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0화 (270/604)

“그만 도망 다니고 불의 크기를 좀 봐. 저 정도면 네가 발로 차도 꺼질 수준인데?”

“그러다 발에 불이라도 붙으면 어떡합니까! 쟤들 눈에 전 지금 맛 좋은 장작으로 보인다고요! 드라이어드를 먹은 불이 얼마나 위험해지는지 제이 님도 아시잖습니까? 제 다리를 떼어 먹고 불이 더 강해지면 재앙이에요, 재앙!”

아니 분명 야구공만 한 크기는 해 볼 만하다며?

“하여튼 노멀 놈들은 겁쟁이라니까, 쯧쯧. 제 다리를 주고서라도 적의 목을 노려야지.”

진짜 동족인 드라이어드를 뜯어 먹던 놈이 그런 말을 하니까 어이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패닉 상태인 데이지2를 돕기 위해 총을 들었다.

단순히 보통 불만 끌 수 있는 투척용 소화기 수준의 무기였지만, 불의 움직임을 묶어서 데이지2가 공격할 틈이라도 만들어 줄 셈이었다.

퍽!

총알이 날아가 불에 바로 꽂혔다.

그런데 크기가 워낙 작은 데다 탄환 자체에 아왜나무 드라이어드의 힘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인지 불이 잡혀 버리고 말았다.

흰 거품이 게걸스럽게 불을 뒤덮고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미약한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불은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처음으로 손수 잡은 불이라니….

“진짜 별거 아닌 수준인데….”

내 손에 잡힐 정도면 초보자 사냥터의 1레벨짜리 몬스터들 아니니?

그래도 데이지2의 눈엔 불이 아직 3개 더 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해 보이는 듯했다.

“도저히 답답해서 못 봐주겠군. 내가 관여해도 되겠느냐?”

실새삼이 작은 주먹으로 내 어깨를 콩콩 두드리며 물었다.

“어쩌려고? 아직 묘목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수준인데 힘을 쓸 수 있긴 해?”

“이래 보여도 필드의 가디언이니라. 저 정도 수준의 드라이어드면 눈 감고도 가능하지.”

실새삼이 데이지2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실이 땅에서 뻗어 나와 데이지2의 다리부터 칭칭 감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으악! 이 징그러운 건 또 뭡니까? 기분 나빠요!”

당장 보기엔 실새삼이 데이지2를 괴롭히는 걸로만 보였지만….

실은 점차 데이지2의 상체까지 점령했다. 그러자 그는 도망 다니던 것을 뚝 멈춘 채, 기름칠이 덜 된 기계인형처럼 어색하게 자신을 쫓아오던 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악! 제이 님, 몸이 말을 안 듣는데요?”

“뭘 한 거야?”

“뭘 하긴, 바이오 필드의 드라이어드라면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는 숙주 삼기를 사용했지. 그나저나 정말 약한 드라이어드로군. 이렇게 쉽게 잠식당할 줄이야.”

실새삼은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꽤 힘들어 보였다. 작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이 보였다.

“본래라면 저렇게 약한 몸체 따위 능력만 흡수하고 내가 직접 뛰었을 테지만, 그러기엔 내 몸이 덜 영글었으니.”

실새삼이 손을 뻗자 데이지2가 따라서 손을 뻗었다. 휙 하고 그의 무기가 날아가 깔끔하게 불에 명중했다.

연이어 실새삼이 휘두르는 대로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데이지2가 움직여 금방 모든 불을 해치웠다.

“오, 해치웠네?”

데이지2는 멋대로 움직이는 제 팔다리를 기겁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능력을 끌어낼 필요도 없었다. 그냥 저 정도 수준의 불은 단순히 무기를 휘두르는 정도로 잡을 수 있었어. 저 빨간 드라이어드가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니 직접 움직여 주는 수밖에.”

