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응시자라면 할 수 없는 말, 보장된 합격. 내 말에 다들 의문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곧 알게 될 거예요. 그것보다 다들 성격도 급하지, 밥은 다 먹고 해도 될 텐데. 벌써 우르르 홀을 나가는 걸 보니 이러다 우리 조가 꼴등으로 남겠어요.”
“제이 님, 단순히 저 대신 빠지기 위해 둘러대는 말인 건 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둘러대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합격이 보장되어 있다는 말은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지금 당장 내가 행정 관리원인 걸 밝혀야 할까?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닌데.
벤에플은 이미 확고하게 마음을 먹은 터라 내가 자신 대신 조에서 빠지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더구나 자매 쪽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누가 빠지든 우리 다 같이 배웅해 주는 건 어때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다들 문 앞으로 이동해요. 합격하는 조를 배웅해 주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는 걸 내보이는 거나 다름없으니 누가 됐든 다른 조에 합류하기 쉬울 거예요.”
이렇게 되면 나도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 말하셔도 일단 조에서 빠지는 건 접니다.”
“아니, 아니. 차라리 제가 빠질게요.”
“저희 때문에 이러시는 거니 차라리 저희가 다른 조를 알아볼게요.”
일레이디아 역시 벤에플의 예상처럼 자리를 양보하려고 했고, 자매들은 이런 사태의 발단이 자신들이란 생각에 조에 합류해 달라는 제안을 거두려고 했다.
우리 쪽에서 작게 소란이 일자 남은 응시자들이 이쪽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럼 문 앞에 가서 가위바위보로 정해요. 그게 공평하겠죠? 계속 여기서 아웅다웅해 봤자 시간만 흐를 뿐이에요. 와, 벌써 말하는 사이 홀 밖으로 나간 조가 3개는 더 되겠어요.”
다들 문 앞으로만 이동시키면 된다. 그럼 모두 다 내 뜻대로 이룰 수 있었다.
“가위바위보라… 마술사에게 그런 손장난이 통할 것 같나요?”
“심리 싸움은 저도 지지 않습니다. 전 무조건 가위를 낼 거예요.”
“레이디, 레이디는 아무리 봐도 주먹을 내게 생겼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이것 보세요. 주먹을 내지 않았습니까?”
일레이디아가 그대로 쥐고 주먹을 내지르려는 것을 벤에플이 가볍게 피했다.
“자자, 일단 이동해요. 이동합시다.”
가지 않고 버티려는 자매들도 살살 어깨를 밀며 이동하자 다들 어영부영 문 근처에 도달했다.
가이아 길드원들은 우리가 하는 행동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로웰라는 눈빛만으로도 텔레파시처럼 마음이 통할 것 같았다.
언니 뭐 할 거야? 뭐 할 건데? 뭔진 모르겠지만 빨리 해 봐! 로웰라의 입은 굳게 다물려있지만 왜 이렇게 시끄러운 것 같지?
“만약 홀 밖을 나갔는데 다시 들어오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난 이리스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곤 질문했다.
“안 됩니다. 이미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홀에 되돌아오려고 할 경우 부정행위로 간주하고 불합격 처리를 할 겁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스의 눈에 고양감이 가득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네요? 다들 들었죠? 홀 밖으로 나가게 되면 다시 돌아와선 안 된대요.”
조원들의 머릿속에 잘 각인되도록 열심히 강조했다.
“음… 그게 중요한 건가요?”
오르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당연히 중요하지. 나갔다가 되돌아오면 내가 하려는 게 헛수고가 될 수 있는걸.
“자, 다들 준비해요. 가위바위보 하는 거예요.”
“전… 이런 식으로 정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냥 저희가 빠지는 게….”
“그렇게 되면 다시 4인조만 남아서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시간이 오래 걸리는걸요. 자, 안 내면 무조건 조원!”
내 말에 다들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데이지!”
“데이지?”
내 아티팩트를 통해 순식간에 데이지가 나타났다.
