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 마거리트가 원했던 대로 그녀의 활약상을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열심히 설명해 줬다. 조금 피곤하긴 해도 오늘 하루 성장이라는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는데 성공한 내 예쁜 마거리트니 열과 성을 다했다.
못난 드루이드 때문에 이제서야 새로운 능력을 발현하다니….
그녀를 위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투자했다면 금방 이렇게 잘 자랐을 것을….
앞으론 내 시간을 알뜰히 줄여서라도 너에게 열심히 투자하마.
후발 주자니까 남들보다 더 열심히, 빨리 뛰어야겠지?
마거리트는 내가 칭찬하는 내내 손뼉만 쳐 주면 춤추는 강아지처럼 신나게 으스댔다.
메스키트는 그런 내게 어울려 주며 진심을 담아 마거리트의 노고를 치하했다.
엘더는 마거리트가 기고만장해질수록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그는 진심으로 이 상황을 껄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마거리트의 성장을 축하해 줘도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싫니?
“조금만 기다려라. 얼굴 빼곤 쓸모없는 꽃아! 내가 진리의 최고의 꽃이 될 거야! 조만간 너 따위는 내 진리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작작 좀 떠들어!”
퍽!
엘더는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마거리트에게 힘껏 내던졌고, 침대에 놓여 있던 푹신한 베개가 그녀의 얼굴에 적중했다.
“쳤어? 쳤어!”
“쳤다, 왜!”
내가 살던 세계에서 책은 무기가 아니란 말이 있지만 마거리트의 책은 명백하게 무기였다.
그녀는 내가 봤던 그 어떤 책보다 두꺼운 하드커버의 책을, 심지어 진화 후 더욱 위협적으로 변모한 그 책을 엘더를 향해 휘둘렀다. 엘더도 질세라 스태프를 휘둘렀다.
좁은 방 안에 털 대신 두 드라이어드의 꽃잎이 나풀나풀 흩날렸다.
둘이 벌이는 육탄전은 어쩐지 매우 익숙해 보였다. 공방의 합이 철저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짜고 치는 연무라도 펼치고 있나 하는 의심이 들게 했다.
마치 지금도 티격태격하는 민들레 아이들이 자라 저 정도 크기가 되어 싸울 때, 꼭 그런 느낌이 들 것 같았다.
그래, 현실로 치면 둘은 연년생의 남매처럼 보였다. 엇비슷한 하얀 머리 하며.
그리고 메스키트는 매우 익숙하게 두 드라이어드의 목덜미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림으로써 육탄전을 종결시켰다.
“그만, 어째서 세계수 밖으로 나와도 너희 두 꼬맹이는 달라지는 것이 없을까?”
둘은 거대한 메스키트의 손아귀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도 입을 쉴 새 없이 놀렸다.
“엘더가 먼저 쳤어요!”
“저게 입을 안 다물잖아! 대체 얼마나 떠들 작정이야? 밤새도록 칭찬받을 셈이야?”
“너 샘나서 그러는 거 다 알아! 내 진리가 날 칭찬하니까 질투하는 거잖아!”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다시 세계수로 돌아가고 싶어질 만큼 내게 교육받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그 협박은 좀 섬뜩했다. 드라이어드에게 세계수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죽음이었다.
두 하얀 고양이는 마침내 발톱을 숨기고 부풀렸던 털을 제자리로 돌렸다.
“자자, 정말 그만하자. 나도 이제 슬슬 자야겠어.”
메스키트의 눈치를 보면서 기가 죽어 있는 둘이 안쓰러워 거들었다.
메스키트는 내 말에 굳은 표정을 풀곤 둘을 놓아주었다.
둘은 땅에 발이 닿자마자 서로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이미 머릿속으로 수십 번은 치고받고 싸우고 있을 것 같았다.
난 땅에 떨어졌던 베개를 주워 털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오늘 하루 정말 열심히 움직였다. 덕분에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의 수마가 덮쳐 왔다.
난 버티지 않고 기꺼이 눈을 감았다.
