이 의심되고 합격하지 못하는 상황이 걱정되어서요. 물론 제 눈앞의 당신도 의심스럽긴 합니다만….”

시험을 막 시작했을 땐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에 주장도 잘 피력하더니, 갑자기 사람이 여기까지 무너져 버렸네.

스스로 부담을 크게 키우고 그 부담에 억눌려 행동을 제약받는 타입인가? 능동적이던 사람이 스위치를 끈 것처럼 한순간에 수동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난 이 1등 한 남자가 시험에서 가장 먼저 합격하는 조가 되고 그 조를 이끄는 리더가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만점을 받아서 1등 할 정도면 똑똑한 인재일 테니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우리 테라리움에서 일해 주면 좋겠는데.

“그럼 제가 왜 치터라고 생각하세요?”

“네?”

“치터가 아닌지 의심하지 말고 반대로 제가 반드시 치터라고 생각해 보세요. 아닌 이유를 찾는 것이 힘들다면 제가 치터인 이유를 따져 보면 되잖아요? 그럼 모순이 나오지 않을까요?”

“음… 당신은 일단 드루이드니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한 편법으로 시험을 봤겠죠.”

“그렇다면 홀에 있는 모든 드루이드를 거르면 되겠네요. 못해도 10명은 넘게 보이는데.”

“그리고….”

“그리고 또 뭐요?”

“딱히 없네요….”

“그럼 저 사람은요? 저 사람이 치터이지 않을까요?”

난 아직도 일레이디아를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벤에플을 가리켰다.

“저분도 드루이드인데다 마술사라고 했으니 눈속임에 능숙한 사람이긴 하죠. 과수원 직원으로 채용되고 싶은 명확한 이유도 있으니 편법을 써서라도 시험에 합격하고 싶어 했을 겁니다.”

“그럼 저 사람이 확실히 치터일까요?”

“하지만 이미 행정 관리원이 치터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상태고 불합격이 명확한데, 시험 합격을 위해 위조 카드를 뿌리면서까지 노력을 할 거라곤….”

“그럼 저 사람은요?”

난 이후로도 아무나 몇 명을 가리키며 남자의 대답을 유도했다. 그는 치터인 이유를 여럿 대면서도 모순적이게도 그가 치터일 수 없는 이유를 함께 댔다. 듣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주어진 정보를 습득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사전에 응시자들을 조사하기라도 한 것이 의심될 정도로 응시자들의 인적 정보를 꽤 잘 해석해 냈다.

“과수원 직원 시험 기출서를 가지고 다니던 걸 봤어요. 책을 보면 공부를 꽤 오래 한 사람이에요. 시험 문제는 아주 어려운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편법을 써야 할 수준의 사람은 아닙니다.”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누군가를 가리켰을 땐 이렇게 말했고.

“그가 지나면서 사용했던 ‘산하엽처럼 투명하게’라는 문구는 유명한 회계 학원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대대로 과수원의 경영 부서 쪽에 학생들을 많이 합격시키는 학원이다 보니, 학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학생들이 부정을 저지르지 않게 항상 투명한 다이아 관리를 모토로 주입시키기 때문에 편법과는 어울리지 않는….”

진지하게 토론을 나누는 안경 쓴 사람을 가리켰을 땐 이렇게 말했고.

“마술사가 카드를 뿌리기 위해 드라이어드의 힘을 사용했을 때 잔뜩 겁에 질려 있던 것을 봤습니다. 심약한 사람이라 시험에서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기엔 담력이 되지 않고, 만약 치터라면 치터가 있다는 걸 행정 관리원이 밝혔을 때 기절이라도 했을 겁니다.”

소파에 위축된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을 가리켰을 땐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잘하시는 분이 왜 이러고 계세요?”

그는 내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피아 게임에서도 활발하게 토론에 참여하다 한번 지적을 받으면 입을 다물어 버리는 타입이 이 남자였던 것이다. 너 왜 그렇게 말이 많아? 말이 많은 거 보니 마피아 아냐?

“오, 이야기는 잘되어 가고 있나요?”

가볍게 산책이라도 한 표정의 벤에플이 돌아왔다. 반면 일레이디아는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좀비처럼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네, 저희 매지컬 레이디의 4번째 조원이 되실 분이에요. 그런데 이름이?”

“아직 조원이 된다곤 안 했지만…. 하, 어차피 이러고 있어 봤자 또 혼자 남겠죠. 전 ‘오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런, 이름에 레이디가 없으니 불합격입니다.”

벤에플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실실댔다.

“그럼 이 사람은 1등이니까 조 이름을 바꿔요. 더 퍼스트 매지컬 레이디로. 웅장하고 좋네요.”

“그렇게 하면 합격이죠.”

“조 이름이요? 이 시험에서 조 이름을 정해야 된다는 룰도 있었나요?”

“그냥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세요.”

일레이디아가 지친 목소리로 말하는 동안 또 하나의 조가 홀을 나가며 합격을 알렸다.

이제 모래시계의 모래는 적당히 높이를 쌓았다.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두셋씩 뭉쳐 있어서 마지막 한 명을 구하는 게 까다롭겠네요.”

시간이 많이 흐름에 따라 혼자 다니던 사람은 이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들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혼자 남은 사람은 카드 장사꾼 하나였다. 결국 저 사람은 함께 일하게 될 동료로 선택받지 못했구나.

“지금까진 단순히 조원 영입이었다면 이젠 조금 바뀌었네요. 조원 뺏어 오기로.”

벤에플이 몇몇 조를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처럼 바라보았다.

난 여차하면 이 조에서 빠질 것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 난 정식으로 시험을 보는 응시자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나가면 둘을 데려올 수 있겠지.

“이렇게 배신하시면 어떡해요?”

“이걸 배신으로 보기엔… 사람 수가 맞지 않으니 찢어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마침 제가 가진 카드가 저쪽에 없다잖아요.”

우리처럼 조원이 애매하게 맞춰진 쪽에서 트러블이 생긴 것이 보였다.

4명이 모인 조에서 사람을 데려가기 위해 3명이 모인 조에서 사람을 데려가는 상황이었다.

결국 조원을 빼 가며 5명을 채운 조가 홀을 나갔다. 남겨진 둘은 굉장히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쪽도 사람 빼 가려면 트러블이 생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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