그러곤 줄기를 뿜어내 나를 제외한 다섯 명과 벤에플의 드라이어드들까지 포함해 허리를 칭칭 감았다.
“이게 무슨…!”
조원들은 뭐라고 따져 보지도 못하고 데이지의 줄기에 묶여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열린 홀 문 너머로 내쳐졌다. 아니 합격 조건을 통과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물론 데이지가 내려 줄 땐 그녀의 상냥한 성정답게 아주 사뿐히 내려 줬다. 회수되어 돌아오는 줄기는 홀 문손잡이를 잡아당겨 꼼꼼하게 문도 닫았다.
“이래서 드루이드들이 자신이 무슨 드라이어드를 가지고 있는지 숨기는 거라니까? 방심하면 안 되지.”
데이지는 속전속결로 내가 원하는 바를 행해 준 후 뿌듯한 얼굴로 내게로 돌아왔다.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나보다 훌쩍 커 버린 그녀의 머리 위를 열심히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애가 얼마나 날렵한데. 아무리 드라이어드를 밖에 꺼내 놓았다고 해도 줄기만 꺼냈다 하면 벌처럼 필드를 종횡무진하는 데이지를 상대나 할 수 있겠어?
내가 벌인 기이한 행동에 많은 이들이 얼빠진 표정으로 날 봤다.
“자, 여기까지.”
데이지가 내 마음을 읽고 양손에서 두 갈래의 줄기를 뻗어 경계선을 만들었다. 경계선은 문제를 풀어 홀 문을 나가기 위해 대기하는 응시자들과 아직까지 홀 안쪽에서 조원 모으기에 지지부진한 응시자들을 갈랐다.
점심시간 막판에 응시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던 만큼 홀 안쪽에 남은 사람은 겨우 십여 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제가 개입함으로써 사실상 시험 문제의 답을 대놓고 까발리게 됐으니 진행 방식을 바꿀게요.”
딱!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이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긴 봉을 꺼내 모래시계의 중간 부분을 냅다 후려쳤다. 잘록한 부분이 박살 나자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모래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내리더니 이내 윗부분이 텅 비어 버렸다.
중간에 모래시계를 박살 내는 건, 합격자가 너무 나오지 않을 때 다음 상황으로 넘어가기 위해 미리 이야기해 둔 것이었다.
편법을 사용하긴 했어도 어쨌든 모래시계의 모래는 다 떨어졌으니까.
제퍼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대기 중이던 응시자들을 한 번에 내보냈다.
슬쩍 보니 열린 문 너머로 이쪽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조원들이 보였다.
응시자들을 마저 내보내자 길드원들은 나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시립했다.
그들은 마치 나를 호위하는 것처럼 내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살짝 틀고 잘 훈련된 병사처럼 양손을 등허리에서 맞잡아 열중쉬어 자세를 했다.
더 이상의 위장은 필요 없어서 모자를 벗자 이리스가 극진한 태도로 내 모자를 받아 갔다. 눌렸던 머리를 가볍게 정리하니 시원해서 살 것 같았다.
초보자 장비에 딸려 있던 거추장스러운 망토를 풀어내자 제퍼가 망토를 받았고, 로웰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정장 재킷을 가져와 내 어깨에 얹어 주었다. 길드원들이 맞춰 입은 것과 같은 정장이었다.
누가 봐도 길드원들과 내가 사실 한패였다는 것이 보이지 않을까?
“안녕하세요, 시험에 응시해 주신 모든 분들께 먼저 감사 인사드립니다. 제가 바로 28번째 테라리움의 진짜 행정 관리원 제이입니다. 여러분들 속에 함께 섞여 있던 제가 그 치터였습니다. 물론 부정한 방법을 써서 시험에 합격했다거나 함께 조를 이루면 불합격된다는 이야기는 그저 속임수였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모두 경악한 얼굴을 했다. 림파와 아이들의 얼굴은 더했다. 그들은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렸다.
합격까지 데려가 줄 의무는 없었다고 했지? 누가 누굴 데려가 주겠니.