실새삼은 그 후로도 손을 움직여 데이지2가 해괴한 몸짓을 하도록 만들었다. 꼭 그 모습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하는 데이지2를 향해 민들레 아이들이 신나게 손뼉을 쳐 주었다.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난 섬광이 데이지2와 실새삼을 잇는 모든 실을 끊어 냈다.

붉은 빛의 궤도가 섬뜩하리만큼 날카로웠다.

비슷한 무기를 쓰고도 그 파괴력과 동작의 깔끔함이 데이지2와는 전혀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어라? 데이지?”

“죄송해요. 기분이 너무 나빠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단검을 빙글 돌리며 해맑게 웃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 데이지에게서 튀어나왔다.

“왕이시여! 절 구하러 와 주셨군요!”

데이지2는 우는 척을 하며 제 왕의 다리에 매달렸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포레스트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왕인 제게도 영향이 와서….”

데이지는 내겐 죄송하다는 표정을 했지만 실새삼을 보는 눈은 굉장히 매서웠다.

“너 또 뭔 짓 했어?”

“겸사겸사 대체 왕이 어떤 놈인가 좀 근본을 살펴봤지.”

“그럼 직접 가서 살펴보는 게 어때?”

데이지에게 직접 안겨 줄 기세로 실새삼을 든 채 팔을 뻗으니 그가 미친 듯이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날 죽이려는 것이냐! 넌 나쁜 드루이드다!”

“에이, 설마. 데이지가 널 죽이겠어? 너야말로 겁쟁이 아냐?”

“저 약해 빠진 빨간 드라이어드와 달리 빨간 놈의 왕은 손아귀의 힘만으로도 내 목을 분지를 수 있는 드라이어드다!”

“제이 님, 불편하시다면 제가 맡고 있을게요. 제게 줄기를 뻗을 만큼 심심한가 본데, 제가 잘 놀아줄 수 있어요!”

데이지는 실새삼의 선 넘은 간섭이 꽤나 기분이 나빴나 보다. 해맑은 얼굴로 직접 실새삼을 벌주겠노라 손을 뻗고 있었다.

“얌전히 있으마! 아무것도 안 하고 얌전히 있을 테니 저 빨간 왕에게 날 넘기지 말거라!”

실새삼이 제 모체처럼 내 옷깃을 붙잡고 절대 떨어지지 않을 듯이 내게 들러붙었다.

데이지와 실새삼을 번갈아 보던 마거리트가 길게 콧소리를 냈다.

“흐응, 왕이 되는 건 꽤 멋있어 보여. 나도 왕이 될래!”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왕인 데이지의 멋짐을 발견했는지 전혀 모르겠다.

실새삼에게 잔뜩 겁을 준 데이지는 내게 인사를 꾸벅하곤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데이지2는 세상이 망한 것처럼 허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꿈도… 희망도 없어…. 내 왕이… 날 버렸어…. 아니야, 내가 위험해지면 다시 돌아오실 거야. 우리의 왕은 어질고 강한 왕…. 포레스트의 권속들을 굽어살필 줄 아는 덕망 높은 왕….”

“레벨 1짜리 몬스터 잡는 것 가지고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마거리트의 훈련만 아니면 널 절대 전투에 써먹을 리는 없으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

“차라리 서류를 볼게요! 테라리움으로 돌아가 남은 잔해를 치울게요! 집 짓는 것을 도울게요! 그 일들이 그렇게 보람차고 즐거운 일인지 이제야 깨달았어요. 다시는 힘들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도 꺼내지 않을 테니 제발….”

내가 너무 악당이 된 느낌이다. 어쩐지 데이지2에게서 다이아를 캐고 싶다고 아우성인 난쟁이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자, 저 데이지의 공격력을 봤지?”

난 마거리트에게 데이지2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거리트, 네가 능력을 써서 저 데이지가 어느 정도 큰 불을 단번에 죽일 수 있도록 지원을 해 보는 거야. 물론 데이지2가 피해를 입으면 이 민들레 아이들이 나서야 하는데, 이 아이들도 묘목이라서 힘이 약해. 그러니 단숨에 데이지2가 회복하여 곧바로 전투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하는 거야.”