***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질 줄 알았다.
하지만 붕 뜬 의식이 천천히 두 눈을 뜨는 것이 느껴졌다.
커튼이 걷히듯 눈이 떠지고, 아니 눈을 떴다고 생각하자 노이즈가 잔뜩 낀 고전 필름 영화 같은 장면이 시야에 가득 찼다.
“너희를 만나서 난 행복해.”
“우리도 마찬가지야.”
본 적 있는 모습이었다.
은둔자의 정원의 꼭대기 신전에서 환각처럼 들여다봤던 과거 누군가의 모습.
로브로 얼굴을 가린 그는 최초로 필드의 가디언을 모두 모아 세계를 멸망시켰던 드루이드였다.
그리고 그 앞엔 성인의 모습인 실새삼이 함께 서 있었다.
“이 모험의 끝엔 뭐가 있을까 궁금하지 않아?”
“난 우리에겐 끝이라는 게 없었으면 좋겠는데, 벌써 끝을 생각하는 거야?”
그 드루이드는 자신의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평화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곁에 선 드라이어드 중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이상하게도 실새삼과… 벨벳 메스키트뿐이었다.
다른 드라이어드는 마치 검은 안개가 응축되어 형체를 갖춘 것처럼 일렁이는 바람에 정확한 모습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벨벳 메스키트의 경우 나와 함께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마도 전대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일 것이다.
드루이드가 데리고 있는 메스키트는 남성체였다.
여성체인 내 메스키트와 비슷한 생김새에 거대한 덩치와 묵색 갑옷은 완전 똑같았다.
나의 데이지와 데이지2, 민들레 아이들, 두 엘더 플라워의 경우처럼 전대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과 내 메스키트는 쌍둥이라도 해도 될 정도로 흡사하게 생겼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모험이 끝난다고 우리 사이도 끝나는 게 아니잖아. 어쩌면 우린 어딘가 인적이 드문 곳에 큰 집을 짓고 다 함께 살고 있지 않을까? 어디가 좋을까? 난 바다도 좋아. 바다니까 외딴섬은 어떨까?”
“넌 정말 우리랑만 평생 살 거야? 인간 사회에서 가족을 이룰 생각은 안 해?”
“난 정말 너희면 충분해.”
섬의 환각 속에서 그 드루이드는 어쩐지 목소리조차도 안개 낀 것처럼 애매모호하게 들렸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너무 선명하게 들려왔다.
20대 정도의 젊은 남성의 목소리, 가수를 해도 좋을 만큼 깔끔하고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얼굴은?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후드를 깊게 써 가리고 있는데.
어둠 속에 가려진 그 얼굴이 궁금해서 들여다보기 위해 시야를 옮겼다.
난 마치 카메라를 통해 관망하는 것처럼 그를 향해 시야가 천천히 줌 인 되는 것을 느꼈다.
그 드루이드가 문득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드라이어드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후드 안에 얼굴은 없었다. 아니 이목구비 중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눈뿐이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새까맣게 응축된 검은 안개가 있었고, 그 안개의 어둠 속에서 밝게 빛을 내는 두 개의 별처럼 선명한 금안이 희번덕 날 바라보았다.
금안, 마치 내가 거울을 통해 봤던 내 두 눈과 같은 금안.
그리고 내 시야는 마치 그에게 흡수되는 것처럼 빠르게 그와 가까워졌다.
시야가 반전됐다.
난 어느새 그 드루이드의 자리에 서서 그가 보는 광경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이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드는 거야? 매일 징징거렸으면서.”
“생각해 보면 따분한 집보단 이렇게 여행을 떠나 돌아다니는 게 더 마음에 들더라고. 물론 가끔 집 생각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난… 아니 우린… 좀 더 네가 인간 사회를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어. 넌 우리의 소중한 작은 세계수지만 그래도 인간이잖아? 카수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됐어! 그냥 우리끼리 살아도 돼. 인간 사회가 뭐 대수야?”
너무나도 평화로운 일상 속 대화.
내가 은둔자의 정원에서 본 환각에서의 그의 모습과는 어쩐지 많이 달랐다.