“약속한 모래시계의 모래는 모두 떨어졌지만 남아 계신 모든 분들이 바로 불합격 처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말에 당황하던 사람들이 미약하게나마 안도하는 얼굴이 되었다.
“응시자 대부분이 믿을 만한 동료를 뽑고 시험 문제의 답을 풀어낸 동안, 여러분들은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모습을 계속 보이셨습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이런 방식의 시험 진행이 무의미하단 판단이 들었습니다. 이번엔 좀 더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물론 치터라는 페널티를 피하기 위해 신중했던 여러분의 태도를 나무라는 것은 아닙니다. 신중한 태도 역시 어떨 땐 장점이 될 수도 있죠.”
난 길드원들을 한 명 한 명 차례로 손을 뻗어 가리켰다.
“여기 있는 분들은 28번째 테라리움의 전속 길드인 가이아 길드의 길드원들입니다. 우리 테라리움에서 가장 중요한 수뇌부들이지요.”
로웰라가 턱을 한껏 치켜드는 것이 보였다. 귀여운 것.
그리고 끝에 서 있는 미미르를 가리켰다.
“저기 계신 분은 제 임시 보좌관 역할로 시험에 참관한 분이시구요.”
미미르를 바라보는 림파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이분들은 2차 시험의 진행을 맡기도 했지만 시험이 진행되는 내내 여러분들을 면밀히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제3자의 시각으로 여러분들을 객관적으로 살펴본 것입니다. 이번에 진행될 2차 시험의 마지막 진행 방식은 스카우트 카드입니다.”
홀 안에 남은 응시자들을 찬찬히 세어 보니 15명이었다. 카드 장사꾼은 물론 림파 4인조는 당연히 남았지만 우습게도 뇌물이나 부정적인 접근 등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도 있었다.
“저를 제외한 총 6명의 가이아 길드원들과 제 임시 보좌관 1명, 총 7명이 여기 남아 계신 15명 중 7명의 합격자를 직접 선출해 낼 예정입니다. 조를 이룰 필요 없이 길드원들의 선택을 받으면 바로 합격입니다.”
엑스맨은 신입생 환영회 때의 기억을 살린 것이고 스카우트 카드는 감명 깊게 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따온 것이다. 스카우트 카드는 탈락 위기에 놓인 참가자를 심사 위원이 단 한 번 발동시킬 수 있는 권한으로 바로 패스시켜 주는 패자 부활전과 같은 시스템이었다.
“잠깐만요! 그렇다면 나머지 8명도 합격 기회가 있었는데 선택받지 못하면 불합격되는 것 아닙니까? 전 5명 조를 이루기 직전이었는데 떨어진다면 너무 억울합니다!”
“글쎄요. 혹시 모르지 않나요? 그쪽 분께서 술을 사 먹인 누군가가 뽑아 줄지도?”
내 말에 질문한 사람과 헤르마가 동시에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자신이 뇌물과 같은 떳떳하지 못한 짓을 저질렀으니 치터 얘기에 과하게 몰입해 동료 선택에 어려움을 겪은 것이겠지.
“전원 합격은 말 그대로 가능성이었을 뿐,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시험 시간이 모두 끝나기 전에 문제를 풀었을지도 정확히는 모를 일이지요. 신중함은 좋지만 때론 과한 신중함과 불신이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또한 누군가는 과한 자만심으로 동료가 될 사람에게 이상한 잣대를 들이대 반대로 선택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내 말에 림파가 이를 바득바득 갈기 시작했다. 얘, 내가 누군지 밝혔는데도 그런 태도는 아니지 않니?
“그럼 길드원들은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합격자를 따로 스카우트해 주세요.”
내 말에 사색이 된 얼굴로 우왕좌왕하는 미미르를 제외한 길드원들이 미리 점찍어 놨던 응시자들을 뽑아 합격자의 신분으로 문을 나설 수 있게 해 주었다.
남은 것은 오직 미미르의 선택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