“응! 내게만 맡겨. 열심히 할게!”

마거리트는 의욕이 넘쳐 눈빛이 활활 타오르는 반면, 데이지2는 마거리트를 보고 겁에 질린 눈빛이 되었다.

“제이 님, 제가 알기론 그 드라이어드…. 능력이 성공할 확률이 낮던데… 아닌가요?”

“응, 맞아. 아마 오늘 안에 성공하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야.”

“실패하면 페널티가 있다고도 알고 있는데….”

“그것도 맞아. 그래도 마거리트가 덜 자라서 페널티 자체가 아주 크진 않을 거야. 여기서 능력 조정을 위한 훈련이 없으면 페널티만 극심해지는 드라이어드가 될 테니 그걸 위해 이렇게 훈련을 하는 거야.”

마거리트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자신의 무기인 책을 꺼내 펼쳤다.

데이지2는 그 모습을 보고 슬슬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왜 하필 저인가요! 저는 28번째 테라리움의 부흥을 위해 밤낮이고 일만 한 죄 없는 드라이어드인데요! 제이 님의 테라리움을 위해 이 한 몸 다 바쳤는데 왜 제게 이러시는 거예요!”

“미안, 네가 고생한 건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겐 너보다 약한 공격형 드라이어드는 없는걸.”

“부당합니다아!”

멀리서 인공개량 드라이어드들이 작은 불들을 양치기 개처럼 몰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불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본능적으로 슬금슬금 피하기도 했다.

이 일대를 점령한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에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으니, 그 점을 이용해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도주로를 막고 우리 쪽으로 유인을 해 주고 있었다.

불을 발견하는 즉시 죽이지 말고 내가 있는 곳으로 데려와 달라는 부탁을 그들은 잘 수행해 주고 있었다.

난 불을 향해 다이아를 던지며 말했다.

“자자, 어차피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이참에 네가 키운 민들레 아이들에게 멋진 모습이라도 보여 줘 봐.”

“제이 님은 나쁜 드루이드! 아니 나쁜 드루이드는 아니고 제게 소중한 드루이드지만… 그래도 지금은 나쁜 드루이드. 아니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행동은 나빠요. 제이 님 나빠요. 아니 소중해요.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하시는 명령은 나빠요!”

마거리트의 능력이 횡설수설하는 데이지2에게 적중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의 주위에 잿가루가 떠다니게 만들었다.

교습소 직원 채용 시험에서도 마거리트가 쉴 새 없이 엘더를 향해 능력을 사용하게 만들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물론 성공했을 땐 그 전투에서 불합격자를 만들 정도로 강한 변수를 가지고 있는 능력이긴 했다.

“자꾸 그러면 실새삼이 또 널 가지고 놀려고 들 수도 있어.”

“그건 제 왕께서 싫어하세요!”

“정말 이번만 널 훈련에 참가시킬 게. 너무 싫어하니 어쩔 수 없지. 견디기 힘들더라도 오늘만큼은 테라리움에 훗날 불이 침범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연습 삼아 임한 다는 마음으로 버텨 봐. 그땐 네 자신이라도 지켜야 할 거 아냐?”

데이지2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마거리트의 훈련에 어울려 주었다.

마거리트는 틈틈이 데이지2를 향해 실패한 제 능력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공격력이 낮은 데이지2는 페널티의 영향으로 적중률도 떨어져 흠씬 두들겨 맞고 있었다.

곳곳에 바크가 타들어 가고 상처를 입기 시작하자 마거리트는 크게 당황하여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회복의 힘을 열심히 써 보려는 민들레 아이들의 능력도 미약해서, 데이지2는 갈수록 지쳐 갔다.

“으앙, 미안해요. 왜 자꾸 실패를 하지… 아, 어떡하지. 도움이…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마거리트는 제 능력의 실패가 전투에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 아주 제대로 학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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