그때의 그는… 어딘가 궁지에 내몰린 조급함 같은 것이 있었다.
드루이드에게 우리끼리 함께 살자며 이야기하던 실새삼이 문득 손을 건넸다.
나는 드루이드와 시야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그 손길은 마치 내게 내미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이.”
아니, 그는 정말로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과거를 보여 주는 꿈에서 내 이름을 부를 리가 없었다.
드루이드의 이름은 은둔자의 정원에서도 들었고 지금도 들었다. 그의 이름은 카수스였다.
강제로 그에게 잡혀 들어 올려진 손은… 놀랍게도 내 손이었다.
“이건 어쩌면 나는 모르는… 내겐 잊힌 기억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다시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는 기억이다. 어째서 ‘지금’의 나는 모르는 이 기억을 불러올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네 영혼의 무언가가 매개가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난 지금 이 기억을 몰라야 한다는 것이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어려진 실새삼은 자신의 과거 기억 대부분을 잃었다.
혹시 그 뜻인 걸까?
“난 어쩌면 너에게 이 광경을, 이 기억 속의 광경을 꼭 보여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건 절대 너에게 해가 될 리 없다. 내겐 어쩌면 과거에 섬기던 드루이드가 있었을 테지만 지금의 주인은 너다. 드라이어드에게 목숨보다도 소중한 드루이드다.”
실새삼의 말은 진중하고 깊게 박힌 진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난 그가 하는 말을 허투루 넘겨선 안 된다고 느꼈다.
왜 실새삼이 꿈속에 들어와 구태여 내게 과거의 기억을 보여 주려 하는 걸까?
“내 기억을 보고 느껴지는 것이 있나?”
글쎄, 잘 모르겠다. 음… 실새삼의 전주인, 이렇게 보니 나랑 다를 바가 없네?
내 드라이어드들이 소중하고 마냥 좋고, 여행 떠나는 것이 너무 즐겁고.
무게를 잡는 모습일 땐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나랑 닮았다.
여행이 끝나면 드라이어드들과 다 같이 산다고? 그것도 좋지.
“정말 닮았다고 생각하는가?”
실새삼은 입을 열 수 없는 날 이해한다는 것처럼 생각을 읽어 왔다.
“정말? 그와의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고?”
정말 어렵다. 대체 뭘 바라는 걸까? 내가 뭘 느껴야 하는 걸까?
그때 갑자기 눈앞에 보이는 실새삼의 형체가 크게 흐트러졌다.
마치 오류가 일어난 영상을 보는 듯했다.
차이점? 차이점이 뭘까? 실새삼의 전주인과 나의 차이점?
“그는 여행 초반만 하더라도 집에 가고 싶어 했다. 그와 처음부터 함께했던 드라이어드의 말론 매일 같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울었다고 하더군. 후반으로 갈수록 덜했지만 그래도 종종 집이 그립다곤 했다. 그런데.”
실새삼의 형체가 온전한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로 마구잡이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넌 왜 그렇지 않아?”
툭툭, 무언가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하나둘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실새삼의 형체가 이젠 완전히 조각나 하나둘 물에 떨어진 각설탕처럼 허물어 없어지는 것이 보였다.
“넌… 드루이드…!”
그의 입으로 보이는 형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인간….”
넌 드루이드 이전에 인간이다.
그 말을 끝으로 실새삼은 마치 이 공간에서 쫓겨나듯 모든 형체가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라지니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광경도 완전히 멈춰 버렸다.
점차 내 의식도 암흑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이 둔해지고 하나둘 주체를 잃어 간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단 하나, 퀘스트 문구처럼 선명하게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실새삼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내가 알아야 할 뭔가 있다.
그건 마치 잠에서 깨어나더라도 반드시 잊어선 안 될 중요 체크리스트처럼 뇌리에 박혔다.
의식이 꺼져 가는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찝찝한 그 생각만큼은 아무리 문질러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얼룩처럼 계속 남아 있었다.
실새삼이…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성장시켜야 한다.